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76)
22장. 지벨 도시 공방전
용병 길드의 지벨 지부장, 제시카는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최근 지벨 백작령 내부뿐만 아니라, 인근 영지에서도 흉포해진 몬스터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탓에 용병들의 일거리가 많아졌다. 그 때문인지 지벨 지부장인 제시카의 집무실은 엉망이었다.
“집무실이 많이 엉망이지? 내가 일에 집중하며 주변에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래.”
제시카가 설명했다. 물론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일단 대충 앉아.”
제시카는 유진과 그의 일행들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의자도 쓰레기와 서류 더미 등으로 엉망이었기 때문에 유진과 파티원들은 주위를 대충 정리하고서 가까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제시카는 씨익 웃고는 본인도 집무실 책상 바로 뒤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뒤적이더니 곧 뭔가를 찾아냈다.
“유진 군, 지벨 백작님으로부터 토벌대장에 임명되었다는 서류는 전달받았어. 여기 있는데, 읽어 볼래?”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제시카는 유진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말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유진은 의자에서 일어나 제시카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고서 읽어 보았다.
긴박한 상황이라 그런지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상당히 많이 생략되어 있고, 본론만 짧게 적혀 있는 서류였다.
“다 읽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벨 백작님이 금고를 열고 금화를 풀었다고는 하지만 충분한 숫자의 용병들이 모이지 않을 수도 있어. 이미 토벌 대상이 정령이라고 공개해 버린 탓에 오히려 다른 도시나 영지로 철수하는 녀석들이 많을 거야.”
제시카는 현재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유진 군, 너도 알고 있겠지만 길드는 용병들의 동원을 강제할 수 없어. 기껏해야 중간에서 알선하는 정도야. 우리가 조력한다고 해도 설득을 하는 거지, 억지로 토벌대에 참가시킬 수 없다는 뜻이야. 지부는 철수하지 않을 테고, 나도 자리를 지키겠지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아.”
원칙적으로 용병 길드의 지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은 철수하지 않는다. 이는 길드 전체의 신뢰도가 엮인 문제였다. 때문에 그들의 철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고, A랭크 마검사이자 금패 용병인 제시카의 조력도 있겠지만 다른 용병들이 얼마나 호응할지가 문제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승산이 높지 않아. 오염된 정령이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라는 건 용병들도 잘 알고 있거든. 그리고 그 숫자도 1천이나 되잖아. 희망이 없어.”
제시카가 말했다.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면 그녀도 지벨 도시를 버리고 도주할 생각이었다. 그 계획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그녀의 속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네요.”
“유진 군이 상황이 제일 안 좋은 거 같은데? 토벌대장이라서 도망도 칠 수 없잖아.”
처음부터 도망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여과를 거치지 않은 것 같은 직설적인 발언이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레인은 은연중에 살기를 피어 올렸고, 바이올라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주군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유진은 그런 겁쟁이가 아니야.”
드레인과 바이올라가 한마디씩 했다. 특히 드레인은 살기를 금방 수습했지만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싸늘한 냉기가 묻어 나왔다. 당연히 제시카도 드레인이 날카로운 기세를 흘리는 걸 눈치챘지만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일 뿐이었다.
“워워, 거기 창백한 아저씨.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진정해.”
“제가 감정을 너무 드러냈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싸울 의사가 없다고 제시카가 말했다. 드레인은 굳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들 용감하구나? 본의 아니게 겁쟁이 취급을 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할게.”
“괜찮습니다.”
유진은 제시카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분위기가 빠르게 부드러워졌다. 드레인에게서도 더 이상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바이올라는 여전히 제시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저나 꽤 여유롭네? 묘수라도 있나 봐?”
여유로운 유진의 모습에 제시카는 두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묘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투박해서요. 어딜 가서 자랑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대책이 있다는 거지? 말해 줄 수 있어?”
“비록 거창하지는 않지만 계획이 있긴 하죠.”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적의 선봉을 꺾는 겁니다.”
유진의 말에 제시카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선봉을 꺾는다라, 승전보를 울려서 오염된 정령도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걸 강조할 생각인가 보네?”
“정확하게 봤습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정령 군세의 선봉을 꺾을 겁니다. 승전보가 울려 퍼지면 용병들의 생각도 달라질 겁니다.”
“흥미롭네요. 그런데 작전에 동원할 수 있는 군대가 있나요? 용병들은 아무도 안 가려고 할 텐데 말이죠.”
공격대 편성이 문제였다.
“용병들은 소수만 동행하면 됩니다. 그들의 역할은 전투가 아니라, 후에 승전보를 전파하는 게 되겠죠.”
“용병이 아니면, 누구를 동원할 생각인 거에요?”
“그건 차근차근 알게 될 겁니다.”
유진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 * *
제시카와의 만남이 끝나고 유진은 영주성으로 돌아와 지벨 백작을 만나서 용병 길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공격대를 조직한다면 승산이 있겠나?”
공격대를 편성해야 한다는 유진의 의견에는 지벨 백작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미 그는 모든 병력을 수성전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이올라가 상급 마도사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병력의 지원이 더해지면 선봉 정도는 확실하게 꺾을 수 있습니다.”
오염된 마나에 중독되어 인지 능력 등이 저하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령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는 지성체다. ‘군’이라는 집단을 형성하여 이동할 때 소수의 정찰대를 먼저 운용한다. 루베니아 연대기를 고인물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이 플레이한 유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걸로 A랭크의 전투원이 셋입니다. 기사단을 지원해 주신다면 반드시 적의 선봉을 꺾겠습니다.”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지벨 백작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진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전투가 임박한 시점에서 영지 기사단이라는 강력한 전력을 별도로 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지벨 백작을 신중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영주님, 저와 기사단을 보내 주십시오.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겠습니다.”
지벨 백작의 고민이 깊어지자 옆에서 얌전히 계획을 듣고 있던 기사단장 로웨스가 나서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좋아, 경들을 믿도록 하지.”
고민 끝에 지벨 백작은 기사단의 출정을 허락했다. 단, 기사단 전체의 출격 허가는 아니었고 일부에 불과한 30여 명의 인원을 차출하는 걸 승인한 것이었다.
영지 기사단장인 로웨스가 기사들을 집결시키는 동안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은 용병 길드로 향했다. 공격대에 동행하여 나중에 목격담을 퍼뜨릴 용병들을 고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고용하기 위한 비용은 지벨 백작으로부터 충분한 양의 금화를 제공받았다.
유진은 지벨 백작으로부터 받은 공고를 게시판에 붙이고 홍보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의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용병들을 동행하지 않고 승전보만 가져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공격에 참가한 용병들이 직접 무용담을 퍼뜨리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고민 중인 유진의 앞에 제시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유진을 향해 반짝이는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일거리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녀의 뒤로 용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제시카를 따르는 홍염 용병단의 단원들이었다.
“도와주시는 겁니까?”
유진의 말에 제시카는 씨익 웃어 보였다.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의뢰를 받으려는 거야. 당연하지만 보수는 챙겨 줘야 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너스까지 드리죠.”
“훌륭해. 10명 정도면 되겠지?”
“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높은 의뢰 성공률을 자랑하는 홍염 용병단이 합류하자 몇몇 용병들이 더 끼어들었다. 오전에 봤던 해결사처럼 수상한 의도를 가진 이가 있을까 싶은 마음에 ‘주시자의 눈’을 발동시켜서 모두를 살폈지만 다른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주시자의 눈’은 세계관으로 부여된 설정을 살짝 엿보는 것에 불과하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이를 모두 가려 낼 수 있는 만능의 스킬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는 것보단 낫기 때문에 유진은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유진은 홍염 용병단을 포함한 20여 명의 용병들과 함께 지벨 도시의 서문으로 향했다. 서문을 빠져나오자 집결해 있는 지벨 영지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 50여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유진 경.”
영지의 기사단장 로웨스가 다가왔다.
“방금 도착한 전령이 오염된 정령 군대의 동태를 전해 왔습니다.”
“동태가 어떻습니까?”
“정찰대와 본대로 군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본대는 소다크 요새를 공격 중에 있으며, 정찰대는 지벨 도시 방향으로 이동한다는군요.”
로웨스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찰대가 먼저 지벨 도시 방향으로 이동 중인 이유는 도시의 인근 지형을 확인하기 위함일 것이다.
‘정령들은 지성체니까 말이지. 오염되어서 지능이 떨어졌다고 해도 기본적인 전술은 기억하고 있다.’
소다크 요새가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장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
“정찰대의 숫자는요?”
“일백 기라고 합니다. 다만, 정령들의 등급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보는 충분합니다.”
정찰대에 섞여 있는 정령들의 등급은 중요하지 않다.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의 빅데이터에 의하면 기껏해야 C랭크에서 B랭크로 평가받는 중급 정령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며, A랭크의 경지에 오른 상급 정령이 하나에서 많다면 둘에서 셋 정도 편성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바로 이동하죠.”
유진이 말했다. 로웨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의 뜻을 표하고는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50여 기의 기사들이 숲을 향해 일제히 말머리를 돌렸다.
란빌 마을 방향으로 전진하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령들의 정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바이올라의 강력한 화염계 마법을 시작으로 오염된 정령들로 이루어진 정찰대와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기사단! 돌격!”
바이올라의 마법이 정령들을 휩쓸자 그들의 대열이 무너졌고 로웨스가 지휘하는 기사들이 돌격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