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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하는 스트리머-64화 (64/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64)

19장. 란빌 마을

“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디엘론의 입 밖으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량의 피가 벽에 튀었다. 어둠 속에 가려진 얼굴에서 분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제기랄!”

욕설이 절로 튀어 나왔다. 차오르는 분노를 이겨 내지 못한 디엘론은 협탁에 놓여 있는 유리병을 벽을 향해 던졌다.

쨍그랑!

벽에 부딪힌 유리병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복도까지 들릴 만한 요란한 소리였지만 누군가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호출할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수인들 역시 괜히 들어갔다가 디엘론의 진노를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출입 금지 명령을 오히려 반겼다.

“이렇게 당할 줄이야.”

디엘론은 로투스 마을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의 금패 용병과 조우했을 때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유진의 검격은 보이지 않았다.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잔상조차 쫓을 수 없었던 검격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서운 놈이야.”

디엘론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하늘이 서서히 어둠에 물들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군.”

디엘론이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유진에게 입었던 부상은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소덴이 남긴 힐링 포션들 덕분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은색의 가면을 쓰고서 복도로 나오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수인이 한 걸음 다가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는 죽은 소덴을 대신하여 디엘론의 부관 역할을 맡게 된 하수인, 리미터였다.

“디엘론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식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제단을 둘러보시겠습니까?”

리미터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단이 언급되자 디엘론의 입가에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광기였다. 디엘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리미터는 길게 이어진 복도를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앞장서겠습니다.”

리미터가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디엘론은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들은 ‘제단’이라고 불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마정석을 깎아서 만든 탑의 형상을 한 제단은 하론 숲의 깊숙한 곳, 마나 오염 현상의 근원지 중 한 곳에 만들어져 있었다.

한 차례, 제단을 둘러본 디엘론은 입가에 기분 나쁜 느낌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제단에 고정되었다.

“진행 속도가 나쁘지는 않지만 다소 부족한 감이 있군요.”

“소덴 경이 목숨을 잃는 바람에 진행이 조금 늦어지고 있습니다.”

리미터의 대답에 디엘론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의식의 진행 속도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다. 이대로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좋지 않군요.”

“속도를 올리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한 것 같으니까 말이죠.”

“최소한의 조건 말씀이십니까?”

설마 이대로 계획을 결행할 생각일까? 리미터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의식 준비 단계가 완전하지 않다. 계획을 시작하기에는 이르다는 게 리미터의 생각이었지만 그의 심정을 모르는 것인지 디엘론은 제단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이 속도라면 일정을 맞추기 힘들 수도 있어요.”

디엘론이 말했다. 리미터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진행하세요.”

“디엘론 경, 아직 의식이 완전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계획을 시작하면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변수는 늘 함께하는 존재예요.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일정을 맞추지 못하는 걸 두려워해야 할 겁니다. 상부에서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을 테니까요.”

말을 마치며 디엘론은 흠칫 몸을 떨었다. 맹약 기사단에서도 평기사에서 간부로 승급을 앞둔 그는 ‘상부’라고 불리는 원탁 회의가 얼마나 냉혹하고 결과를 중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일을 진행하면 의식의 결과물이 통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리미터가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그는 부디 디엘론이 실행의 뜻을 철회하기를 바랐지만 번복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 계획의 목적은 도시의 파괴일 텐데 말이죠. 의식의 결과물을 굳이 통제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고 있는 디엘론을 보며 리미터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 뜻을 알겠다면 서둘러 결행하세요. 그 머리통이 몸에 계속 붙어 있는 걸 원한다면 말이죠.”

“아, 알겠습니다. 디엘론 경. 결행하겠습니다.”

* * *

지벨 도시까지의 여정은 험난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무장하지 않은 마을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꾸준히 이동한 끝에 지벨 도시의 지근거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멀리서 지벨 도시가 보였다.

도시의 형체가 선명해질수록 유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도시와 가까워지자 반쯤 무너진 성벽과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까마귀 떼가 선명하게 보였다.

“도시가 공격당한 모양입니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드레인이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벌써 도시가 공격당했다고?’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조차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도시의 상공을 맴도는 까마귀 떼를 바라보며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드레인, 행렬을 부탁할게.”

“도시로 가십니까?”

드레인의 물음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먼저 가서 확인할 게 있어.”

“알겠습니다.”

“부탁할게.”

“행렬은 맡겨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지키겠습니다.”

도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행렬이 공격당할 가능성은 적지만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법이다. 유진은 자신 다음으로 일행에서 전투력이 높은 드레인에게 피난 행렬을 부탁하고는 도시를 향해 땅을 박찼다.

빠른 속도로 단숨에 도시의 북문에 접근했다. 갑작스러운 기척의 접근에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습 기사와 병사들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향해 창칼을 겨눴다.

불과 얼마 전에 도시가 공격당했었기 때문에 파수 병력 모두 신경인 날카로웠고 긴장 상태였다. 다행히 수습 기사 중 한 명이 유진의 얼굴을 알아봤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서둘러 창칼을 거둘 수 있었다.

“유진 경!”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습 기사 중 한 명이 뛰어나왔다. 그는 지벨 백작가의 수습 기사 안티즈였다.

“안티즈 경,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틀 전 오염된 마나에 중독된 몬스터들이 도시를 공격했었습니다.”

수습 기사 안티즈는 설명을 시작했다. 오우거가 포함된 수백 마리 규모 몬스터 무리의 공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도시의 병력 대부분은 오염된 마나에 중독된 몬스터들이 날뛰는 인근 지역에 파병 간 상태였기 때문에 수백 규모의 공격에도 평소보다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북쪽의 성벽 일부가 무너지는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설마 도시가 벌써 공격당했을 줄이야, 이렇게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변수에 따라서 게임의 메인 이벤트조차 조금씩 다르게 진행된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전개가 크게 변한 건 처음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유진 그리고 안티즈가 뭐라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그의 뒤에서 전령이 달려와 유진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유진 경,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도록 하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전령이 앞장섰다. 유진은 말없이 앞서가는 전령을 뒤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주성의 성문 앞에 도달했다.

유진과 전령의 접근을 확인한 수습 기사가 수신호를 보내자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좌우로 천천히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전령이 길 안내를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영주성 안의 호화스러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를 맡겠습니다.”

으리으리한 저택 안에서는 집사가 안내를 맡았다. 집사는 영주 집무실로 유진을 안내했다.

“유진 경, 어서 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집무용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지벨 백작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도시가 공격까지 받은 상황이니 당연하다.

“오랜만이군.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보고는 전해 들었네.”

지벨 백작이 말했다.

“페이든 경이 따로 보고를 했나 보군요.”

“그렇다네. 페이든 경과는 신속한 상황 확인을 위해 독자적인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다네. 부디 기분 나빠하지는 말게나.”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기분 나빠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페이든은 상급 마도사다. 실전 마법에 약하다고는 하지만 통신 같은 간단한 마법도 구사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로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별도로 유지하던 연락망을 통해 유진을 감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보고와 상황 전달 등을 위해 사용했을 테니 말이다.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지벨 백작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약속된 보상을 주겠네.”

10,000골드가 담긴 F랭크 아공간 주머니를 받았다. 유진은 내용물이 이상 없는지 확인을 끝낸 후 지벨 백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요.”

“우선 앉지.”

지벨 백작은 유진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유진이 집무실 책상 앞의 의자에 앉자 지벨 백작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시가 공격당했다네.”

“안티즈 경에게 들었습니다.”

“어디까지 들었나?”

지벨 백작의 물음에 유진은 안티즈 경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말했다.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만 알고 있군.”

“그렇습니다.”

“단순한 몬스터 무리의 습격이 아니었네. 조직적인 공격이었어.”

조직적인 공격이라,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지벨 백작과 다르게 유진은 비교적 침착한 얼굴이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의 다회차 플레이어로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당시의 상황을 대강 짐작한 것이었다.

“조직적인 공격이라, 몬스터들을 통솔하는 누군가 있었다는 뜻이군요.”

“정확하게 알고 있군. 몬스터들을 지휘하는 이가 있을 가능성이 컸지. 다만 통솔자가 누군지 확인하지는 못했다네. 심지어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그것조차 모르네.”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공격이 끝나고 조사대를 파견했다네. 기사 둘에 수습 기사 다섯으로 이루어진 조사대였지.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네.”

지벨 백작의 얼굴에 깃들인 고뇌가 더욱 깊어졌다.

“정보 길드에도 의뢰해 봤지만 소용없었다네. 도저히 단서를 찾을 수 없었어.”

말을 마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벨 백작. 그가 이용했다는 정보 길드는 아마도 대륙에서 중위권 정도로 평가받는 ‘흑석’ 길드일 것이다. 지벨 백작조차 대륙에서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정보 길드 ‘암약회’에 대한 접촉 방식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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