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86)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란빌 마을 인근에 위치한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 일명 1552번 거점. 오염된 마나에 중독된 정령들의 군세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지벨 도시를 무너뜨리겠다는 계략은 실패했다.
맹약 기사단의 평기사들 중에서도 간부로의 승급을 목전에 두고 있는 디엘론은 이번 실패로 많은 권한을 잃었고, 맹약 기사단 내에서의 입지도 심각한 수준으로 좁아졌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수인들을 1552번 거점으로 소집했다.
정보 수집과 공작 등의 특수한 임무를 맡은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대부분 전투원들이 란빌 마을 인근에 위치한 1552번 거점으로 모여들었다.최대한 빨리 집결하라는 디엘론의 명령에 하수인들은 1552번 거점으로 서둘러 모여들었고, 그 과정에서 암약회의 길드원들이 정보를 입수하고서 비밀리에 따라붙었다. 그들은 1552번 거점 근처에 숨어서 충분한 양의 정보를 수집한 후, 지벨 도시로 귀환했다.
“어째서 저들을 죽이지 않으신 겁니까?”
복면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리미터가 속삭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수준의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틀 전, 그는 정보 길드의 소속으로 보이는 이들이 1552번 거점 주변을 기웃거린다는 보고를 받고 손수 처리하려고 했었지만 디엘론이 나서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탓에 검을 뽑지 못했었다.
리미터는 직속 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디엘론의 지시를 따르긴 했지만 그의 속내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미행자들을 처리하지 말라는 지시를 이해하지 못했다.
맹약 기사단은 철저하게 대륙의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집단이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소수지만, 주요 정보들은 완벽에 가깝게 통제되고 있었다.
“정보가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큰일입니다.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리미터,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놈들이 가져간 정보는 기껏해야 이곳 1552번 거점의 위치 정보에 불과합니다. 제가 다 확인했으니, 걱정 마세요.”
디엘론은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본래는 거점의 위치도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정보에 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디엘론을 응시하는 리미터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디엘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리미터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정보 통제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간부가 찾아와 문책을 걸까 싶어서 두려웠다. 맹약 기사단에서 간부들은 악명이 높다.
솔직히 말해서 신빙성 높은 정보는 거의 없고 그저 소문만 은밀하게 돌아다닐 뿐이었지만 무자비한 철혈의 존재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거점의 위치가 노출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곳 1552번 거점은 폐쇄될 예정이었거든요. 다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마지막으로 재밌는 장난이나 치려고 합니다.”
디엘론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은색의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 낄낄거리며 웃고 있을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어깨를 들썩이며 괴이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그 모습은 광소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그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지만 속내는 엉망으로 뒤틀려 있었다.
1552번 거점은 디엘론의 본진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부하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1552번 거점을 폐쇄한다는 건 디엘론에게 있어서 형벌이었다.
간부 승급은 물 건너갔다. 간부로 있는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더 심한 형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지인은 어쩌면 자결이 요구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최악의 경우를 피하려면 디엘론이 최후의 불꽃을 태워 지벨 도시에 큰 피해를 입혀야만 했다. 그가 말한 ‘장난질’은 지벨 도시를 몰락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리미터.”
“네, 디엘론 경. 하명하시지요.”
“곧 손님들이 찾아올 겁니다.”
“손님이요?”
“그렇습니다. 손님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디엘론이 말했다. 그제야 리미터는 그의 계획이 뭔지 대략적으로나마 예측할 수 있었다.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리미터가 대답했다. 디엘론은 끅끅, 거리며 기분 나쁘게 억눌린 광소를 터뜨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맹약 기사단의 주요 은신처를 발견했다는 것은 큰 성과였다.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유진을 보며 벤자민은 씨익 웃고는 옆에 위치한 협탁의 서랍에서 곱게 접혀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가 발견한 은신처의 위치가 기록된 지도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쳤다. 벤자민의 말대로 지도였는데, 지형이 눈에 익었다.
―어디서 많이 본 지형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글자 못 읽어요? 지벨 백작령 지도라고 크게 적혀 있잖아요.
―못 봤음 ㅈㅅㅈㅅ.
―ㄹㅇㅋㅋ.
시청자들이 한바탕 소란을 떨었다.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지만, 유진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당장 채팅 창이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유진의 눈동자가 향한 곳은 벤자민이 건네준 지도였다. 그의 시선이 지도를 면밀히 살폈다.
“란빌 마을 근처군요.”
붉은 점으로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말을 타고 전속으로 달리면 3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죠. 매우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가깝네요.”
유진의 중얼거림에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사실상 란빌 마을의 지근거리나 다름없습니다. 그동안 가까운 거리 내에 은신처를 두고서 란빌 마을을 지속적으로 통제했던 거죠.”“다른 정보는요? 병력 구성이라든지, 특이 사항 같은 거요.”
“아쉽게도 위치 정보밖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벤자민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부하들을 아끼는 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 지도는 지벨 백작님과 공유해야 할 것 같네요.”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다. 맹약 기사단과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면 공유하기로 지벨 백작과 약속하기도 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그에게 은신처의 위치를 알려야 한다.
“저희는 이미 정보를 넘겼습니다.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유진 씨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벤자민 씨.”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음에 술이나 한잔하시죠.”
“영광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약속을 잡고서 유진은 ‘지하 곰팡이’ 주점을 빠져나왔다. 그는 곧바로 영주성을 찾아가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수련을 하고 있던 지벨 백작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오오! 유진 경!”
지벨 백작가와의 관계는 대규모 업데이트로 새롭게 추가된 최종 단계인 ‘영원한 동맹’을 자랑하고 있다. 검술에도 조예가 깊은 지벨 백작은 수련 중에 방해받는 걸 극히 싫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유진이 만나 줄 것을 청하자 흔쾌히 검술 수련을 중단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내고는 유진을 맞이했다.
“지벨 백작님,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 한 곳을 찾아냈습니다.”
본래 지벨 백작은 맹약 기사단에 대한 악감정이 없었지만 란빌 마을이 그들에게 유린당한 이후,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흔적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는 자신의 영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맹약 기사단을 징벌하기 위해 기꺼이 검을 휘두를 것이다.
“그게 정말인가?”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 한 곳을 발견했다는 유진의 말에 지벨 백작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온화했던 미소도 지워지고 그곳에 남은 것은 선명한 분노의 감정이다.
지벨 백작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맹약 기사단은 선량한 영지민들을 학살한 범죄 집단이다. 맹약 기사단을 향한 그의 분노는 정당했다. 유진은 품속에 접어서 넣어 둔 종잇장을 꺼내서 펼쳤다. 그것은 벤자민에게서 받은 지도였다.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장소가 표기된 지도입니다.”
“란빌 마을 근처로군.”
“란빌 마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근처에 은신처를 만든 것 같습니다.”
유진의 설명에 지벨 백작은 이를 바득 갈았다.
“맹약 기사단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네. 내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저들을 토벌할 것이야.”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지벨 백작이 영지군을 소집했다. 마침 오염된 정령들의 군세로부터 지벨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집결한 영지군 병력이 성벽 밖에 임시로 주둔 중이었다. 지벨 백작이 보낸 전령이 영지군의 임시 주둔지에 도착했고, 그들은 곧 도시의 서문에 집결했다.
모든 병력이 집결하지는 않았다. 도시에 대한 위협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영지군 지휘관의 판단 하에 600여 명의 병력이 서문 앞에 도열했다. 지벨 백작은 당장 그들을 지휘하여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를 공격하기 위해 갑주를 챙겨 입으려 했지만, 기사단장인 로웨스가 달려와 앞을 막아섰다.
“영주님! 중앙에서 임명된 칙임 조사관이 현재 영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칙임 조사관이라고? 나는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통신 마법 사용 중에 실수가 있어서 연락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 벨폰 도시 인근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벌써 벨폰 도시까지 왔다고?”
지벨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이 직접 임명한 칙임 조사관이라서 예법을 지키려면 지금이라도 벨폰 도시 인근으로 달려가서 그를 마중해야 했다.
“제기랄! 칙임 조사관을 마중 나가야겠군.”
지벨 백작은 아쉬움 가득 담긴 한숨을 토해 냈다. 직접 지휘하는 건 불가능해졌지만 토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진을 영지군 지휘관에 임명하여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왕국법에 따르면 지벨 백작가의 가신이 아닌 유진은 원칙적으로 영지군을 지휘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염된 정령들과의 전투에서도 유진은 영지군이 아닌 용병들로 구성된 토벌대의 지휘를 맡았던 것이었다.
지벨 백작의 시선이 로웨스에게 향했다. 기사단장인 로웨스라면 영지군 지휘를 맡을 자격이 충분했지만, 그는 왕국의 예법에 따라 칙임 조사관을 수행하기 위한 행렬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지벨 백작은 가문에 충성하는 하급 귀족들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응한 귀족은 4명에 불과했고, 그들 중 3명은 영지군 지휘를 맡기를 꺼렸다.
“제가 맡겠습니다.”
긴 침묵이 이어진 끝에 앞으로 나선 이는 무능하다고 소문난 하이로우 펠다 남작이었다. 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영지군 지휘를 희망했고, 다른 하급 귀족 3명은 펠다 남작이 지휘를 맡아야 한다면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펠다 남작이 맡으면 망할 것 같은데.
―무능한 귀족의 교과서 같은 캐릭터죠.
―영지군 전원 처치다! ㅋㅋㅋㅋ.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맹약 기사단의 은신처를 공격하기 위한 영지군 병력의 지휘관은 펠다 남작이 맡게 되었다. 평소 현명하던 지벨 백작이었지만 그는 펠다 남작의 고도의 정치질 때문에 무능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지군의 전멸을 우려한 유진은 펠다 남작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저를 고용하시죠.”
“경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펠다 남작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