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35)
“선봉대가 전멸하고 전위 또한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건 알고 있지?”
로웨스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유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로웨스는 말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진형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본대에서 병력을 충원하여 선봉대를 재편성할 생각이야.”
“선봉대 재편성을 저한테 알려 주시는 이유는 설마?”
“그 설마가 맞다, 유진 경. 자네에게 이번 토벌군의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다.”
선봉대장을 맡기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뢰받고 있다는 건 좋은 징조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유진은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선봉대장 자리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현재 지휘나 통솔 계통의 스킬을 익히지 않은 유진은 선봉대장의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일렀다.
최소 100명 이상의 인원을 휘하에 두는 선봉대장은 10여 명 정도를 지휘하는 십인장 위치와는 달랐다.
“로웨스 경, 제게 선봉대장을 제안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 자리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네가 선봉대장을 맡아 준다면 많은 이들의 사기가 진작될 걸세.”
단호한 유진을 보며 유스타인이 설득을 시도했지만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선봉으로 나설 수는 있습니다만, 선봉대장은 다른 사람이 맡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흠, 결심이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렇다면 선봉대장은 내가 맡겠네.”
결국 지벨 영지 기사단장 로웨스가 선봉대장을 맡기로 하였고, 유진은 선봉에 배치되었다. 진형을 바꾸기 위해 병사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은 지벨 영지 기사단과 함께 선봉으로 향했다. 진영의 가장 앞으로 이동하는 길에 길쭉한 스태프를 든 바이올라가 따라 붙었다.
“유진! 같이 가!”
“전위 마법 부대 위치는 이 방향이 아니야.”
“알고 있어. 이번에 나도 선봉으로 차출되었어.”
“하아, 일단은 알겠어.”
바이올라의 말에 유진은 짧게 한숨을 내뱉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이올라가 루메이 후작가의 막내딸이라고 하지만 제자를 강하게 키우는 유스타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선봉 배치가 이해되지 않을 상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유스타인이 먼저 그녀를 선봉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테고, 바이올라가 고집을 부렸을 게 뻔한 상황이다.
“오크 제사장을 죽인 기술, 그거 무슨 마법이야?”
바이올라는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녀는 선봉에서 말을 타고 분주히 앞으로 나아가며 유진에게 질문 세례를 쏟아 냈다. 덕분에 유진은 북쪽 숲의 심장부로 향하는 여정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곧 심장부에 진입합니다!”
선두에서 말을 몰아 달려온 전령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선봉 진영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는 전쟁 군주의 영역이다.
중심부에도 전쟁 군주의 영향력이 닿기는 하지만 심장부와 비교하면 약소한 수준이다. 즉, 지금부터 조우하는 오크 군대의 규모도 중심부에서 겪은 규모와 차원이 다를 것이다.
“심장부에 진입했다! 다들 방심하지 마라!”
앞에서 로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긴장되는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이제는 꽤 익숙한 얼굴인 다이크와 델바인이 있었다. 방금 그것은 델바인의 혼잣말이었다.
중심부를 지나 심장부까지 들어왔다. 긴장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델바인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유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진, 너는 어때?”
“저도 긴장됩니다.”
델바인의 물음에 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선봉대로 소속된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차가운 긴장 속에서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전쟁 군주가 이끄는 오크 동맹의 공격은 없었으나, 그들 본거지 또한 찾지 못했다.
결국 심장부에 진입한 첫날은 아무런 성과 없이 야영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선봉대장 로웨스는 심장부에서도 방어에 용이한 지점을 찾은 뒤, 진지 건설을 건의했고 본대 지벨 백작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전쟁 군주의 본진을 찾는 작업이 오래 걸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우선 거점에 진지를 건설한 다음에 정찰조를 운용해서 오크 동맹의 본진을 찾아야 합니다.”
지휘부 회의에서 벨폰 자작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벨폰 도시의 영웅 자격으로 참석하게 된 유진은 귀족들과 기사들이 논의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논의 끝에 오크 동맹의 본진이 있을 법한 후보지가 3곳 선정되었고, 지벨 백작이 손수 군사 지도 위로 붉은 깃발을 3개 꽂았다. 그것을 확인한 유진은 티 나지 않게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휘부에서 선정한 세 장소가 모두 전쟁 군주의 본진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먼 곳이기 때문이었다.
루베니아 연대기를 플레이하다 보면 여러 기연과 스토리 진행은 플레이어의 행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전쟁 군주의 본진 위치 같은 건 여러 번 플레이해도 늘 같은 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라면 개고생이다.’
나서고 싶지는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괜한 곳을 정찰하다가 병력의 피로도가 누적되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발언해도 괜찮겠습니까?”
“우리의 영웅이 여기에 있었군! 경청할 테니, 발언해 보게나.”
“군 병력 전부를 움직이는 것보다는 다수의 정찰조를 편성하여 인근을 확실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됩니다.”
정론이었다. 유진의 말에 지벨 백작과 벨폰 자작 그리고 중앙군의 지휘관들은 다들 납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의 정찰조를 편성하여 주변을 확인해야 한다는 유진 경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왕립 마탑의 최상급 마도사 유스타인도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다. 다들 유진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끝날 때 즈음에 유진은 정찰조 하나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정찰대장을 맡기려 했다면 거절했겠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움직이는 정찰조 조장 역할이었기 때문에 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인원은 자네가 직접 차출해도 된다네.”
로웨스의 배려였다. 유진은 다이크와 델바인 그리고 바이올라를 정찰조원으로 뽑았다.
“인원이 부족하지는 않겠어?”
“정찰에는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유진은 로웨스의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유진의 정찰조는 인원은 극소수였지만 정예 멤버들이었다. 유진을 포함하여 자유 기사가 2명에 은패 용병 한 명과 중급 마도사가 섞여 있는 정예 정찰조다.
“하긴, 자네가 알아서 잘할 것이라 생각하네.”
로웨스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은 빠른 정찰을 위해 곧바로 조원들을 소집했다. 전령을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이크와 델바인 그리고 바이올라가 다가와 합류했다.
“정찰이라고?”
전투가 아니라, 정찰 임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델바인이 슬쩍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호전적인 성격이었는데, 동료를 오크들에게 잃고 난 이후로 더 심해졌다.
“정찰 임무라고는 하지만 오크들과 교전할 가능성이 크니까, 다들 긴장하세요.”
“걱정하지 말라고, 유진. 오크들이라면 내가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니까.”
교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유진의 말에 그제야 델바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더 많은 오크를 토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그렸다.
“다른 정찰조들은 출발했습니까?”
유진은 오크 토벌에 미쳐 있는 델바인을 대신하여 다이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이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네, 아마 우리가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정찰조일 것이야.”
“좋습니다. 그럼 정찰을 시작하죠.”
유진은 앞장서서 말을 타고 나아갔다. 그는 정찰대장은 아니었지만 도시의 영웅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하여 정찰대의 편성과 각 정찰조의 활동 반경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유진은 정찰조가 오크 동맹의 본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정찰대의 동선을 수정했다.
오크들이 주로 활동하는 영역에 들어서자 방패를 사용하는 다이크와 델바인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고, 유진은 바이올라의 옆으로 이동했다. 2선의 위치에서 바이올라의 근접 호위를 하다가 유사시에 앞으로 달려 나가 1선을 지원하는 포지션이었다.
“지정된 위치까지 3시간 정도 남았어.”
바이올라가 지도 마법을 사용하여 위치를 파악했다. 지정된 좌표에는 오크 동맹 본진이 있다. 유진은 바이올라의 말에 대답 대신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긴장 속에서 앞으로 전진하였고, 광범위한 탐색 마법을 사용 중이던 바이올라가 뭔가를 감지하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본진을 찾은 것 같아요.”
다들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이올라가 탐색 마법으로 본진의 존재를 감지했다고는 하지만 교란 주술일 수도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본진이 코앞에 있다면 순찰 도는 오크들도 훨씬 많을 것이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하겠습니다.”
유진이 말했다. 적 본진이 코앞이라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이동할 필요가 있다. 유진이 먼저 말에서 내렸고, 바이올라와 다이크 그리고 델바인이 차례대로 말에서 내렸다.
철컥.
소형 석궁을 장전하는 소리다. 유진은 델바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은 그걸 쓸 일 없을 겁니다.”
“혹시 모르지.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무리하게 교전을 유도하는 건 참아 주세요.”
“오크 두개골을 박살 내고 싶지만 나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야.”
델바인의 설명에 유진은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유진과 다이크가 선두에 섰고, 델바인과 바이올라가 뒤에 섰다.
그들은 30분 정도를 앞으로 나아간 끝에 오크 동맹의 본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 이탈하죠.”
“유진! 추격자가 붙었어! 여기로 오고 있어!”
바이올라가 말했다. 그녀의 탐색 마법에 오크들의 기척이 감지된 모양이었다. 델바인은 그 누구보다 먼저 검을 뽑아 들었고, 다이크는 경직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숫자는?”
“대략 50기 이상이야.”
50마리 정도의 오크들이면 그들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곳이 오크 본진 근처라는 게 문제였다. 교전이 발생하면 본진에서 추가 지원군이 신속하게 합류할 가능성이 컸다.
“델바인 씨, 여기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여기는 적 본진과 너무 가깝습니다. 최대한 교전을 회피해야 합니다.”
“나도 알고 있어. 날뛰지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델바인이 바보는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유진은 조원들과 함께 말을 묶어 놓은 곳까지 갔지만 곧 절망하고 말았다.
말들이 모두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