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하는 스트리머-50화 (50/175)

독식하는 스트리머 (50)

15장. 기분 나쁜 징조

“몸은 좀 어때?”

어두운 방 안. 유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질문하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뱀파이어, 드레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군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드레인이 말했다. 그는 오랜 노예 생활로 인해 지쳐 있었고 회복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래서 유진은 몇 가지 영약을 구입해서 그에게 섭취시키는 것으로 회복을 적극적으로 보조했다.

비싼 영약을 먹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해져 있던 드레인을 회복시키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정도면 전성기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A랭크 정도의 전력이 되는 데에는 충분할 겁니다.”

A랭크의 전력이면 금패 용병과 동격이다. 아직 금패 용병으로 승격하지 못했지만 A랭크의 전투력을 가진 유진과 비슷한 전력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듬직한 근거리 공격수를 얻었다. 이제 유진의 파티는 더욱 전투력이 높아졌다.

“이제 슬슬 신분패를 만들러 가 볼까?”

유진이 말했다. 드레인은 오랜 노예 생활을 했기 때문에 신분패가 없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적혈교 또한 오래전에 몰락했다.

“위조 신분패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드레인은 당연히 위조 신분패를 생각했지만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식 신분패를 만들러 갈 거야.”

“신분패를 발급 받으려면 절차가 상당히 까다롭고 쉽게 승인되지 않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제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루벤 왕국의 법도가 바뀌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내가 잘 아는 귀족한테 부탁하면 돼.”

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했지만 드레인은 귀족의 보증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지벨 백작한테 가려나요?

―벨폰 자작도 보증해 줄 것 같기는 한데, 왔던 길 되돌아가지는 않을 듯.

―ㄹㅇㅋㅋ.

채팅 창에서 시청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바이올라 깨우고 영주성으로 가자.”

“네, 주군.”

둘은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유진이 1층에서 기다리는 동안 드레인이 잠을 자고 있던 바이올라를 깨워서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우웅, 낮잠 자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야?”

바이올라가 하품을 하며 피곤한 상태를 가볍게 어필했지만 아쉽게도 유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영주성으로 갈 거야, 혼자 있고 싶으면 다시 들어가고.”

망설임은 없었다. 유진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말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이올라도 유진이 여관 밖으로 나서자 황급히 뒤따랐다.

“안 간다고는 안 했어!”

“그럼 빨리 와.”

이미 유진은 드레인과 함께 앞서가고 있었고, 바이올라는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따라붙었다. 그들은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내성에 진입할 때 경비병들이 앞을 막아서기는 했지만 지벨 백작의 보증이 붙어 있는 통행증을 제시하자 바로 해결되었다.

“지벨 백작이 보증한 통행증이군요.”

드레인의 물음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 직접 보증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대단하군요.”

“별거 아니야.”

“저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남작도 아니고, 백작급 귀족의 보증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진심으로 감탄하는 드레인이었다. 실제로 루베니아 연대기에서 귀족의 보증을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은 큰 감흥이 없었다.

이윽고, 영주성에 도달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예전에 본 적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유진 경.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안티즈 경.”

익숙한 얼굴은 지벨 백작가의 수습 기사 안티즈였다.

“영주님을 만나러 오신 겁니까?”

“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기별을 보내겠습니다. 옆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안티즈의 말에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레인 그리고 바이올라와 함께 성문 옆의 그늘진 곳에서 가서 안티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안티즈가 돌아왔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유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영주님께서 들어와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유진은 지벨 백작가와의 관계도가 ‘은인’ 수준이었으니까.

―약속도 없이 찾아왔는데, 바로 문을 열어 주네요?

―이게 관계도 ‘은인’ 단계의 힘이죠.

―역시 지벨 백작이야. 평판 레벨 효과가 확실하구먼.

―님들, 지벨 백작이랑 은인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함?

―방장님 방송 처음부터 다시 보고 오셈.

―ㄹㅇㅋㅋ.

채팅 창이 소란스러웠지만 유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안티즈가 신호를 보내자 영주성의 성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지요.”

안티즈가 유진 일행을 영주성 안으로 안내했다.

“접견실로 모시겠습니다.”

안티즈가 말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 이윽고 접견실에 들어서자 지벨 백작이 그들을 환영했다.

“어서 오게! 유진 경! 오랜만이군! 정말 반가워!”

허례허식이 아니라 진심이 묻어 나오는 환영이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열렬한 환영에 유진의 입가에도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 반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문의 은인을 환대하지 않으면 누구를 환대하겠나?”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점심은 먹었는가? 바쁘지 않다면 식사부터 하는 건 어떻겠나?”

지벨 백작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함께 식사를 제안했다. 선한 호의를 보이는데, 다짜고짜 신분패부터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 예의에도 어긋나고 당장 바쁜 일도 없기 때문에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장에게 서둘러 요리를 준비하라고 말하겠네, 우선은 식당으로 가지.”

식사하는 동안 지벨 백작은 유진에게 근황을 물었다. 유진은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 근황에 대해 말했다. 지벨 백작가와의 관계도가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1시간 만에 식사가 끝나고, 지벨 백작과 유진 일행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모두가 착석하자 지벨 백작이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을 열었다.

“우리 바쁜 유진 경이 내 얼굴이나 보려고 찾아왔을 리는 없을 것 같군.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나.”

판은 깔렸다. 유진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백작님의 보증이 들어간 신분패가 필요합니다.”

“바이올라 경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저 뱀파이어 친구 때문인 것 같군. 내 짐작이 정확한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나는 보증을 남발하는 귀족은 아니네만, 자네는 부탁이라면 다르지. 지금 바로 신분패를 만들어 주겠네. 1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 같군.”

“감사합니다.”

유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하자 지벨 백작은 씨익 웃었다.

“너무 감사할 필요 없네. 자네는 가문의 은인이니까 말이지. 이 정도 부탁은 어렵지 않게 들어줄 수 있다네.”

―역시 지벨 백작이야. 성능 확실하구먼.

―쿨한 성격의 소유자.

―지벨 백작은 다른 귀족들이랑 달리 깐깐하지 않아서 좋음.

시청자들의 채팅을 확인하는 동안, 지벨 백작은 하인을 불러서 신분패 제작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하인이 물러가고 이어서 다른 하인을 불러 다과를 내 오라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와 간단한 쿠키 등이 탁자 위에 올려졌다.

유진 일행은 지벨 백작과 함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신분패를 만드는 1시간 동안 다른 곳에서 용무를 보기에는 여유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필요 없이 지벨 백작과 잡담이나 나눌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방해를 받고 말았다.

“영주님!”

노크도 없이 응접실 문이 벌컥 열리고 안으로 뛰어 들어온 이는 영지 기사단장 로웨스였다.

“무슨 일인가? 로웨스 기사단장.”

“로투스 마을 인근 숲에서 마나 오염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마나 오염 현상이라고?”

“네, 아무래도 영주님께서 직접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웨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진의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메인 이벤트, ‘오염된 정령들의 행진’의 시작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물론 이 시스템 메시지는 시청자들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오! 오염된 정령 기사 이벤트다!

―저거 시작 조건이 뭐였죠?

―지벨 백작가와 관계도 우호 이상, 그리고 ‘전쟁 군주의 침공’ 이벤트 클리어 이력이 있어야 할 거예요. 그 외에도 자잘한 조건들이 몇 개 있음.

시청자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한 유진은 지벨 백작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지벨 백작님.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 다녀오시지요.”

“미안하네, 신분패는 확실하게 전하라고 일러 두겠네.”

지벨 백작은 기사단장 로웨스와 함께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마나 오염은 대규모 몬스터 무리의 출현을 예고하는 징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때문에 지벨 백작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근 100년간 마나 오염 현상은 없었는데.”

바이올라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루베니아 연대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있는 유진은 지벨 백작령에서 발생하는 마나 오염 현상과 ‘오염된 정령들의 행진’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불길한 징조인 것 같아.”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바이올라 경.”

의견의 일치를 이루는 바이올라와 드레인이었다. 유진은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대재앙의 시대가 다시 오는 건 아닐까?”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바이올라 경.”

“하지만 드레인, 나는 마도사야. 이런 호기심은 당연한 거야.”

의견의 일치와 함께 시작된 대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드레인이 피곤한 표정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더 기다렸을까? 지벨 백작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드레인의 신분패를 전해 주었다.

유진은 그것을 드레인에게 전해 주기 전에 지벨 백작의 보증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문제는 없는 것 같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유진은 신분패를 드레인에게 건네주었다. 새로 발급된 신분패를 보는 드레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했다.

―표정 한 번 변화무쌍하네.

―감회가 남다르겠죠.

―노예 생활하다가 시민권 받은 거나 다름없지요.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대화였다. 유진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일단 돌아갈까?”

“좋아!”

유진의 제안에 바이올라는 힘차게 대답했고, 드레인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신분패를 품속에 집어 넣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바이올라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인지 마나 오염 현상에 대해 계속 말했지만 유진은 큰 감흥이 없었다.

루베니아 연대기의 다회차 플레이어인 유진에게 있어서 마나 오염 현상은 예정된 이벤트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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