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21)
유진은 남쪽 숲의 고블린 군주를 사냥하기 위해 만전을 기했다. 그가 준비한 가장 큰 ‘카운터’는 1,000골드짜리 마나 방해 스크롤이다.
가격이 매우 비싸긴 하지만 의뢰 보수가 2,000골드고 마도구들을 판매하면 적지 않은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마나 방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단순한 구조라서 대인전에서는 그 효력이 약한 편이지만 고블린 군주 정도의 몬스터에게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유진은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긴 끝에 고블린 군주의 시찰 동선에 겹쳐 있는 부락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50마리 정도의 고블린이 서식하고 있는 부락으로, 이곳의 족장 역시도 주술사 타입이었다. 유진은 일부러 주술사 타입의 족장이 있는 곳으로 습격 장소를 골랐다. 그래야 하나의 마나 방해 스크롤로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부락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지도를 볼 필요도 없었다. 유진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블린 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락의 주위에 연금술 기름이 담긴 항아리를 골고루 잔뜩 묻어 두는 것으로 계획의 일부인 ‘화공’의 준비를 끝낸 유진은 근처의 나무들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거목을 타고 올라가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고블린 부락이 훤히 보였다.
고블린 군주가 시찰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다른 고블린 부락들에 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고블린들 일하네.
―고블린 군주 시찰이면 쟤들 입장에서는 사단장 오는 거 아님? ㅋㅋㅋㅋ.
―ㄹㅇㅋㅋ. 사단장 온다는데 일해야지.
채팅 창에서 시청자들이 떠들었다. 유진은 말없이 채팅 창을 힐끔거리며 거목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3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안 그래도 바빠 보이던 고블린들이 더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고블린 군주의 행렬이 보였다.
행렬은 예상보다 단촐했다. 조잡한 갑옷으로 무장한 고블린 20여 마리가 군주의 옆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고 고블린 군주의 행렬이 부락에 충분히 가까워졌지만 다른 호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진은 고블린 군주의 행렬이 부락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거목 위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유진은 고블린 군주가 족장을 만나서 악수를 하는 순간 화살에 불을 붙여서 쐈다.
시위를 떠난 불화살은 부락 주위에 미리 설치되어 있던 연금술 기름 단지를 정확하게 맞췄고,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이 일어났다.
화르르륵!
화염이 일어나자 유진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연금술 아이템을 추가로 사용하여 화염을 키웠다. 화마가 거세지자 고블린들이 적습을 눈치채고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술사 특성의 고블린 군주와 족장이 화염의 연쇄를 끊어 놓기 위해 주문을 연창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렇게는 안 되지.”
군주와 족장의 주변으로 모여 드는 마나의 흐름을 읽은 유진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나 방해 스크롤’을 꺼내서 찢었다.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는 역장이 생성되었고, 주문을 외우고 있던 군주와 족장은 갑작스러운 이변에 당황하여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케륵?”
“키룩?”
고블린의 얼굴 표정을 읽는 재주는 없지만 아마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일 것이다.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 화염은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면서 부락을 포위했다.
지상을 가득 채운 화염과 마나 방해 역장. ‘중급 화염 저항(D)’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검사인 유진에게는 준비된 무대나 다름없었다.
“슬슬 가 볼까?”
유진은 여유가 묻어 나오는 얼굴로 나무에서 뛰어 내렸다. 마나 방해 역장은 제한 시간이 있기 때문에 괜히 화살로 잡 고블린들을 정리하는 것보다는 화염을 방패로 삼아서 정면 돌파를 하는 게 훨씬 전술적이었다.
―고블린 슬레이어가 간다!
―오우 ㅋㅋㅋ.
―방장님이 불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모습 나만 멋지냐?
―저도 멋지다고 생각함.
―ㄹㅇㅋㅋ.
채팅 창을 힐끔 확인한 유진은 화염을 뚫고 부락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중급 화염 저항(D)’ 스킬 덕분에 불의 영향을 적게 받는 유진과 달리 고블린들은 그야말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락 안으로 들어오는 유진을 저지하지 못했다.
“끼에에에에엑!”
“키에에에에엑!”
사방이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고블린들이 고통을 토해 내며 화마에 휩쓸려 끔찍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고블린 군주와 족장만이 먼 곳에서 유진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군주의 호위를 맡은 고블린 전사들 또한 불에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군주와 족장은 주술사 특성이었기 때문에 마나 방해 역장이 작동 중인 지금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연금술 기름통을 몇 개 더 던져서 화염을 강하게 일으키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중급 화염 저항(D)’ 스킬 만으로는 버티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에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파이어 펀치! 파이어 펀치! 파이어 펀치!
―그는 신이야!
―빨리 고블린들을 죽여주세요. 현기증 난다는 말이에요!
―고블린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오래된 생각이다.
채팅 창을 힐끗 봤더니, 알 수 없는 패러디 드립들과 고블린들을 죽여 달라는 요청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여 달라면 죽여줘야지. 유진은 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뽑아 든 흑철검을 들고서 고블린 군주와 족장이 있는 곳을 향해 땅을 박찼다.
옅은 화염의 장막을 뚫고서 단숨에 두 고블린의 앞에 도달했다. 군주의 호위를 위해 동행한 고블린 전사들은 모두 화염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군주와 족장뿐. 그 위급한 상황에서 족장은 군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도인지 유진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아마도 마나 방해 역장과 관련된 기초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지.”
유진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난 순간 휘둘러진 흑철검이 고블린 족장의 목을 베었다. 주술사 특성의 족장이었기 때문에 근접전에 특화된 유진의 검을 피하지 못했다.
“끄르르르륵!”
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고블린 족장이 비틀거리다 힘 없이 쓰러졌다. 쓰러지며 죽어 가는 와중에도 유진을 막기 위해 손을 휘젓는 모습이 마치 군주를 지키기 위한 충신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유진이 상관할 바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발목을 붙잡으려 하는 족장의 뒤통수에 흑철검을 쑤셔 넣는 것으로 확인 사살을 하고는 고블린 군주를 향해 몸을 돌렸다.
“키룩케륵! 케르르륵!”
고블린 군주가 입을 열고 괴이한 소리를 흘렸다. 가래가 끓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유진은 자신을 노려보는 고블린 군주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흑철검을 들고서 전투 자세를 가다듬었다.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겨누는 유진의 모습에 고블린 군주는 허리 혁대에 걸려 있는 검집에서 소검을 빼 들었다.
“캬륵! 케르륵!”
유진은 고블린 언어를 모른다. 하지만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고블린 군주의 제스처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고블린이 도발하네 ㄷㄷㄷ.
―그래도 군주급이라 그런지 지능이 좀 높은가 보네요.
―지능이 높으면 도망을 쳤어야지.
―뒤에 불타고 있는 거 안 보여요? 도망 못 침 ㅅㄱ.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하고서 유진은 고블린 군주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유진을 보며 고블린 군주 역시 소검을 겨눈 채 앞으로 나아간다.
주술사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았다. 불 때문에 도망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지만 그는 유진에 대한 적의와 분노를 원동력으로 백병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냐, 와라.’
유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느새 거리가 꽤 가까워졌다. 30m 즈음이었던 간격은 이제 서로를 두고 10m도 남지 않았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검을 든 둘은 긴장 속에서 더욱더 거리를 좁혔고, 마침내 5m 정도를 남겨 두고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유진도 긴장했지만 고블린 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이 서로를 노려보며 경계하는 가운데, 유진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혁대에 걸려 있는 작은 단검 두 자루를 날렵하게 뽑아 들고 고블린 군주를 향해 투척한 것이었다.
슈욱.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두 자루의 단검. 하지만 고블린 군주의 육신을 꿰뚫지는 못했다. 전사 특성이 아니라고 해도 상위의 몬스터답게 날렵한 움직임으로 단검 두 자루를 회피한 것이었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박히지 않았다.
―주술사 특성인 것 같은데, 단검 피함 ㄷㄷㄷ.
‘역시 만만하게 당해 줄 생각은 없나 보군.’
유진은 채팅 창의 반응을 힐끔 확인하고는 고블린 군주를 향해 땅을 박찼다. 애초에 5m도 남지 않은 거리였다. 별도의 스킬도 쓰지 않고 땅을 박찼을 뿐이지만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유진의 접근을 알아차린 고블린 군주가 힘차게 소검을 휘둘렀다.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은 괴력에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매섭게 귓가를 때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유진의 왼쪽 어깨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방심했다!’
뒤늦게 찾아온 고통에 아차 싶었다. 유진은 왼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황급히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예리한 감각이 추가 공격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크윽!”
고블린 군주가 내찌른 왼손의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야모야, 무슨 일이야?
―고인물 무빙 어디감? ㅋㅋㅋㅋ.
―고블린 군주 상위 몬스터임. 방장님 컨트롤은 충분히 훌륭함.
―ㄹㅇ 방장 무빙 좋은데, 왜들 그래.
채팅 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유진은 싸늘한 시선을 흩뿌리며 흑철검을 휘둘렀다.
“케륵!”
흑색의 날카로운 칼날이 고블린 군주의 상체를 깊숙이 베었다. 주술사답게 얇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예리한 날붙이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고, 고블린 군주는 고통을 내뱉으며 붉은 피를 쏟아 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유진은 고블린 군주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의 일격은 방심해서 허용한 것이다. 마치 그렇다고 일러 주듯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지만 고블린 군주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검술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타고난 반사 신경을 활용하여 유진의 폭풍과도 같은 검격의 세례를 막아내고 있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제 끝이다.’
유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쉬지 않고 휘두르면서 고블린 군주를 불과 가까운 곳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고블린 군주의 바로 뒤에는 뜨거운 화마가 춤을 추고 있다.
고블린 군주 또한 뒤늦게 지금의 처지를 알아챈 것 같았고, 유진은 그를 보며 냉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