독식하는 스트리머 (90)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을 태운 마차가 연회장에 도착했다. 연회장은 고급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4층 높이의 석조 건물에 딸려 있는 넓은 정원이었다.
지벨 백작령뿐만 아니라 인근 영지의 귀족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연회장 주변을 순찰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연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대기하던 젊은 하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유진 일행을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연회장으로 들어섰지만 귀족들 관심이 집중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도시를 구했는데 이런 무관심이라니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좋았다.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귀족들의 관심을 받아 봤자 귀찮을 뿐이다. 지금 이 연회장 안에서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귀족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벨 백작과 벨폰 자작 그리고 란테르고 백작은 당연하지만 유진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귀족’의 범주에 포함된다.
“유진 경!”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과 함께 적당히 요리와 술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지벨 백작이 반가운 목소리로 유진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이미 술을 꽤 마신 것인지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유진은 다가오는 지벨 백작을 향해 가볍게 예를 갖췄다. 그런 유진을 보며 지벨 백작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유진 경. 우리 사이에 너무 과한 예를 갖추는 거 아닌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네.”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연회장 안에 울려 퍼졌다. 유진을 향해 각별한 친분을 드러내며 그를 스스럼 없이 대하는 지벨 백작의 행동에 주위 귀족들의 이목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지벨 백작님이시군.”
“앞에는 누구지? 신흥 귀족인가?”
“그는 얼마 전에 오염된 정령들의 군세로부터 도시를 구원한 자유 기사 유진 경이오.”
“지벨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습니다.”
귀족들이 조용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고스란히 유진의 귓가로 전달되었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유진의 예민한 청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안 좋은 내용으로 수군거렸다면 한마디했겠지만, 지금 귀족들의 입에서 언급되는 것들은 하나같이 유진에 대한 미담이나 긍정적인 소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의 예법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진 경, 자네는 너무 딱딱하구먼. 뭐, 그것도 나름대로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네. 흠잡는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하하, 이런 사소한 문제로 오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유진은 쾌활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바이올라는 두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드레인은 호위 기사처럼 유진의 바로 뒤에 시립한 상태였다. 유진의 입가에 선한 미소가 깃들었다.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지벨 백작의 좌우를 살폈다.
우측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란테르고 백작이 그리고 좌측에는 지벨 백작의 하나뿐인 딸, 안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연한 녹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유진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며 뺨을 붉게 물들였다.
쑥스러운 듯한 행동을 보이는 안나를 보며 바이올라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나 쑥스러워하는 거 귀엽네.
―ㄹㅇㅋㅋ.
―그래 봤자 메인 히로인의 자리는 넘볼 수 없는 법!
―메인 히로인은 바이올라!
―바이올라! 바이올라! 바이올라!
―캣파이트 각 세우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청자들의 환호와 함께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지벨 백작을 앞에 두고 있는 탓에 채팅 창을 계속 주시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살펴보니, 시청자들은 바이올라를 연호하고 있었다.
“허허, 그래서 말인데…….”
지벨 백작은 유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사실 쉬고 싶은 마음에 간절했지만 그걸 면전에 대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옆에 서 있는 안나한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안나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유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은 것인지 반짝반짝 빛나는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주군.”
지벨 백작에게 붙들려 있는 유진에게 드레인이 다가왔다. 심각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유진은 대화 중이었던 지벨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드레인과 함께 연회장의 구석진 곳으로 걸어 나갔다.
“꽤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야?”
“연회장 바깥에서 불온한 기척이 감지됩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닙니다. 최소 수십 명이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소 수십 명이라고?”
드레인의 말을 들은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연회장의 주위를 순찰 돌고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드레인은 기척 감지에 관해서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스킬을 가지고 있다.’
B랭크의 ‘최상급 기척 감지’를 보유한 유진과는 다르게 드레인은 A랭크의 기척 감지 관련 스킬 중에서도 성능이 좋다고 평가받는 ‘포식자의 육감’을 보유하고 있다.
뱀파이어 특유의 생명체를 감지하는 데 특화된 감각이 더해진다면 웬만한 은신 수단으로는 그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
“바이올라한테 가서 경고를…….”
콰앙!
유진은 드레인에게 말을 전하려 했지만 문장을 끝맺기 전에 들려온 거센 폭발음에 목소리가 파묻히고 말았다.
연회장에서 일어난 폭발은 아니고 지면의 진동과 폭발음의 소리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연회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 하지만 영주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장소에서 뭔가가 폭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폭발이다!”
“어디냐?”
“연무장 방향입니다!”
“신속하게 움직여!”
연회장 근처에서 대기하던 경비병들이 폭발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무장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저건 양동이야.”
유진은 단번에 눈치챘다. 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조용히 동조를 표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현재 연회장에 모여 있다. 굳이 비어 있는 연무장을 노린 이유가 무엇일까?
연무장 옆에 무기고가 있지만 폭발을 일으킨 놈들의 목적은 무기고 강습이나 탈취가 아닐 것이다. 연회장에 집중된 경비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양동일 가능성이 크다.
“드레인.”
“네, 하명하시지요.”
“일단 바이올라와 합류하자.”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유진은 드레인과 함께 바이올라와 합류했다. 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사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폭발이 일어나고 기사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대부분의 귀족들은 여전히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뭔가 사고라도 난 걸까요?”
“작은 폭발일 걸세.”
“기사들이 보호해 줄 겁니다. 우리는 연회나 계속 즐기죠.”
멍청한 귀족 놈들. 그들은 무능한 펠다 남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진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표정을 관리했다.
지벨 백작이 기사단장 로웨스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고 란테르고 백작의 옆에는 어느새 왕립 기사단의 9번대 부대장, 다리크 벨키아 자작이 달려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를 보고하는 듯한 모양새다.
란테르고 백작의 무표정이 흔들리는 걸 보니 벨키아 자작으로부터 분명 심각한 내용을 보고 받는 것 같았지만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은 지금 당장 개입할 의사가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였다.
보다 못한 유진이 깊은 한숨을 푹 하고 내뱉으며 지벨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지벨 백작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서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벨 백작님, 긴히 드릴 말이 있습니다.”
“유진 경, 말해 보게.”
주변이 소란스러웠지만 지벨 백작은 ‘영원한 동맹’ 관계에 있는 유진의 말을 경청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귀족들을 대피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진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벨 백작은 바보가 아니다. 연무장 쪽에서 발생한 폭발이 시선 끌기라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연회장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들이 무능하고 어리석다고는 하지만 지벨 백작이 앞장서서 대피를 유도하면 그들도 연회를 즐기는 것을 멈추고 몸을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즉시 대피령을 내리겠네.”
지벨 백작은 유진의 의견에 동의하고는 귀족들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대피할 것을 권고했지만 귀족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 중 남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 남성이 군중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지벨 백작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지벨 백작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최선의 예를 갖추고 음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벨 백작님, 기껏해야 작은 소란이 아닙…… 커헉!”
북부의 어느 한적한 마을의 영주인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목에 꽂혔기 때문이다. 옆에 시립해 있는 기사가 미처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꺄아아아아악!”
“뭐, 뭐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남작이 죽었다!”
남작이 피를 쏟으며 쓰러지자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한 귀족들이 비명을 질렀다.
“적이다!”
지벨 기사단의 로웨스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연회장에 들어선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뽑아 든 기사들과 우왕좌왕하는 귀족들의 머리 위로 화살 비가 쏟아졌다. 귀족들의 호위를 위해 연회장에 배치된 4명의 중급 마도사가 황급히 실드를 펼쳤지만, 연회장 전체를 보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커헉!”
화살이 몸에 꽂힌 귀족들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힘 없이 쓰러졌다. 연회장 밖의 경비병들은 모두 전멸한 것인지 화살 비는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사단! 대응하라!”
로웨스가 10여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대열을 갖춰 진군했다. 여전히 화살 세례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곧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었으니, 묵빛의 철제 흉갑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들은 맹약 기사단 내에서도 하수인 계급으로 분류되는 전투원들이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귀족들의 앞에 중무장한 수십 명의 하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내 결계를 어떻게 속인 거지?”
지벨 백작가의 상급 마도사, 테이나가 경악했다. 그녀가 펼친 결계가 영주성 전체를 감시하고 있었다.
접근과 침투를 저지하는 종류는 아니었지만 웬만한 은신술은 간파할 수 있는 수준의 감시 결계였는데, 이만한 인원이 연회장에 침투하고 공작을 펼치는 동안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테이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당황하며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그림자를 뚫고 사람의 형상이 솟구쳤다.
“무, 무슨…… 꺄아아아악!”
테이나가 방어 마법을 펼치기도 전에 그림자에서 솟구친 복면의 암살자가 그녀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