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74)
“나 달라진 거 없어?”
바이올라의 말에 유진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한편, 그녀의 겉모습을 살폈다. 왕립 마탑을 상징하는 푸른색의 로브와 보라색의 장발 그리고 푸른 눈동자.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다.
결국 유진은 ‘주시자의 눈(B)’ 스킬을 사용하여 바이올라의 내면을 살피기로 했다. 유진의 눈동자가 선명한 황금색으로 물들고 곧 그녀의 정보 창이 갱신되었다.
[상급 마도사 바이올라 루메이(A) 이명: 없음.]
―왕립 마탑 소속의 상급 마도사로 화염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한 천재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B랭크의 중급 마도사였지만 수명을 깎고 막대한 재화를 투자하는 힘겨운 수련을 통해 상급 마도사의 경지에 올랐으며 왕립 마탑의 지벨 지부에서 정식 절차를 밟았습니다. 왕립 마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최상급 마도사 유스타인의 직계 제자 중 한 명으로 루벤 왕국의 변경을 사수하는 루메이 후작가의 막내딸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강한 자에게 쉽게 호감을 가지며 강력한 힘을 원합니다. 이는 강력한 영주를 요구하는 변경 영지를 관리하는 루메이 후작가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싶었는데 A랭크의 경지에 오른 모양이다. 상태 창을 읽어 보니, 이미 왕립 마탑 지부에서 상급 마도사 인증 절차까지 홀로 진행한 것 같았다.
“모르겠지?”
바이올라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B랭크에서 A랭크로 경지가 올랐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기세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타인이 그 경지를 알 수 있는 방도는 많지 않다. 당연히 그녀는 유진이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알려 줄까?”
“ 상급 마도사가 됐다는 말을 할 생각이면 그럴 필요 없어.”
“어, 어떻게 알았어?”
바이올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질문하기는 했지만 설마 정답을 말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유진도 캐릭터의 정보창을 볼 수 있는 ‘주시자의 눈(B)’이라는 스킬이 없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시자의 눈’의 존재를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진은 대충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마나 홀의 기세가 변했어.”
“마, 마도사도 아닌데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는 거야?”
마나 홀의 기세를 읽는다는 것은 마나에 예민하거나 경지 높은 마도사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바이올라는 마나 홀의 기세가 변했다는 유진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냥 단순한 직감이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직감이라는 건 무섭지.
―바이올라 눈 동그랗게 뜬 거 보셈 ㅋㅋㅋㅋ.
―너무 귀여워요.
―히로인 점수 5점 드릴게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바이올라의 모습에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유진은 채팅 창을 힐끔 살피고는 다시 바이올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바이올라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다.
“유진, 혹시 나 몰래 마법 같은 거 익힌 거 아니지? 처음 봤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마검사였던 거야?”
마도사만큼은 아니지만 마나 운용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검사라면? 타인의 마나 홀의 기세가 변한 것을 감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이올라는 그렇게 추측했다.
“맞아, 나 사실 마검사야.”
“저, 정말?”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농담이었는데,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유진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농담이야.”
“흐응.”
농담이라고 밝혔지만 바이올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않았다.
“그런데 상급 마도사 자격을 얻기에는 견문행의 성과가 부족하지 않았어?”유진은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다행히 바이올라는 바뀐 대화 주제에 두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다.
“견문행의 성과는 충분했어. 덕분에 나는 이제 자유의 몸이야!”
상급 마도사 정도면 마탑의 소속이라고 해도 많은 자유를 보장받는다. 스승이라는 굴레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행이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앞으로도 계속 유진 너랑 함께 대륙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거야.”
바이올라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대사였지만 유진은 반응은 담담했다.
“그래? 상급 마도사가 함께해 준다고 하니까 기쁘네.”
“조금 더 기뻐해도 좋아.”
바이올라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영혼 없은 리액션이었지만 바이올라는 기분 좋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뼈를 깎는 것 같은 무식한 수련으로 마나 홀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견문행의 성과를 인정받아서 상급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날이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바이올라 너무 귀여움 ㅋㅋㅋㅋㅋ.
―ㄹㅇㅋㅋ.
―역시 근본 히로인이야.
―이건 진귀한 광경이군요.
들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은 꽤 귀여웠다. 시청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근데 저거 사실상 고백 멘트 아님?
시청자 한 명이 지적했지만 유진은 무시했다. 이 세계는 지극히 현실 같았지만 게임 속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냉정해진 것이었다.
‘나는 돌아갈 곳이 있어.’
유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바이올라가 있었다.
“유진?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바이올라를 보며 유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게임이면 어떠한가? 지금은 이곳이 현실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은 당분간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진?”
“영주성으로 돌아가자.”
“응.”
복잡한 심경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숙면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유진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바이올라는 앞서가는 유진의 뒤를 따르며 왕립 마탑 지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거렸다.
바이올라의 재잘거림은 영주성에 도착하고 각자의 방으로 헤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 *
바이올라가 상급 마도사의 자격을 인정받은 다음 날 아침, 영주성은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걸 직감한 유진은 일찍 일어나 갑주를 입고 장비를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혁대에 단검 몇 자루를 꽂아 넣기 무섭게 그의 눈앞에 투명한 창이 생성되었다.
―띠링! 메인 이벤트가 갱신되었습니다!
[메인 이벤트: 소란스러운 아침.
아침 일찍부터 영주성이 소란스럽습니다. 당신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창밖으로는 무장한 이들이 집결하는 모습이 보이고 복도에서도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우선은 이 소란의 정체를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지벨 백작에게 찾아가 보는 걸 추천합니다.
보상: 메인 이벤트의 진행.]
메인 이벤트가 갱신되었다. 정보 창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충분한 단서를 모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시스템이 스토리를 진행시켰다.
“슬슬 가 볼까.”
장비의 점검은 끝났다. 유진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지벨 백작을 찾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로그인.”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고서 명령어를 말하자 시야의 하단에 채팅 창이 활성화되었다.
―유진 하이.
―유하.
―방장님 안녕하세요.
시청자들이 줄줄이 접속했다.
[현재 시청자: 805명.]
실시간 시청자 숫자는 단숨에 800명을 넘겼다. 방송 첫날과 비교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유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준비는 끝났고, 슬슬 지벨 백작을 찾아가 볼까?”
언제나 그렇듯 혼잣말로 소통을 대신한다. 혼잣말을 한 차례 중얼거린 유진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하인들 대신 무장한 병사들과 기사들이 분주히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다들 바쁘네.
―상황 발생! 상황 발생!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채팅을 힐끗힐끗 살피며 유진은 지벨 백작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영주의 홀’로 향했다.
예상대로 지벨 백작은 ‘영주의 홀’에 있었다. 그 옆으로는 영지 기사단 단장을 맡은 로웨스와 다수의 기사가 모여 있었는데, 다들 심각한 얼굴이었다.
“유진 경! 어서 오게!”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지벨 백작은 유진을 환대했다. 로웨스와 기사들의 시선이 유진에게 집중되었다.
전체적으로 굳은 표정이지만 유진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기대에 젖어 반짝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군요. 무슨 일입니까?”
유진이 물었다. 지벨 백작은 어두운 표정으로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오염된 정령들의 군세가 포착되었다네.”
“정령들의 군세요?”
유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되물었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마치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는 듯한 반응을 연기한 것이었지만.
―방장님 발연기 어쩔 ㅋㅋㅋㅋㅋ.
―ㄹㅇㅋㅋ.
―방장님, 배우는 하지 마세요. 하면 큰일 날 것 같음.
―게임만 합시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물론 지벨 백작은 경황이 없어서 그런지 유진의 형편없는 연기에 넘어간 듯했다.
“오염된 정령이네. 대자연의 흐름과 섭리의 존재들이 오염된 마나에 중독되어 버린 모양이야.”
정령은 크게 여러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들 중에서는 대자연의 흐름을 따르며 인간계에 서식하는 이도 있다. 다만, 평소 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인간계의 섭리에도 간섭하지 않지만 오염된 마나에 중독되면서 그들의 성향이 극도로 공격적으로 변하면서 인간들을 ‘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오염된 정령 등장.
―이 몸 등장!
―슬슬 메인 이벤트 진도 쭉쭉 빼나요?
―몹시 기대가 됩니다.
오염된 정령의 군세가 출현했다는 지벨 백작의 말에 채팅 창이 소란스러워졌다.
“군세가 집결한 곳은 어디죠?”
“란빌 마을 인근이라네.”
또 란빌 마을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란빌 마을의 인근에 또 다른 은신처가 있는 모양이다.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일천.”
“꽤 많군요.”
정령의 무력은 D랭크에서 A랭크로 다양하다. 하지만 다회차 플레이어의 경험이 섞인 기억을 더듬어 보면 C랭크와 B랭크의 전투력을 지닌 중급 정령들이 대부분으로 그들이 군세의 주력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숫자가 일천이라면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일천 규모의 기사단이 집결해 있다고 볼 수 있는 전력이다.
“영지 전역에서 전란의 기운이 들끓고 있다네. 다른 요새에 주둔 중인 병력을 뺄 수 없어서 지금 당장은 도시의 수비 병력만으로 정령 군세를 막아내야 하는 상황일세.”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용병 길드를 고용하여 토벌대를 편성할 계획이라네.”
병력이 부족하면 용병들로 충원하면 된다. 자금만 충분하다면 꽤 괜찮은 대책이다.
“그래서 말인데, 유진 경. 토벌대의 대장을 맡아 주겠나?”
―띠링! 메인 이벤트가 갱신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