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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스트리머-88화 (88/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88)

“지벨 백작, 오랜만이군요. 지난 왕실 연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루벤 왕국의 국왕이 임명한 칙임 조사관, 필립 란테르고 백작이 조용한 목소리로 지벨 백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금발에 녹색의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왕립 마탑 출신답게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안경에 묻은 먼지를 로브 소매로 대충 닦아 내고 짧은 한숨을 뱉었다.

“지벨 백작령의 치안이 악화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봅니다. 산적들이 무식하다고는 하지만 설마 왕실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행렬을 습격할 줄은 몰랐습니다.”

란테르고 백작이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2시간 전, 그의 행렬은 50여 명의 산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란테르고 백작은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선호하지 않는 탓에 호위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산적들은 수적 우세를 과신하고서 습격을 감행했지만 란테르고 백작만 해도 상급 마도사고 그를 호위하는 이들은 왕립 기사단 9번대 소속의 기사들이다. 루벤 왕국에서도 정예로 유명한 기사들에다가 9번대의 부대장인 다리크 벨키아 자작까지 행렬에 포함되어 있으니, 고작 산적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란테르고 백작과 호위들을 공격한 산적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다만, 란테르고 백작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이동 경로는 극비로 취급되고 있는데, 산적들은 마치 란테르고 백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절묘한 위치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조사해 봐야겠군.’

대수롭지 않게 넘길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란테르고 백작, 미안합니다. 보고 받았겠지만 지금 저희 영지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마나 오염 현상이 영지 곳곳에서 발견됐고 흉포해진 몬스터는 무리를 지어서 민가 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재앙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재앙의 시대가 재림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합니다, 지벨 백작. 그걸 위해 국왕 폐하께서 저를 파견하신 것이지요.”

중앙 귀족들은 재앙의 시대가 재림하는 걸 두려워한다. 재앙의 시대는 마왕이 거병하고 몬스터들이 봉기하는, 대륙 최악의 역사 중 하나로 모두가 마왕의 부활을 두려워하고 있다.

루벤 왕국의 국왕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중앙 귀족 중에서도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란테르고 백작을 칙임 조사관으로 임명하여 지벨 백작령에 파견한 것이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최근 왕국 전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사건들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고 계십니다. 지벨 백작께서도 발언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란테르고 백작의 충고에 지벨 백작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의 시대 때 루벤 왕국은 멸망할 뻔했으니, 지금의 국왕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동하시죠. 지벨 도시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죠.”

대화가 끝나고 그들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쉬지 않고 지벨 도시를 향해 말을 몰던 그들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멈춰 섰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지벨 백작의 말에 란테르고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지벨 백작의 행렬에 동행한 수습 기사들과 잡부들이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고 요리를 하는 등, 밤을 보낼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에 지벨 백작은 연락 마도사를 통해 영주성으로 통신 마법을 연결했다.

―영주님, 급히 보고드립니다.

활성화된 마법진 위로 나타난 형상의 주인은 연락 마도사가 아니라 지벨 백작가의 상급 마도사인 테이나였다.

“테이나 경? 대체 무슨 일인가?”

마나로 이루어진 표정을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희미한 형상 속에서도 심각한 분위기를 느낄 정도였기 때문에 지벨 백작은 서둘러 테이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펠다 남작님의 토벌대가 몰살당했습니다.

테이나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지벨 백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몰살이라고? 정확한 정보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동원된 영지군 병력만 해도 600여 명이었다. 거기에다가 펠다 남작이 개인적으로 동원한 기사단과 사병들까지 더하면 750여 명에 달한다.

전멸이 아니라 몰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 보면 그들 모두가 죽었다는 걸 의미했다. 쉽게 믿을 수 없는 비보였다. 750여 명의 군세가 몰살당한 것은 결코 가벼운 사건이 아니다.

―확실합니다. 벌써 사흘째 연락이 두절입니다. 돌아온 이들도 단 한 명 없습니다. 펠다 남작님이 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집단 이탈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몰살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게 맞습니다.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지금 즉시 정찰대를 편성하여 란빌 마을 방향으로 보내도록. 펠다 남작과 토벌대의 흔적을 추격하라고 해.”

―네, 영주님.

“그리고 도시에 남은 기사들을 소집해서 이쪽으로 지원 보내게.”

지벨 백작은 침착하게 지시했다. 펠다 남작이 이끄는 토벌대가 몰살당하고, 란테르고 백작이 산적들에게 공격당했다. 그는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위협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그는 테이나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마침 도시에는 영지 기사단의 전력이 남아 있었다. 지벨 백작과 함께 란테르고 백작을 마중 나온 이들과 영지 곳곳에 파견된 인원을 제외하더라도 약 200여 명의 기사단 전력이 대기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들을 소집하여 지원 보내겠습니다.

테이나의 대답에 지벨 백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 마법이 종료되고,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 내며 천막을 빠져나갔다.

찬바람이 불었고, 그의 앞에 란테르고 백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옆에는 호위 역을 맡은 벨키아 자작이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벨 백작, 무슨 일 있습니까?”

란테르고 백작이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펠다 남작의 토벌대가 전멸했다는 걸 말해야 할까? 왕실에서 명한 조사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라고 잠시 생각하던 지벨 백작은 이내 무엇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 가문에 충성하는 귀족 가신 중 하이로우 펠다 남작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하이로우 펠다 남작에 관해서라면 일정 부분 파악하고 있습니다. 꽤 무능한 귀족인 것 같더군요.”

란테르고 백작의 말에 지벨 백작은 작게 감탄했다. 설마 남작위에 불과한 하급 귀족의 정보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에게 토벌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렇군요. 듣고 있으니 설명해 보세요.”

두 눈을 가늘게 뜬 란테르고 백작을 보며 지벨 백작은 최근 영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설명했다.

오염된 정령들이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고 란빌 마을에서 키메라들이 날뛰었으며, 그들의 배후를 특정하여 토벌대를 보냈다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물론 유진이라는 이름의 금패 용병이 활약한 내용도 빼먹지 않았다.

“지벨 백작, 왜 하필 펠다 남작에게 토벌대를 맡긴 겁니까? 책망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펠다 남작이 무능하다는 소문은 다소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벨 백작이 말했다. 펠다 남작은 무능한 주제에 돈이 많았다. 그는 돈을 뿌리며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돈을 뿌릴수록 주변에 양아치 같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인간들이었지만 그중에는 꽤 괜찮은 인맥도 포함되어 있었고, 펠다 남작은 그들과 연계를 활용하여 고도의 정치질로 무능력함을 숨겼다.

지벨 백작은 어리석고 무능한 귀족은 아니었지만 무인의 성향이 강하여 정치에는 미숙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고, 펠다 남작의 무능에 대해 정확하게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슬픈 일이군요.”

유감을 표하는 란테르고 백작.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유감스럽지 않았다.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조사를 시작해야겠군요.”

란테르고 백작의 말에 지벨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나 상태 창.”

수련이 끝났다. 유진은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명령어를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마나 상태 창이 생성되었다.

[유진의 마나 홀.]

마나: 3750/3750.

이전에 확인했을 땐 대략 3300포인트 정도였다. 며칠 동안 수련에 집중했다고는 하지만 약 400포인트 가까이 상승한 것이었다.

마나 홀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영약도 아끼지 않고 구매해서 섭취하며 수련했다. 영약 구입에 소모된 금화만 해도 1,000골드를 우습게 넘길 정도였다. 더 비싸고 희귀한 영약을 섭취하고 싶었지만 그런 건 일반적인 경로로 구할 수 없었다.

유진은 이어서 정령 친화력을 확인하기 위해 명령어를 말했고, 눈앞에 상태 창이 생성되었다. 그는 눈동자를 움직여 정령 친화력 수치를 확인했다.

[정령 친화력.]

―화염: 140(+30)

―얼음: 90(+0)

―대지: 65(+0)

―바람: 70(+0)

정령 친화력은 ‘정령 군주의 호흡’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단순 반복 수련으로 정령 친화력을 올리는 것은 힘들다는 걸 알고 있던 유진은 담담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유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집중적인 수련은 당분간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시청자들이 지루하다고 비명을 지르던 게 기억이 났다.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건 모험과 전투다. 같은 패턴의 수련 같은 것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많이들 싫어하는 편이었다.

―드디어 수련 파트 끝났음?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아 ㅋㅋㅋㅋ 오랜 기다림이었다.

―ㄹㅇㅋㅋ.

―방장님 당분간은 활극 위주로 진행해 주세요.

수련이 끝났다는 걸 어필하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그동안 정말 많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연무장에서 나온 유진은 자신의 침실로 돌아가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복도로 나왔다.

“유진 경!”

제복 차림의 기사가 다가왔다.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캐릭터는 아니었던 거로 기억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영주님께서 유진 경을 찾고 있습니다!”

“돌아오셨나 보군요.”

“네, 10분 전에 영주성에 도착하셔서 현재 환복하고 계십니다. 유진 경께서는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할 말을 전하고 기사는 멀어졌다. 유진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응접실을 향해 걸었다. 응접실은 비어 있었고, 그는 적당한 곳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칙임 조사관으로 누가 왔을까.”

조사관으로 임명된 귀족이 누구냐에 따라서 진행할 수 있는 메인 스토리가 달라진다. 유진은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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