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62)
―불타고 있는데?
―자료 다 날리게 생겼네.
―루베니아 연대기에 이런 이벤트가 있었나요?
―모름. 아마도 이번에 대규모 업데이트로 생긴 새로운 변수인 듯?
―ㄹㅇㅋㅋ.
시청자들은 웃고 떠들었지만 유진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바이올라, 보호 마법 부탁해.”
한발 늦게 도착한 바이올라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줄 것을 요청했다. 바이올라는 거칠어진 호흡을 정돈할 겨를도 없이 주문을 캐스팅하여 유진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 주었다.
유진의 화염 저항력은 높다. 하지만 저것은 한눈에 봐도 마법의 불꽃이다. 쉽게 파고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바이올라의 보호 마법 만으로도 2%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즉각 상점 창을 열고서 스킬을 추가 구매했다.
‘중급 화염 저항(D)’이 ‘상급 화염 저항(C)’이 되었다. 이 정도면 준비는 충분했다. 유진은 불에 타들어 가며 반쯤 무너진 자경단 본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유진! 조심해!”
바로 등 뒤에서 바이올라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뒤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바이올라를 뒤로한 채 유진은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 무너져 가는 본부 건물 안으로 들어섰으나,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고 들은 금고를 바로 찾을 수 없었다. 뜨거운 화염을 견뎌 내며 이리저리 시선을 흩뿌리고 있을 때였다.
‘뭔가 온다.’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세에 유진은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던졌다. 날카로운 뭔가가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도 마법인가?”
심상치 않은 기척에 서둘러 고개를 들자 정면에서 검은 마나 탄환이 방향을 반전하여 유진을 향해 날아온다.
―암흑 마법이다!
―지금 암흑 마법이 등장할 시기가 아닌 것 같은데?
―누구죠? 좀 이른 것 같은데.
―흑법사 마덴? 암흑 검성 유라시아? 흑룡사 제이론? 전부 후반 등장 캐릭터인데 ㄷㄷ.
시청자들이 동요했다. 유진의 머릿속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암흑 마나는 다루기 까다롭기 때문에 관련된 악역들은 대부분 후반 캐릭터였다.
‘일단 피하고 생각하자.’
지금은 공격받고 있다. 다른 생각에 깊게 빠질 여유는 없었다. 유진의 검에서 오러가 솟구쳤고, 다음 순간 허공에 푸른 궤적이 그려지는 것과 동시에 암흑 마나의 탄환들이 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힘을 잃은 암흑 탄환들은 허공에서 허무하게 흩어졌고, 바닥에서는 검은 안개가 차올랐다. 검은 마나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본 유진은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검은 마나의 기운은 이내 한곳에 뭉쳐지더니,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은색의 가면을 쓰고 검은 로브를 입은 채 강철 스태프를 든 한 명의 사내.
“제 마법 공격을 그렇게 쉽게 피할 줄이야,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던가요? 제법이군요.”
“내 이름을 알고 있군.”
유진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디엘론을 향해 ‘황금 눈동자(C)’를 사용했지만 이름과 랭크가 보이지 않았다.
“이름이라, 알고 있을 수밖에 없죠? 최근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금패 용병이잖아요? 저희 계획도 몇 개 방해했고 말이죠. 저희한테도 나름의 정보망이라는 게 있답니다?”
디엘론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 모르시는 것 같아서 소개하자면 제 이름은 디엘론입니다.”
자신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를 하는 디엘론. 유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디엘론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던가?
워낙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 모든 캐릭터의 이름을 외울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유명한 네임드들이나 비중 높은 캐릭터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디엘론은 누가 봐도 엑스트라 단역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조차 처음 듣는 이름이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디엘론이 누구더라?
―처음 듣는 이름임.
―가명 아닐까요?
―누군지 모르겠네요.
―님들 루베니아 연대기 속에 캐릭터 다 외움? ㄷㄷ.
―새로 추가된 캐릭터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시청자들의 반응도 유진과 다를 바 없었다.
“디엘론이라, 자기소개까지 한 마당에 미안하지만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유진은 검을 고쳐 쥐었다. 칼날에 맺힌 오러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빨리 꺼져 줘야겠는데?”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짙은 적대감이 빛났다. 마나의 기세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매섭게 요동치는 마나의 격류에 디엘론은 당황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굉장하군요.”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였다. 가면의 시야 구멍 안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강철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실드!”
디엘론이 실드를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유진 또한 준비를 끝냈다.
[액티브 스킬, ‘일검필살’을 사용합니다.]
[사용자의 숙련도가 높습니다. 출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출력 조절 완료. 최대 전력의 50%입니다.]
알림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유진의 검에 마나가 응축되고 다음 순간 공간을 갈라 버릴 것만 같은 검격이 디엘론을 덮쳤다.
실드는 허무하게 잘려 나갔다. 디엘론은 황급히 비상용으로 숨겨 뒀던 일회성 아티팩트를 발동시켜 2차 실드를 펼쳤으나, 그것마저 ‘일검필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2차 실드 또한 종잇장처럼 잘려 나가고, 날카로운 오러를 품은 참격이 디엘론의 상체를 깊숙이 베었다.
“커, 커헉!”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색의 가면 아래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흉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디엘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맹약 기사단에서도 간부로의 승급이 예정되어 있는 뛰어난 인재였다.
마법으로 통증을 죽이고 출혈을 멎게 하는 것과 동시에 강철 스태프를 쥐고서 백병전 태세를 갖췄다.
“후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신은 너무 만만하게 본 모양이군요.”
디엘론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공수 전환 엄청 빠르네.
―초반에 등장할 법한 캐릭터가 아닌 것 같은데?
―방심하다가 한 번 당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A랭크 쯤 되는 듯?
채팅 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하지만 유진은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집중력을 예리하게 가다듬을 뿐이었다.
‘시간을 끌 생각인 것 같군.’
조사 자료를 빼돌리거나, 불태울 생각이겠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인 끝에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힘겹게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목제 기둥과 디엘론의 머리 위로 반쯤 무너진 천장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계획은 완벽하다. 이제 실행에 옮길 차례다. 유진은 디엘론을 향해 땅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천장을 향해 ‘빛의 투창’을 던졌다.
콰앙!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진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디엘론은 타이밍을 맞춰서 몸을 빼지 못했다. 그가 뒤로 물러나려 할 때마다 유진의 검격이 집요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 돼!”
짧은 절규와 함께 디엘론이 무너진 천장에 깔렸고, 유진은 금고가 있는 자경단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금고는 열려 있었고, 검은 가면을 쓴 누군가가 서류철을 불에 태우려 하고 있었다. 유진은 가면의 사내가 들고 있는 서류철이 조사 자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제, 제기랄!”
가면을 쓴 사내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서류철을 불 속에 집어 던지려는 순간 유진이 던진 단검이 그의 목에 꽂혔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흐르고 사내가 서류철을 놓치려는 찰나였다. 유진이 쏜살같이 다가가 서류철을 낚아채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나이스!
―무빙 무엇? ㅋㅋㅋㅋ.
―ㄹㅇㅋㅋ.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유진은 다시 한 번 아공간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을음이 있기는 했지만 서류철은 무사했다. 유진은 안도한 표정으로 자경단 본부를 빠져나왔다.
나오기 무섭게 철제 흉갑을 입은 루모니악이 이끄는 병사들과 마주했다. 루모니악 또한 조사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영지군 병사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유진 경! 무사하셨군요!”
병사들이 주위를 경계하는 동안, 루모니악이 황급히 다가왔다.
“조사 자료는 무사합니다. 제가 잘 챙겼어요.”
“유진 경!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루모니악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지벨 백작이 유심히 살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소실되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자료였다.
“일단은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그게 좋을 것 같군요.”
유진의 말에 루모니악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마을의 자경단 본부까지 공격당하는 상황에선 금패 용병인 유진이 자료를 임시 보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루모니악 경!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전령 깃발을 든 영지군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그의 말대로 로투스 마을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집단이 뿔뿔이 흩어져 숲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본래 그들은 디엘론의 지휘 하에 소덴 등의 시체를 확보하고 조사 자료를 불태우기 위해 로투스 마을을 공격한 것이었다.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지휘관인 디엘론이 큰 부상을 입고 도주하자 자연히 그를 따라 마을에서 물러나는 것이었다.
“다행이군.”
루모니악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냈다.
* * *
무너진 천장에 깔렸지만 디엘론은 더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블링크 마법을 사용하여 로투스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간신히 전장에서 이탈하여 목숨을 보전한 그는 부하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황갈색의 신호탄이 로투스 마을 상공으로 쏘아 올려졌고, 로투스 마을을 공격했던 맹약 기사단의 하수인들은 신속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 신호다!”
“서둘러!”
하수인들이 마을에서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 숫자가 대략 20여 명이었다. 로투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높은 나무 위에서, 하수인들이 모두 숲속으로 이탈하는 것을 확인한 디엘론은 몸을 돌려 지상으로 착지했다.
“쿨럭!”
착지와 함께 충격이 거의 전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나를 운용한 탓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디엘론 경!”
멀리서 그 모습을 발견한 하수인 둘이 달려왔다. 디엘론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하수인 둘은 디엘론의 바로 옆에 다가와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서둘러 은신처로 이탈해야 할 것 같군요. 방해꾼의 무력이 예상을 상회한다는 걸 기사단에 알려야 합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디엘론 경!”
“부탁하지요. 모든 것은 맹약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입니다.”
디엘론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