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29)
[돌발 퀘스트: 성벽 위의 십인장.
솔론은 기본적인 전술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당신에게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성벽 위에 용병 십인장으로 배치할 생각입니다. 솔론의 요청에 응한다면 분명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보상: 용병 길드에 대한 평판 상승. 지벨 자작가에 대한 평판 상승. 지벨 도시의 영웅 칭호 획득.]
굳이 자세히 읽을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칭호를 얻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유진은 망설임 없이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십인장을 맡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훌륭한 지휘관을 한 명 확보한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군요.”
“아닙니다. 벨폰 도시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역시 유진 씨는 다른 용병들과는 다르군요.”
칭호가 보상으로 안 붙어 있었다면 위험한 십인장 같은 퀘스트를 수락했을 리 없었겠지만 이왕 하기로 한 거 적당히 포장해서 말해 줬더니 솔론은 감격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토벌대에 합류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 준비는 끝났지만 분위기를 보니, 꽤 오래 붙잡혀 있을 가능성이 커 보였기 때문에 유진은 토벌대 합류 준비를 해야 한다면서 바쁘다는 걸 어필했다.
“내가 유진 씨를 너무 오래 붙잡았군요.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일이면 토벌대가 완전히 편성될 것 같습니다. 그때 다시 보도록 하죠.”
“네, 그게 좋을 것 같네요.”
유진은 용병 길드를 나왔다. 토벌대 편성은 내일이라고 했으니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생각을 할 찰나였다.
뿌우우우우!
거센 뿔 나팔 소리가 도시를 뒤흔들었다. 도시의 보초 탑에서 경비병이 미친 듯이 경종을 쳐 댔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는 도시의 혼돈을 초래하였다.
벨폰 영지군 소속의 병사들이 무리 지어서 어딘가로 바쁘게 뛰어가는 모습들이 보였다. 설마 전쟁 군주가 벌써 남하를 시작한 건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유진은 황급히 성벽으로 올라갔다. 그의 앞을 막는 이는 없었고 덕분에 방해 없이 성벽 위를 올라갈 수 있었다.
성벽로에 도착한 유진은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북쪽 숲에서 빠져나오는 수천 오크 군세의 모습이 시야에 훤히 들어왔다.
―전쟁 군주 떴다!!!!!
―메인 스토리 시작한다! 가즈아아아아!
―ㄹㅇㅋㅋ 이 순간을 기다렸다.
―포인트 충전하러 간다, 아 ㅋㅋㅋㅋ.
북쪽 숲을 빠져나와 전쟁 군주의 깃발 아래에서 대열을 갖추는 오크 군세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환호했지만 유진의 마음속은 복잡한 심경이었다.
루베니아 연대기라는 게임 속에 빙의하였고 외부와 채팅 창이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게임 속의 NPC들과는 조금 달랐다.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때문에 오크 전쟁 군주의 군대를 보는 유진은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 전투에서 떼로 죽어 갈 이들의 모습을 미리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벨폰 도시는 아직 전쟁 군주의 군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유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기랄.”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어깨를 짓누르자 유진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 * *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벨폰 자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주 집무실에 모인 이들은 용병 길드 지부장, 솔론과 벨폰 영지 기사단의 단장인 베오드 랜스 그리고 도시의 수비대장이었다.
“지벨 백작님께 마법 통신으로 지원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충분한 군사를 소집해서 보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합니다. 아마 도착까지 일주일 정도는 소모되겠지요.”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
“도시 안에 식량은 충분합니다. 일주일이 아니라, 세 달은 넘게 버틸 수 있습니다.”
수비대장이 말했다. 부유한 상업 도시답게 보관 중인 식량은 충분했지만 상비군의 숫자가 적다는 게 문제였다. 상황이 악화된다면 징병을 한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상비군과 달리 훈련이 부족한 민병들은 별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컸다.
“전쟁 군주의 남하 소식을 접하고 다른 도시로 이동한 용병들이 많아서 사실상 토벌대의 숫자도 많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솔론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자 기사단장 베오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수비대장은 영주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토벌대 규모는 은패가 40여 명, 그리고 동패가 200여 명에 철패가 50여 명입니다. 대략 300명 정도군요. 수성전을 한다고 해도 성벽을 지키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숫자입니다.”
솔론이 말했다. 다른 이들은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진 끝에 수비대장이 입을 열었다.
“수비대의 병력은 경비대까지 더해서 센다고 해도 2천 명 정도에 불과합니다.”
“영지 기사단 병력은 50여 명입니다.”
절망적이었다. 도시의 수비대와 경비대, 그리고 기사단과 토벌대의 용병들까지 모두 더해도 3천 명도 안 되는 수였다. 그에 비해 전쟁 군주와 함께 북쪽 숲에서 남하 중인 오크들의 숫자는 육안으로 구분했을 때 못해도 8천 이상이며 최악의 경우 1만 정도로 계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벽을 지킬 병사들이 부족합니다. 민병대를 징집해야 합니다.”
시민들을 무장시켜야 한다는 게 수비대장의 주장이었다. 벨폰 자작은 시민들을 징집하여 무장시키는 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수비대장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병사가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벨폰 자작은 자신의 입장과 조금 타협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강제 징집은 안 됩니다. 자원자에 한해서 민병대를 조직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벨폰 자작의 지시에 수비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기하고 있던 전령을 불러서 민병대를 소집하라는 지시를 전했다.
“절대로 놈들이 성벽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강력한 공격이 예상되는 북문과 북쪽 성벽에 정예 병력을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반대는 없었다. 벨폰 자작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지시를 내리려는 찰나였다.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오크 군세가 도시를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 중에 있습니다!”
“수고 많았다, 나가 보도록.”
베오드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전쟁 군주의 접근을 알린 전령이 황급히 집무실을 떠났다.
“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이 없군요.”
전령의 반응을 보아하니, 오크 군세가 꽤 가까이 접근한 것 같았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고 벨폰 자작은 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것인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 *
“토벌대의 용병들은 북쪽 성벽 아래에 모여 주십시오!”
전령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유진은 토벌대의 집결지인 북쪽 성벽 아래로 향했다.
도시 수비대의 병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북쪽 성벽에 자리 잡았다.
“유진 님! 유진 님 계십니까?”
누군가 애타게 유진을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유진은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러자 유진을 찾고 있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용병 길드의 직원인 루한이었다.
“유진 님!”
“무슨 일이시죠?”
“급히 전해드릴 게 있어서요. 여기 이것 좀 받아 주시겠어요?”
“이건…….”
용병 길드의 문장이 그려진 휘장과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양피지 한 장이었다. 유진은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제야 루한은 설명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십인장을 상징하는 휘장과 유진 님의 십인대에 배속된 용병들의 이름과 등급이에요.”
“알겠습니다.”
유진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루한은 행운을 빈다고 말하고는 다른 용병에게도 휘장을 전달하기 위해 유진에게서 멀어졌다.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맡게 된 십인대의 전력 정도는 알 필요가 있기 때문에 유진은 배속된 용병들의 등급을 먼저 살폈다.
“은패는 날 포함해서 3명이군.”
나머지 7명은 동패였다. 제 2십인대는 이미 집결해 있었다. 유진은 그들의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델바인이다, 유진. 네 활약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어. 네가 우리 십인대를 맡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델바인은 유진의 나이가 어리지만 은패 용병이라는 이유로 그를 존중해 주고 있었다. 다른 은패 용병도 마찬가지였지만 문제는 동패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어린 유진이 은패 용병이라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기강을 잡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직접 활약을 하는 것으로 의구심을 지울 수도 있기 때문에 유진은 반항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크 놈들이 다가온다!”
“제 1십인대와 제 2십인대는 성벽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수비대 장교의 외침에 유진은 제 2십인대의 용병들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자네가 제 2십인대를 맡게 되었군! 이번에도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라네!”
제 1십인대의 십인대장은 자유 기사 다이크였다.
“제 1십인대와 제 2십인대는 북쪽 제 1망루 주변을 사수해 주십시오!”
수비대 장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유진은 성벽에 올라오기 직전에 지급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수성전에서는 방패를 쓰는 게 유리하였고, 그래서 그는 이미 방패술 관련 스킬을 예전에 찍어 둔 상태였다.
―온다 온다 온다!
―엥? 일반 루트에 비해서 훨씬 많은 것 같은데?
―원래 5천 정도 아님? 저건 1만이 넘는 것 같은데 ㄷㄷㄷ.
―히든 루트가 겹쳐서 난이도 올라갔을지도 모름.
유저의 플레이에 따라 난이도가 조정되는 것은 루베니아 연대기의 시스템 중 하나다. 시청자들의 말대로 난이도가 조정된 모양이다. 오크 군세의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조잡하지만 공성 병기까지 제작해서 몰려오고 있었다.
“공성 병기를 주의하라!”
중갑을 입은 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유진은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옮겼다. 투석기와 공성추 그리고 사다리가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투석기가 거대한 바위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콰앙!
“동요하지 마라!”
부상당한 이들은 없었지만 성벽이 크게 흔들렸다. 오크 군세들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궁병대! 화살 쏴!”
궁병대의 지휘관이 힘차게 외쳤다. 성벽 위에서 오크들을 조준하고 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들이 오크들의 몸에 꽂혔다. 100여 마리에 가까운 오크들이 힘 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기뻐하기에는 이르다. 적들은 아직도 평원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