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77)
정찰대를 구성하고 있는 오염된 정령들은 대부분 중급 정령이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상급 정령은 1체에 불과했다.
유진의 파티에는 A랭크가 셋이었고 로웨스와 제시카까지 더하면 A랭크의 실력자는 다섯이 된다.
기사단의 숫자도 적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정찰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바이올라의 강력한 공격 마법에 전위의 대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중앙이 노출되자 로웨스와 기사단이 돌격하여 순식간에 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 속에서 오염된 상급 정령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란 얼음 창과 두꺼운 방패로 무장한 얼음 속성의 정령이었다. 다만, 오염된 마나에 중독되어서 그런지 ‘타락’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기와 전신을 이루는 얼음의 색깔은 마치 짙은 그늘처럼 탁했다.
철그렁.
상급 정령의 움직임마다 강철이 마찰을 일으키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상급 정령이다!”
“넷이 함께 협공하면 승산이 있어!”
“가자!”
“오우!”
기사 넷이 오염된 상급 정령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상급 정령이 창을 휘두르자 피가 튀고 협공에 나선 4명의 기사는 힘없이 쓰러졌다.
―저기 기사들 다 썰리고 있는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님?
―ㄹㅇㅋㅋ.
―이러다 다 죽어!!!!!!!!!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
시청자들의 채팅을 확인한 유진은 차가운 기세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기사들을 상대로 얼음 창을 휘두르고 있는 오염된 상급 정령이 보였다.
“일대일로 맞붙을 생각이야?”
오염된 상급 정령을 노려보며 검을 고쳐 쥐는 유진의 옆으로 제시카가 다가왔다. 상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입고 다니는 푸른색의 로브와 철제 흉갑은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도와주시려고요?”
“그러려고. 상급 정령이랑 치고받고 할 기회는 많지 않거든.”
제시카가 말했다. 그녀는 오염된 상급 정령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뒤에서 엄호해 주시죠. 전위는 제가 맡겠습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괜찮겠어?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고는 들었지만 A랭크의 강자와의 교전 경험은 많지 않다고 들은 것 같은데.”
―방장님 무시하네.
―괘씸합니다.
―혼내 줘야 할 것 같은데요.
―ㄹㅇㅋㅋ.
제시카의 발언은 해석에 따라 유진을 다소 무시한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시청자들이 분노하여 채팅을 쏟아 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유진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오염된 상급 정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상급 정령 또한 유진의 접근을 감지했다. 그는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유진을 향해 얼음 창을 겨눴다.
“엄호할게!”
바로 뒤에서 제시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머리 위에 생성된 3개의 화염구가 상급 정령의 머리를 노리고서 날아들었다. 상급 정령이 화염구 공격을 막으려 방어 위주로 집중한 틈에 유진은 순식간에 바로 앞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액티브 스킬, ‘일검필살’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30%입니다.]
단숨에 마나를 응집시켜서 ‘일검필살’ 스킬을 사용했다. 매서운 속도로 휘두른 검격이 상급 정령의 목을 노렸지만, 상급 정령 역시 A랭크의 실력자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견고한 얼음 방패를 들어 올려 유진의 검격을 막아냈다.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지만 방패는 흠집조차 없었고, 상급 정령도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유진을 경계하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 올 뿐이었다.
―해치웠나?
―아직임.
―나름 혼신의 일격 아니었나? 안 통하네.
―방장님이 힘을 숨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채팅 창이 소란스러웠다. 유진은 채팅 창을 힐끔 확인하고는 자세를 고쳤다. 그의 옆으로 제시카가 다가왔다.
“제법이야. 꽤 괜찮은 일격이었어.”
제시카가 말했다.
―갑자기 칭찬? ㅋㅋㅋ.
―분위기 반전이네요.
―진심으로 인정해 준다는 게 아닐까요?
―사실 지금까지는 신고식이었던 것?
―ㄹㅇㅋㅋ.
조금 달라진 제시카의 태도에 시청자들이 반응했다.
“내가 같이 싸워도 괜찮을까?”
“물론입니다. 든든하네요.”
“영혼 없는 반응이네.”
유진의 고저 없는 음성에 제시카는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ㄹㅇ 리액션이 너무 별로인데?
―방장님 리얼 플레이 콘셉트라서 리액션 연습 별로 안 하신 듯.
―그런 것 같음.
시청자들의 채팅은 대충 넘기고서 유진은 제시카와 함께 상급 정령을 향해 합공 포지션을 잡았다. 이번에는 유진이 2열이었고, 제시카가 선두를 맡았다.
“내가 먼저 갈게!”
제시카의 몸이 상급 정령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휘두른 검에 화염의 오러가 깃들었고 다음 순간, 두 눈을 감았다가 뜨자 바로 앞에서 선명한 홍염의 파도가 제시카의 검격과 함께 오염된 상급 정령을 덮치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오염된 상급 정령이 괴성을 토해 내자 날카로운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폭풍과 파도가 충돌하고 희뿌연 수증기가 거세게 폭발했다.
“유진 경! 지금이야!”
제시카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검을 쥔 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유진이 단숨에 상급 정령과의 거리를 좁혔다. 일검필살을 한 번 더 사용해서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액티브 스킬, ‘일검필살’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50%입니다.]
첫 번째 ‘일검필살’에서 사용한 출력이 30%다. 이번에 사용한 것까지 더하면 80%의 마나 출력을 소모한 것이다.
마나 홀에 저장된 대부분의 마나를 사용한 덕분에 한줄기의 섬광과도 같은 일격을 가할 수 있었고, 오염된 상급 정령은 찰나의 순간으로 왼팔을 잃었다. 방패를 들고 있던 팔이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팔은 오러 블레이드를 방어하지 못하고 일격에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좋았어!”
제시카의 입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나이스 샷!
―훌륭한 일격이었습니다!
―일검필살. 이것은 높게 평가됨.
―근데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한 거 아님?
―방장님이 혼자도 아니고 잔당들은 파티원들이랑 기사단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죠.
―ㄹㅇㅋㅋ.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팔을 베어 내자 오염된 상급 정령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어그로 튀었다!
―랏 되었습니다!
―반드시 살아남아라!
시청자들이 소란스럽게 채팅을 치는 가운데, 몇몇 후원도 이어졌다. 유진은 차갑게 웃으며 전투 자세를 정비했다.
“와라!”
유진이 호기롭게 외쳤다. 도발로 받아들인 것인지 오염된 상급 전령은 분노한 듯 어깨를 들썩이며 하나 남은 팔로 유진을 향해 얼음 창을 겨눴다. 하지만 상급 정령이 망각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측면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금패 용병, 제시카의 존재였다.
“날 두고 어딜 보는 거야!”
힘찬 외침과 함께 제시카가 홍염에 물든 검을 휘두르자 다시금 불꽃의 파도가 일어나 오염된 상급 정령을 덮쳤다.
“그아아아아악!”
불꽃의 파도에 휩쓸린 상급 정령이 휘청였다. 시퍼런 냉기를 내뿜던 백색의 갑주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는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내지르며 요동쳤다.“지금이야!”
제시카가 신호를 보냈다. 얼음 속성의 오염된 상급 정령은 전신을 이루고 있는 냉기의 갑주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상태였다. 내부의 ‘정령 핵’을 파괴하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갑니다!”
칼날에 깃들인 오러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유진은 고함을 내지르며 오염된 상급 정령을 향해 몸을 던졌다.
푸른 궤적이 그려지고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칼날이 오염된 상급 정령의 냉기 갑주를 뚫고서 ‘정령 핵’을 파괴했다.
“그아아아아아악!”
정령이 고통의 비명을 토해 냈다. 냉기로 구성된 육신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히트다! 히트!
―치명타가 들어갔네요.
―ㄹㅇㅋㅋ.
―정령 전원 처치다!
―너흰 이제 지휘관도 없지?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상급 정령을 해치운 유진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로웨스와 기사들이 정찰대의 정령들을 빠른 속도로 처치하고 있었다. 정찰대 정령들의 숫자는 이제 20여 기도 남지 않았지만 로웨스와 기사단은 건재했다. 파티원들과 제시카 등의 활약 덕분이었다.
“후우!”
한숨이 튀어나왔다. 출력을 조정했다고는 하지만 ‘일검필살’ 스킬을 2번이나 사용해서 그런지 상당량의 마나가 소모된 상태였다. 로웨스와 기사단을 돕고 싶었지만 남은 마나가 거의 없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관전 모드인가요?
―지휘관 잡은 거면 충분함.
―할 만큼 했다.
―ㄹㅇㄹㅇ.
시청자들의 채팅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10분 검을 휘두르자 최후까지 버티던 오염된 중급 정령이 쓰러지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되었다.
“오염된 정령들을 토벌했다!”
“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로웨스가 지벨 백작가의 깃발을 흔들며 외치자 기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쏟아 냈다. 함께 전투에 참가한 용병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들은 이제 도시로 돌아갔을 때 오염된 정령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전한 소식을 널리 퍼뜨려 줄 것이다.
* * *
도시로 돌아왔다. 전투에 참가했던 용병들은 각자 흩어져서 승전보를 도시 전역으로 전파했고 지벨 백작은 이들에게 의뢰금 외에 별도의 특별 상금을 내리는 것으로 첫 승의 공적을 치하했다.
첫 승에 도시 전체가 들떴지만 유진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상대한 적이 선봉대 규모도 되지 않는, 고작해야 정찰대 역할을 수행하는 소규모 군사 집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지벨 백작이 주최한 조촐한 승전 축하가 한창일 때, 유진은 테라스로 빠져나왔다. 찬 바람을 쐬며 심호흡을 하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슬쩍 몸을 돌리자 테라스로 따라 나오는 바이올라의 모습이 보였다. 유진은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바깥 방향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유진, 괜찮아? 많이 긴장한 것 같아.”
바이올라의 말에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장한 표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에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았다.
‘고인물인 내가 이런 초반 이벤트에 긴장한다고?’
유진은 손톱을 살짝 깨물었다. 실수로 살까지 씹는 바람에 핏방울이 맺혔지만 약한 고통으로 인해 오히려 정신이 더욱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임 오버는 곧 죽음을 뜻하겠지.’
‘오염된 정령들의 행진’은 난이도가 제법 높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전쟁 군주 관련 이벤트 때보다 더욱 긴장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하지 말자. 어차피 이기는 건 나야.’
변수가 많이 작용하는 게임에 빙의했다고는 하지만 유진은 다회차 플레이어였고 고인물이라고 불렸던 스트리머였다. 고작 이 정도에 겁먹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한 번 해 보는 거다.’
유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