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79)
지벨 도시 방어를 위해 집결한 병력은 영지 기사단 100여 명에 도시 수비대와 경비대 약 3000여 명, 그리고 용병들로 편성된 토벌대가 약 1000여 명이었다.
1000여 기의 오염된 정령을 상대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숫자의 병력이 집결한 것이었다.
도시가 전투 준비를 갖추자 오염된 정령들 또한 진군에 박차를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지벨 도시의 서쪽 방향 평야에 출현했다.
“오염된 정령들입니다!”
서쪽 성벽의 감시탑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가장 먼저 오염된 정령 군대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경종을 울렸다.
요란한 경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감시탑에서도 잇따라 경종을 타종하기 시작하면서 곧 도시 전체가 적군의 출현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경종 소리와 기사단장 로웨스의 보고를 받고서 잠에서 깨어난 지벨 백작은 웬만한 영지 기사단의 단장을 맡을 수 있는 수준인 A랭크의 실력자답게 직접 전선에 나설 생각으로 갑주를 챙겨 입으며 영지군의 전투 준비를 지휘했다.
“기존의 보고대로 적의 수는 약 1000기입니다. 현재 도시의 서쪽 평원에 공격 진지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웨스의 보고에 지벨 백작은 돌처럼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갑주를 갖춰 입은 그는 마지막으로 허리의 혁대에 검집을 착용하는 것으로 무장을 완료했다.
“유진 경은?”
“경종이 울린 순간에 이미 성벽으로 출발했습니다.”
“역시 부지런하군. 아주 든든해.”
지벨 백작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나도 서쪽 성벽으로 가겠네. 기사단을 준비시켜 두게나.”
“이미 연무장에 집결하여 대기 중입니다.”
“훌륭하군.”
흡족한 미소와 함께 지벨 백작은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연무장에 도착한 그는 영지 기사단과 합류하여 서쪽 성벽으로 향했다. 지벨 백작이 기사단과 함께 이동하고 있을 때 유진은 파티원들과 함께 서쪽 성벽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대략 천 정도 되는 것 같군.”
망원경으로 오염된 정령들의 진지를 살피며, 유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이면 보고 받은 적군의 전체 숫자다. 그들이 서쪽 평원에 전원 집결한 것을 보면 다소 부족한 숫자로 도시에 대한 포위망을 펼치는 대신 서쪽 성벽에 대한 일정 타격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쪽 성벽에 공격을 집중할 건가 봐. 이렇게 되면 우리도 여기에 토벌대 병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겠는걸?”
슬금슬금 뒤에서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용병 길드의 지벨 지부장을 맡고 있는 제시카였다. 그녀는 이번에 편성된 토벌대에서 부대장이라는 직함이 붙었다. 그 후로 용병 길드와 관련된 여러 업무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유진을 도와주고 있었다.
“토벌대와 영지군의 주력을 집결시키자는 거죠?”
“아주 정확해.”
제시카가 손뼉을 치며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유진은 바이올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바이올라, 지벨 백작가의 연락 마도사한테 마법 통신 연결 부탁할게.”
“오케이.”
유진의 요청에 바이올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통신 마법진을 그렸다. 곧 통신 마법진 위로 마나가 모여들어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그는 지벨 백작가의 연락 마도사였다.
―지벨 백작가입니다.
“토벌대장, 유진입니다. 지벨 백작님께 전달 가능합니까?”
유진이 마법진 앞으로 다가갔다.
―유진 경이셨군요. 영주님께서는 현재 서쪽 성벽으로 향하셨습니다만, 가문의 마도사들이 동행 중이라서 제게 말씀 주시면 따로 전달이 가능합니다.
영주성에서 도시 외성의 서쪽 성벽까지는 거리가 짧은 편은 아니었다. 유진은 마법 통신이 연결된 연락 마도사에게 서쪽 성벽으로 영지군 전력을 집중시켜 달라는 내용의 말을 지벨 백작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연락 마도사를 통해 영주님께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연락 마도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 통신이 종료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벨 백작이 기사단과 함께 서쪽 성벽에 도착하였고,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놈들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수성전으로 유도하는 게 아군에게 유리합니다.”
로웨스가 말했다. 아군의 수가 더 많지만 오염된 정령들의 전투력이 더 높기 때문에 로웨스는 수성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토리대로 흘러가고 있네요.
―오염된 정령들을 상대로 수성전 해도 됨? 얘네들 초장 거리 공격 수단이 엄청 많은 거로 아는데.
―ㄹㅇㅋㅋ.
―수성만 고집하고 틀어박혀 있으면 도시가 박살 날 거임.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모르죠.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오염된 정령들의 행진’ 이벤트에 대해서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오히려 수성전이 불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시청자들의 채팅대로 오염된 정령들은 장거리 공격 수단을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수성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유진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돌격을 감행해야 한다고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게 좋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유진은 자유 기사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재 용병 길드 소속이다. 토벌대장의 직함을 달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휘관 회의에서 그의 입김은 제한적이다.
그에 비해 지벨 백작의 휘하에는 귀족 세력이 중심을 잡고 있다. 유진이 돌격을 주장하더라도 하급 귀족들의 격렬한 반대에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 지벨 백작이 유진에게 우호적이라고는 하지만 휘하 귀족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오염된 정령들의 행진 이벤트를 진행할 때는 언제나 이랬지.’
한숨이 절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의견 주장이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입을 꾹 닫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진은 이내 피곤한 얼굴로 손을 들고서 입을 열었다.
“도시 밖에서 요격하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호오라? 유진 경은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기름이 낀 것 같은 불쾌하고 시비조의 목소리의 주인공은 귀족의 예복을 입고 있는 비만 체격의 남성이었다. 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에 유진은 시스템의 힘을 빌리기 위해 ‘주시자의 눈’을 발동했다.
[무능한 하이로우 펠다 남작(D) 이명: 없음.]
―하이로우 펠다 남작은 지벨 백작가에 충성하는 귀족 중 한 명입니다. 유능한 지벨 백작과는 다르게 무능한 망나니로 유명하며 술과 사치, 유흥을 즐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법에는 재능이 없으며 그나마 검술을 조금 익혔습니다만 그 실력은 대단치 않은 수준입니다. 지벨 백작 휘하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연회에 참가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북부의 하급 귀족들과 인맥이 넓은 편입니다.
엑스트라에 가까운 조연치고는 나름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는 정보 창이었다. 물론 쓸 만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읽으려면 ‘주시자의 눈’을 한 단계 높인 스킬 ‘성좌의 눈’으로 격상시켜야 했다.
―무능한 귀족 캐릭터 떴다!
―ㄹㅇㅋㅋ.
―설명이 너무 별로네요.
―그냥 놀기 좋아하는 무능 귀족 놈.
―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이었다.
“정령들이 장거리 공격 수단을 사용하면 도시가 큰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들이 장거리 공격 수단을 보유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겁니까?”
펠다 남작이 재수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다른 하급 귀족들도 펠다 남작의 편에서 유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등장한 자유 기사 용병이 지벨 백작의 호감을 사고 있으니, 위기감을 느끼고 질시하여 견제하기 위해 집단 행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정보를 입수한 건 아닙니다. 상대가 정령들이니,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뜻이군요.”
말을 마치며 씨익 웃는 펠다 남작. 속으로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무능하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지벨 백작이 문제 삼지 못할 수준에서 유진의 기분이 나쁠 만한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유진은 용병이라고는 하지만 자유 기사의 작위를 대놓고 함부로 멸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기분 나쁜 어휘를 골라 말하면서 은연중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더 주장해 봤자 피곤해질 뿐이다. 한 번 발언하는 걸 지벨 백작이 들었으니, 정령들이 장거리 공격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 이제 펠다 남작의 입지가 많이 좁아질 것이다. 유진은 돌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했고, 다수의 의견대로 도시 안에서 수성전을 유도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적 진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감시탑에서 마도학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고 있던 최하급 마도사가 소리쳤다. 마침 근처에 있던 유진이 감시탑 꼭대기로 올라가 최하급 마도사로부터 마도학 망원경을 건네받고서 적진을 살폈다.
망원 렌즈에 잡히는 광경은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염된 정령들이 융합하여 만들어진 ‘정령 거인’이 거대한 몸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바로 정령들이 자랑하는 장거리 공격 수단 중 하나였다.
“정령 거인이군.”
유진의 혼잣말을 들은 최하급 마도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정령 거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령 거인에 대해 알고 있나?”
“재앙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출현하는 몬스터잖아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마탑에 보고드려야 합니다!”
“꽤 똑똑하네. 책을 많이 읽었나 봐?”
서둘러 마탑에 보고해야 한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최하급 마도사와는 다르게 대략적인 이벤트의 흐름을 알고 있는 유진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 공격이 시작될 거다.”
유진의 예상은 정확했다. 정령 거인이 하늘을 향해 화염을 뿌리자 도시로 불벼락이 떨어졌다.
“조심해!”
“모두 피해!”
“하늘에서 불이!”
도시는 대혼란에 빠졌다. 성인 남성의 머리통 10개는 뭉쳐 놓은 것 같은 크기의 화염구 수백 개가 하늘에서 도시를 강타했다.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곳저곳에서 검붉은 연기가 치솟았다. 지벨 백작은 영지군 소속의 마도사들 중 전투 능력이 부족한 최하급과 하급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차출하여 긴급 소방대를 편성했다. 그들은 화재 진압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고 유진은 조용히 무장을 점검했다.
긴급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도시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습니다.”
로웨스의 보고에 지벨 백작은 펠다 남작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능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것인지 펠다 남작은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해결책이 있겠는가?”
지벨 백작이 말했다. 잠자코 의자에 앉아 있던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돌격해서 정령 거인을 처치해야 합니다.”
반대는 없었고, 돌격대는 신속하게 준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