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59)
왜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일까. 유진은 편안한 숙면을 이룰 수 없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그는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새벽 2시쯤 되었을까? 1층에는 늦은 새벽 시간을 술로 채우는 손님 하나 없다. 대신 허리에 검을 찬 드레인이 벽에 기댄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주군, 일어나셨습니까?”
1층의 출입문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드레인이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지런하네.”
“뱀파이어에게 수면은 사치입니다.”
부지런하다는 유진의 말에 드레인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데 주군은 어찌 이 시간에 깨어 계십니까?”
“그냥 잠이 안 와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지만 유진은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드레인은 바이올라와는 다르게 뭔가를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경계를 계속할 뿐이었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네.”
짤막하게 대답하는 드레인을 뒤로한 채 유진은 출입문을 열고 여관 건물을 빠져나갔다. 어두운 새벽의 밤거리로 나온 유진은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나 수련이나 할까.”
시간이 남고 마땅히 할 게 없을 때는 마나 수련이 정답이다. 유진은 숙소로 돌아가 마나 수련에 열중했다.
마나 수련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아 왔다. 잠을 거의 안 잤지만 피곤하지는 않았다.
1층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으니 바이올라가 뒤늦게 내려와 스튜와 빵을 주문했다. 페이든은 내려오지 않았다.
“페이든은?”
“바쁜 것 같던데?”
“그래?”
“응, 나도 마나 오염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채집한 표본을 분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욱여넣은 빵을 힘겹게 삼킨 바이올라가 설명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유진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린대?”
“나도 잘 모르겠어. 방에 틀어박혀서 분석만 하고 있으니까 물어볼 틈이 없어.”
“흠, 확실히 그렇겠군.”
유진은 납득했다. 바쁜 페이든의 상황도 이해하지만 중간에 작업 진행 상황을 말해 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왕립 마탑에서 연구만 계속해 온 탓에 사람 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페이든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
바이올라가 피곤한 얼굴로 질문했다. 유진은 짧게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은 자유 시간.”
“밀린 이론 공부 좀 하고 싶었는데, 다행이네.”
“너도 공부라는 걸 하는구나.”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지만 바이올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 이론 성적도 좋았거든!”
“농담이었어.”
바이올라가 항변하자 유진은 농담이었다고 적극 어필하며 뒤로 물러났다. 바이올라는 허공에 대고 주먹을 마구 휘두르다가 이내 지친 얼굴로 자리에 다시 주저앉아서 빵을 집어 들었다.
“그런 농담은 별로야, 유진.”
툴툴거리며 빵을 스튜에 찍어 먹는 바이올라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의자를 빼서 앉으려는 찰나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진의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향했고, 드레인 또한 바깥의 소란을 감지한 것인지 허리에 찬 칼자루에 슬며시 손을 얹었다.
“주군.”
“내가 알아보고 올게. 둘은 여기서 대기해.”
“네, 알겠습니다.”
드레인이 대답했고, 유진은 출입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을 통해 여관 밖으로 나오자 넓은 광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광장의 가장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짙은 피 냄새가 묻어 나왔다.
“뭐지?”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이렇게 짙은 피 냄새가 날 리가 있나? 유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병사들의 어깨너머로 자경단장 데이윈과 자경단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병사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하론 숲에 배치되어 있었던 병사였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데이윈 경? 대체 무슨 일입니까?”
“유진 경!”
데이윈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른 자경단원들에게 피투성이가 된 병사를 인계하고는 유진에게 다가왔다.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데이윈이 아주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유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데이윈은 자경단 본부로 유진을 인도했다.
아무도 없는 자경단 본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유진이 더 이상의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데이윈 경,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왜 하론 숲을 지키고 있어야 할 수습 기사가 피투성이로 그곳에 있던 거죠?”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하론 숲에 배치되었던 순찰대 병력도 몰살당했다더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지군 증원을 요청했으니, 조만간에 답신이 올 겁니다.”
데이윈이 말했다. 피해가 크긴 했지만 단순 몬스터들의 소행이라고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것 같았지만 유진의 생각은 달랐다.
“조직적인 공격일 가능성이 큽니다. 경종을 울리고 자경단과 영지군 병사들에게 전투를 준비하라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진 경, 확실한 건가요? 정확하지 않은 정보 때문에 경종을 울리고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부정적인 데이윈의 태도에 답답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상황 판단 능력이 형편없군. 만년 수습 기사 캐릭터인 이유를 알 것 같아.’
유진은 마음속으로 거친 욕설을 마구 내뱉는 것으로 평정을 되찾고서 침착하게 데이윈을 설득했다.
“마을이 전멸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뒷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까 자경단을 동원하세요.”
뒷일을 책임지겠다는 말이 부담감을 덜어 준 덕택일까? 데이윈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경단을 동원하겠습니다.”
“서두르세요.”
“알겠습니다.”
자경단장 데이윈이 본부를 뛰쳐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투스 마을의 경종이 울렸다.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자경단원들이 무장을 갖췄다.
마을에 주둔 중이던 영지군 병사들 또한 목책으로 집결했다. 무장한 이들의 집결이 끝나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체 무슨 일로 경종이 울린 거지?”
“몬스터들이 마을로 오고 있다는 것 같아.”
“난리도 아니군.”
자경단원들의 소란이 극에 달하고 하늘이 슬슬 어두워지는 시점이었다. 멀리서 검은 안개가 마을을 향해 스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옵니다!”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자경단원의 외침에 무장한 이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창을 꽉 쥐었다.
“저, 정말 공격이.”
데이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뒷일을 책임지겠다는 유진의 말을 믿고 자경단을 소집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유진은 데이윈에게서 시선을 떼고, 바이올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들의 숫자는?”
“탐색 마법 전개해 봤는데, 50마리 정도 되는 것 같아. 그런데 조금 이상해.”
“어떤 점이?”
유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바이올라는 눈살을 찌푸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곧 확실하지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나가 엄청 탁해. 키메라같이 인위적인 마법 개조가 행해진 몬스터들일 가능성이 커.”
키메라는 마도사의 생체 실험으로 탄생하며 사실상 흑마법과 가까운 방식의 마법진이 각인되어 통제당하기에 가진 마나 성질이 탁해질 수밖에 없다.
“키메라군.”
“아닐 수도 있어.”
바이올라는 웬일로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유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널 믿어.”
“으응.”
바이올라의 대답을 들은 후, 유진은 목책 위로 올라갔다. 이곳, 로투스 마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키메라 몬스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들이 옵니다!”
망루에서 자경단원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 외침이 거슬렸던 것일까? 키메라 오우거가 길쭉한 창을 던져서 망루를 꿰뚫었다.
“크아아악!”
“고, 공격이다!”
“화살 장전!”
자경단원들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마도사의 개조를 받은 키메라 몬스터들은 화살 세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돌격해 왔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직감했다.
‘저것들이 목책을 넘으면 대학살이 벌어진다.’
유진은 목책을 뛰어넘었다.
“유진 경!”
“기사님!”
자경단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면을 올곧게 응시하는 채로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후우.”
싸늘한 시선이 다가오는 키메라 몬스터들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진은 어느새 가까워진 키메라들을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크워어어어!”
키메라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키메라 오크가 유진의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괴이할 정도로 근육이 발달된 모습의 고블린들이 후위를 점했다. 좌우에도 키메라 오크가 자리 잡았다.
“포위해서 공격할 생각이군.”
꽤 지능적인 연계 전술이다. 유진은 이 키메라 몬스터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유진의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키메라 몬스터들이 무력하게 쓰러졌다. 모두 일격에 목이 베이거나 심장이 관통당했으니, 참으로 신묘한 검술이다.
“그워어어어!”
유진의 검격이 키메라 몬스터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30여 마리의 키메라 몬스터들이 쓰러졌지만 남은 20마리가 유진을 지나쳤다.
“제기랄!”
“걱정 마! 유진! 내가 있어!”
바이올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키메라 몬스터들의 머리 위로 화염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화염에 휩싸인 키메라 몬스터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트롤의 재생력을 각인했다고는 하지만 고통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키메라 몬스터들이 화염 소나기를 피하려 했지만 무려 유도 기능이 있었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화염구들이 현란하게 회전하며 키메라 몬스터들을 추격했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의 연쇄에 키메라 몬스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남은 키메라 몬스터들이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화염 마법의 희생양이 되었다.
“모, 모두 죽은 것 같습니다!”
“유진 경 만세! 바이올라 경 만세!”
“만세!”
유진과 바이올라의 활약으로 키메라 몬스터들이 전멸하는 동안 마을의 피해는 없었고, 자경단원들은 안도한 표정으로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소덴과 소수의 인원들이 페이든을 죽이기 위해 여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