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69)
20장. 란빌 마을 공격
유진은 지벨 백작에게 란빌 마을에 대해 파악한 정보를 모두 설명했다. 정보를 얻었다고는 하지만 실체가 있는 물증도 아닐뿐더러,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대부분이라 설명을 하면서도 지벨 백작이 믿어 줄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란빌 마을을 공격해야 합니다.”
더 지체하면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크다. 유진은 란빌 마을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란빌 마을을 공격하는 건 어렵다네.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의 관리 하에 있는 영지이기도 하네. 심증만으로 섣불리 공격하는 건 어렵네.”
역시 그렇군. 유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벨 백작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수색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군. 수색으로 이목을 돌리는 동안 유진 경이 동료들과 함께 ‘물증’을 찾으면 될 것이야.”
“괜찮은 방법이군요.”
지벨 백작의 제안에 유진은 긍정했다.
“지금 당장 병사들을 동원하도록 하지. 마침 영지 기사단의 로웨스 경이 임무에서 복귀했으니, 그가 수색을 지휘할 걸세.”
로웨스가 움직인다는 건 지벨 백작령의 영지 기사단도 움직인다는 걸 의미했다. 기사단 전체가 동원되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전력이다. 든든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조력자를 찾아오도록 하죠.”
“조력자라,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인가?”
“그렇습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유진 경이 신뢰하는 인물이라면 나도 믿겠네.”
과거에 유진이 안나의 목숨을 구해 준 이후부터 쭉 이어진 그의 활약과 선한 행보 덕분에 지벨 백작이 유진에게 보내는 지지와 신뢰는 두터웠고, 현재 진행형으로 그 수치가 높아지고 있었다.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드레인은 지벨 백작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소집하는 동안 벤자민이 있는 ‘지하 곰팡이’로 향했다.
“제가 경계를 서고 있겠습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장악한 란빌 마을에서 시에라를 구출한 직후다. 혹여 미행이 붙었거나 보복 공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드레인이 출입구 경계를 자처했다. 드레인이 뒷골목을 지키고 있는 동안 유진은 바이올라와 함께 ‘지하 곰팡이’를 방문했다.
“오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서자 아슈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에 얼떨떨하게 서 있자 아슈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예전과는 다른 호의적인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시에라를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를 표합니다.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시에라를 구해 줘서 그런 것 같다. 아슈르의 시선과 언행에서 깊은 호의가 묻어 나왔다. 유진은 진심으로 사과하는 아슈르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소한 걸 마음에 담아 둘 생각은 없었다. 유진은 쿨하게 말했고, 아슈르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벤자민 씨는 아래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별을 보낼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아슈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지하와 연결된 비밀 문이 열리고 벤자민이 올라왔다. 그는 유진과 바이올라를 보자 씨익 웃으며 두 팔을 열었다.
“전우들께서 찾아왔군요.”
벤자민이 환한 얼굴로 두 사람을 환대했다. 단순한 의뢰 관계였던 이전보다 훨씬 달라진 분위기였다.
“시에라는 괜찮습니까?”
“빨리 구출된 덕분에 제 예상보다는 상태가 괜찮습니다. 유진 씨와 바이올라 씨 그리고 드레인 씨가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빠른 구출 덕분에 벤자민의 예상보다 상태가 양호한 것이었다. 구출이 조금만 늦어졌더라도 시에라의 목숨은 위험했을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정신이 멀쩡하게 버틸 수 없는 강도의 고문이었다. 암살자 출신인 벤자민 또한 시에라의 진술을 듣고서 놀랄 정도였다.
“다행이로군요.”
“한데 어떤 일로 찾아오신 건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아쉽게도 시에라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란빌 마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 정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보를 얻으러 온 게 아닙니다.”
정보 길드에 방문했으나, 정보를 사러 온 것은 아니었다. 이 무슨 재미 없는 농담일까?
“란빌 마을을 수색하기로 했습니다.”
“지벨 백작이 병력을 소집하는 것 같더니, 그런 이유였군요.”
역시 정보가 빠르다. 대륙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정보 길드, 암약회의 지부장다웠다.
“수색 시기는 언제입니까?”
벤자민이 질문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유진은 곧바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아마 1시간 내로 출정할 겁니다.”
“빠르군요. 지벨 백작다운 결단과 행동력입니다. 한데 저를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의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의뢰요?”
“그렇습니다. 영지군이 란빌 마을을 ‘형식적’으로 수색을 진행하는 동안 제가 파티원들과 함께 지하의 이면을 탐색할 겁니다.”
요컨대 영지군의 수색은 미끼에 불과하다. 유진의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벤자민은 계획의 요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정보를 수집할 인원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정확합니다.”
“그래서 제게 의뢰를 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유진의 말에 벤자민은 두 눈을 감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혹스러운 결정이었다. 대체 왜지? 유진의 얼굴이 의문이 깃들였다. 하지만 곧 해답을 알 수 있었다.
“대신 제가 ‘개인’적으로 돕는 거로 하죠. 인간 대 인간으로 말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유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벤자민은 길드에 소속된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움직인다고 해도 걱정이 되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일이니, 문제의 여지는 없습니다.”
씨익 웃으며, 벤자민은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1시간 안에 출발한다고 했었나요?”
“그렇습니다.”
“서둘러 준비하도록 하죠. 10분이면 됩니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지만 벤자민은 정말로 10분 만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유진과 바이올라 그리고 벤자민은 뒷골목에서 드레인과 합류하여 영주성으로 향했다. 영주성에서는 이미 20여 명의 기사들과 수백 명의 병사가 집결해 있었고, 지벨 백작 또한 무장을 갖춘 채 군마를 타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은색 갑주를 갖춰 입은 로웨스가 있었다.
“유진 경!”
군사들의 대열에 접근하자 지벨 백작이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환대했다.
“준비는 거의 끝났다네. 5분 후면 출발할 수 있을 것이야.”
지벨 백작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대로 5분 후, 대열을 갖춘 기사들과 병사들이 영주성을 빠져나와 란빌 마을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행선지를 란빌 마을에 들키지 않기 위해 지벨 백작과 영지군은 북쪽으로 향했고 로웨스와 기사들 만이 은밀하게 란빌 마을로 향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감시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은신과 암살에 능한 벤자민과 드레인에 의해 사냥당했다.
“이걸로 8명입니다. 뒤에 붙은 미행이 꽤 많군요.”
미행자를 처치하고 돌아온 벤자민이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유진은 돌처럼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이 8번째라면, 미행은 전부 처리한 것 같습니다.”
도시를 나오기 무섭게 뒤따라 붙은 기척이 스물이었다. 그리고 지벨 백작의 부대와 분열했을 때 여덟이 따라붙었다. 유진도 기척을 감지하긴 했지만 벤자민의 도움이 없었다면 거의 동시에 8명 모두를 처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미행자들이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기 전에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하는 게 관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란빌 마을까지 전속력으로 진군하면 되는 것인가?”
로웨스였다. 그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고, 그들은 란빌 마을을 향해 전속력으로 이동했다.
“영주님의 명령이다!”
란빌 마을에 도착하기 무섭게 로웨스가 고함을 내질렀고, 중무장한 기사들이 마을로 몰려 들어갔다. 그들이 미끼가 되어 수색을 진행하는 동안 유진은 벤자민 그리고 파티원들과 함께 지하로 진입했다.
지하 공간은 거대했다. 천장은 높았고, 통로도 넓었다. 수십 개의 방이 있었는데, 대부분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실험체들이 가득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증거 인멸이 진행 중인 것 같군요.”
“그런 것 같네요.”
벤자민의 말에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긍정했다. 전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기척들이 느껴지고 있었다.
“빠르게 처리하죠.”
유진이 검을 빼 들자 벤자민 또한 입가에서 미소를 싹 지운 채 허리 혁대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유진이 앞으로 나섰다. 기척을 죽이고서 빠르게 접근하여 가장 가까이 있던 복면인의 뒷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커, 커헉!”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다.
―깔끔한 암살.
―제 점수는 10점입니다.
―ㄹㅇㅋㅋ.
시청자들이 채팅을 쳤고, 복면인들은 기습을 눈치채고서 유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 적이다!”
“거짓말! 수색대는 아직 지상에 있을 텐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지상의 기사들이 수색 인원의 전부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진이 일행들과 함께 별도로 움직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막아.”
“무슨 일이 있어도 자료들을 넘겨서는 안 돼!”
넓은 공동에 산개해 있는 복면인들의 숫자는 16명. A랭크의 실력자는 없고, 모두 B랭크였다. 그들 중 4명은 증거 인멸을 멈추지 않았고 12명이 유진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유진! 엄호할게!”
바이올라의 외침이 넓은 지하 공동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허공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에서 화염의 창이 발사되었다.
“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B랭크 화염계 마법이다!”
“다들 주의해!”
화염의 창이 빗발치고 복면인들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1초도 지나지 않은 찰나의 순간에 이미 공격은 시행되었고, 12명의 복면인 중 절반에 화염에 휩쓸려 불타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이 죽음의 불꽃으로 환하게 밝혀졌다. 바이올라는 아직 B랭크라고는 하지만 대 마법사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재능 있는 화염계 중급 마도사였다. 그녀의 마법은 강력했고, 복면인들의 예상을 상회했다.
“제기랄!”
“조장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죽는다! ‘그것’들을 깨워!”
조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증거 인멸을 진행하던 복면인들이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던 기계 장치를 작동시켰다.
육중한 뭔가를 끌어 올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수십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유진은 그것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키, 키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