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27)
8장. 토벌대
이른 아침, 잠에서 깬 유진은 대충 세수를 하고는 질긴 가죽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철제 흉갑을 입었다.
아공간 주머니에는 충분한 양의 비상식량과 응급 약품 그리고 보조 장비 등을 집어 넣었고, 허리 혁대의 남은 공간에는 투척용 단검을 몇 자루 끼워 넣었다. 투척용 단검 같은 경우에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보다는 허리에서 바로 빼 드는 게 신속한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유진은 이런 방식을 선호했다.
완전 무장을 끝낸 유진은 여관의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따로 메뉴를 주문하지 않고 이용객들한테 제공되는 기본 식사로 아침을 해결한 후에 용병 길드로 향했다.
용병 길드는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웠다. 통제되지 않은 혼란이 로비에 가득했다. 목패나 철패 용병들은 각자 의뢰를 받아 나가고는 했지만 동패 이상의 용병들은 두어 명씩 무리 지어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패 이상의 용병이라면 지부와 도시가 돌아가는 형세를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진은 저들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경직된 표정으로 속닥이고 있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정찰대와 연락이 끊겼겠지.’
‘루베니아 연대기’를 이루는 무수히 많은 메인 스토리 중 하나인 전쟁 군주 이벤트. 그것은 벨폰 도시에서 보낸 정찰대의 전멸과 함께 시작된다.
‘슬슬 생존자가 돌아올 타이밍이야.’
정찰대에 누가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전쟁 군주 이벤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이 시점에서 정찰대는 전멸하고 전쟁 군주가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해 살려 보낸 생존자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성문을 넘는다.
정찰대 편성은 여러 변수에 때문에 늘 무작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큰 변동이 일어나서 생존자로 누가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로그인을 하고 구석진 곳에 앉아서 로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은 긴박한 기척을 감지하고는 출입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병 길드의 제복을 입은 젊은 남성이 출입문을 열고 다급하게 달려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온 힘을 다해 뛰어온 것인지 헉헉, 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유진은 그의 머리 위로 시선을 옮겼다.
[용병 길드 안내원 루한.]
그는 루한이라는 이름의 안내원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서, 성문에!”
“성문에?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
벨폰 지부를 왕래하면서 몇 번인가 마주친 적 있던 용병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분명 이름이 델바인이었을 것이다. 은패 용병이긴 하지만 스토리 상에 비중이 있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굳이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았었다.
“다이크 경이 피투성이로 북문 밖에 나타나셨습니다!”
“다이크 경이?”
루한의 말에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다이크가 정찰대에 편성되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찰대의 다른 인원들에 대해 묻는 것이다. 델바인의 질문에 루한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진은 큰 소리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자, 자네는?”
“은패 용병 유진? 이 심각한 상황에 어디 가는가?”
유진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 용병들이 말을 걸어왔다. 유진은 슬쩍, 고개만 돌려 용병들을 보았다.
“다이크 경이 피투성이라는 말을 못 들었습니까? 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제야 용병들이 황급히 움직였다. 일단의 무리가 용병 길드 벨폰 지부에서 나와 북문으로 향했다.
십여 명의 용병들이 우르르 북문으로 달려갔다. 오전 시간이라 당연히 북문은 열려 있었고, 루한의 말대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다이크가 검문소 옆에 마련된 공간에서 경비병들로부터 응급 처치를 받고 있었다.
“다이크 경!”
몰골이 엉망이었지만 응급 처치를 맡은 경비병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 그제야 용병들은 안도했고, 그중에서 델바인이 대표로 앞에 나섰다.
“다이크 경, 저희도 궁금한 게 많기는 하지만 지부장님께 먼저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그리고 혹시나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다른 생존자는 없는 겁니까?”
델바인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질문을 던졌지만 다이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대답이 되었던 것인지 델바인은 슬픔을 이기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다이크 경.”
뼈가 부러진 모양인지 비틀거리는 다이크를 부축하는 유진.
“유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반갑군.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아쉽게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군. 먼저 지부장을 만나서 전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재회의 담소는 다음에 나누죠.”
유진은 다이크를 부축하여 용병 길드의 지부장 집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침 집무실 안에는 다이크의 귀환 소식을 들은 용병 길드 벨폰 지부장이자 금패 용병인 솔론이 앉아 있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여기에 껴 있을 분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진은 다이크를 소파에 앉혀 두고 집무실을 떠나려고 했지만.
“유진 씨, 당신도 여기서 다이크 경의 이야기를 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앉으세요.”
“알겠습니다.”
강압적인 기세는 아니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유진도 궁금하긴 했기 때문에 순순히 나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유진이 앉은 것을 확인한 솔론은 집무실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다이크의 앞에 앉았다.
“다이크 경, 자네가 본 것을 전부 말해 보게.”
솔론의 말에 다이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북쪽 숲에서 본 것을 전부 말했다. 고등 전술을 사용하는 오크들과 전쟁 군주와 관련된 상황 설명이 끝났을 때, 솔론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영주님께 보고 드리고, 토벌대를 조직해야겠군.”
용병이라고는 해도 토벌대를 조직하려면 영주의 의뢰가 필요하다. 솔론은 전쟁 군주의 출현이 확실하다고 판단하였고, 영주인 벨폰 자작에게 의뢰를 요청하기 위한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5분 뒤, 솔론은 완성된 서류를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유진 씨, 괜찮다면 이걸 벨폰 자작님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가능하면 그 자리에서 승인 서류를 받아 오셨으면 합니다.”
벨폰 자작 뿐만 아니라, 지벨 백작과도 관계가 좋은 유진을 전령으로 보낸다면 토벌대 조직 승인이 조금 더 빠르게 처리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다. 유진은 그 모든 배경을 짐작했지만 딱히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도 없어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요청서를 받아 들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유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영주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달린 끝에 영주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가 유진의 얼굴을 알아본 덕분에 특별한 검문 없이 벨폰 자작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 군주 토벌을 의뢰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군요.”
“예, 그렇습니다.”
“전쟁 군주가 나타난 게 사실이라면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토벌령을 내려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승인하고 의뢰를 요청하도록 하지요. 지금 바로 서류를 써 주겠습니다.”
“빠른 처리에 감사합니다.”
“이걸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의뢰서는 금방 완성되었다. 벨폰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의뢰서를 유진에게 건넸다. 유진은 벨폰 자작의 의뢰서를 용병 길드의 벨폰 지부장 솔론에게 전했다.
“빠르게 전달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토벌대가 조직되는 겁니까?”
유진의 물음에 솔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동패 이상의 용병들로 토벌대가 편성될 겁니다. 물론 전쟁 군주를 상대하는 건 은패 이상의 용병들이 되겠지요.”
“제게도 참가 자격이 있군요.”
“물론입니다, 동패 이상의 용병들로부터 참가 신청을 받을 예정이기 때문에 유진 씨 또한 참가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유진 씨는 은패 용병이라서 전쟁 군주를 상대하는 주력 공격 조에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동패 용병이었다면 이번 이벤트에서 전쟁 군주를 직접 상대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이벤트를 클리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보상도 많이 줄어들게 된다.
“토벌대 모집은 언제부터 시작될 예정입니까?”
“당장 오늘부터 모집을 시작해서 대략 일주일 정도 모집을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라, 그 기간은 다른 의뢰를 받기 애매할 테니 지루한 마나 수련이나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 둬야겠네요.”
“그게 좋을 겁니다. 오크 전쟁 군주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요.”
* * *
소년병 출신의 한스는 벨폰 도시에서 목패 용병으로 등록하는 것에 성공했다. 유진과 다르게 마땅히 할 일이 없고 전투 능력도 부족한 그는 철패 용병들의 짐꾼 노릇을 하며 살아갈 돈을 벌었지만 고향에 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생활비가 턱 없이 부족했고, 결국 임시 금역으로 지정된 북쪽 숲으로 독버섯 채집을 떠나는 철패 용병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스! 빨리 따라와! 금역이 풀리기 전에 독버섯을 최대한 채집해야 해!”
철패 용병 실링이 다그쳤다. 한스는 지쳐 있었지만 무거운 가방을 메고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물 한 모금 마실 여유조차 없었다.
“여기 우리가 채집한 독버섯들 전부 다 담아라.”
“아, 알겠습니다!”
“목소리 높이지 마, 몬스터들 몰려오면 귀찮아지니까.”
“넵.”
한스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땀방울을 닦아 내고는 독버섯들을 주워 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방이 가득 찼고, 그는 이 사실을 실링에게 알렸다.
“흠, 우리도 가방이 가득 찼는데.”
“오늘은 이 정도만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철패 용병들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린다. 곧 그들을 지휘하는 동패 용병이 결정을 내렸다.
“다들 가방이 가득 찬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돌아가자.”
한스에게는 다행인 소식이었다. 외곽부라고는 하지만 북쪽 숲이라서 많이 무서웠다. 몬스터들이 나타나면 철패 용병들이 처치해 주기는 했지만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숨도 편하게 쉴 수가 없었다.
다들 돌아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찰나였다.
“크아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흉부에는 손도끼가 꽂혀 있었다.
“몬스터다!”
“습격이다!”
전투태세를 취하는 용병들을 향해 웅장한 북소리와 함께 붉은 깃발을 든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 군주의 깃발이잖아!”
“진짜 있는 거였어?”
우왕좌왕하는 철패 용병들을 보며 한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