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7)
“케르륵! 케륵!”
“키륵케륵!”
족장이 목숨을 잃자 고블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투력 증가와 사기 고양 버프가 사라진 탓이었다. 그리고 유진이 가지고 있는 칭호 중 하나인 ‘고블린 학살자’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면서 고블린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고블린들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체력이 다소 소모되기는 했지만 ‘불굴의 전사(C)’ 스킬의 효과로 소모된 체력에 비례하여 반사 신경이 증폭된 상태였다.
“와라.”
툭 내뱉었지만 고블린들은 유진을 경계만 할 뿐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키륵케륵!”
“케륵!”
위협이라도 할 생각인지 고블린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마구 휘두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자신들만의 언어를 말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유진은 흑철검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전투 자세를 가다듬었다. 칭호 덕분일까? 유진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적의와 살기에 고블린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뒷걸음질 쳤다.
―슬금슬금 도망치는 거 보소.
―전부 다 죽이셈!
―착한 고블린은 죽은 고블린 뿐이다. 오래된 생각이다.
―찢고 죽여라!
시청자들이 고블린을 죽일 것을 한 목소리로 외쳤고, 유진 또한 이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남은 고블린들을 향해 땅을 박찼다.
서걱.
“케르르르륵!”
휘두른 검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고블린의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튀었고, 고블린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케륵!”
“키륵!”
고블린들이 경계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 피 분수가 솟구쳤고, 고블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후우!”
고블린들을 도륙하던 유진이 잠시 호흡을 정돈하며 주위를 살폈다. 고블린들은 이제 10마리도 남지 않았다. 그에 비해 유진은 여전히 멀쩡했다. 체력을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50% 이상이었다.
유진은 호흡의 정돈을 끝내기 무섭게 다시 고블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남은 8마리를 죽이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진짜 암살자’ 님께서 300포인트를 후원하셨습니다.]
└목격자 전부 죽였으니까, 이것도 암살임. 아무튼 그럼.
전투 과정과 결과가 꽤 만족스러운 것인지 포인트 후원이 이어졌다. 300포인트를 후원한 시청자도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군.’
늦은 시간이 되면 성문이 닫힌다. 밖에서 야영을 하는 것보다는 밤하늘 별빛 여관의 낡은 침대에서 잠에 빠져드는 게 훨씬 더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유진은 벨폰 도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고블린 관련 의뢰를 받고, 완수한다. ‘고블린 슬레이어’이라는 칭호를 받기 위한 업적 노가다가 얼마나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벌써 고블린과 관련된 의뢰를 10개 넘게 완수했지만 ‘고블린 슬레이어’ 칭호와 관련된 업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인물 무빙을 포함해 화려한 기술들을 선보이며 사냥을 이어 나간 덕분에 후원이 꽤 많이 들어왔다. 덕분에 유진은 적지 않은 양의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상점 창.”
오늘도 고블린을 잡고서 숙소로 돌아온 유진은 로그아웃을 하고는 피곤한 표정으로 상점 창을 열었다.
[보유 포인트 5,520.]
―오러(B)
―대상인의 계산법(B)
―매의 눈(C)
아직 부족하다. ‘오러(B)’ 스킬을 구입하려면 10,000포인트가 필요하다. 포인트를 수급하려면 칭호를 얻을 필요가 있는데, 현재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높은 포인트의 업적과 칭호는 ‘고블린 슬레이어’다.
물론 ‘고블린 슬레이어’의 업적만으로는 ‘오러(B)’ 스킬을 구입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포인트 후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해야 할 일은 다 끝났다. 피로가 꽤 쌓여 있었기 때문에 유진은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두 눈을 감으려는 순간, 그는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창가로 향했다. 고개를 내밀자 고함 소리와 비명이 얽힌 불쾌한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띠링! 돌발 이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돌발 이벤트라고? 이 시기에 발생할 돌발 이벤트가 뭐가 있었더라? 유진이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눈앞에 이벤트 창이 생성되었다.
[돌발 이벤트: 습격당한 벨폰 자작.
늦은 밤. 어떤 중요한 물건을 호송하던 벨폰 자작과 그의 호위대가 정체불명의 적들에게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를 구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격전지로 향하세요.
보상: 1,000포인트, 벨폰 자작가의 우호도 상승.]
무려 1,000포인트가 보상으로 걸려 있는 이벤트 퀘스트였다. 안나 지벨이 생존하면서 벨폰 자작 역시 목숨을 보전하고 발생한 돌발 이벤트로 보였다.
‘나쁘지 않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유진은 어느새 여관을 빠져 나오며 ‘로그인’을 외치고 있었다.
―유하!
―늦은 시간이지만 방송 켠 알림 보고 바로 들어왔습니다.
―방장님 하이요!
늦은 밤에 갑작스러운 방송이었지만 많은 시청자들이 의아해하면서도 바로 들어와 주었다. 늘 그렇듯 서로 떠들던 시청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발 이벤트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거 무슨 이벤트에요?
―대박 이거 엄청 희귀한 돌발 이벤트에요.
―ㄹㅇ 벨폰 자작 살아 있어야 일정 확률로 발동하는 돌발 이벤트임. 근데 벨폰 자작 살아 있으려면 안나 지벨 살려야 해서 엄청 보기 힘든 이벤트임.
―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나요?
―소나무 위키에서 봄 ㅅㄱ.
고인물 플레이어의 방송 아니랄까 봐 시청자들도 만만치 않은 고인물들이었다.
‘대로 쪽인가?’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폭발음이 들리고 화염 기둥이 솟아난 장소는 가까워 보였다. 가까운 장소 중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행렬이 지나갈 만한 곳은 상점가 옆의 대로 뿐이다.
대략적인 위치를 특정했다. 유진은 전속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스템 메시지가 말한 격전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붉은 화염을 흩뿌리는 벨폰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벨폰 도시의 영주이면서 중급의 레벨에 오른 마도사이기도 했다. 그가 스태프를 휘두를 때마다 강력한 화염 마법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중무장한 기사 둘과 20여 명의 병사들이 벨폰 자작의 휘하에서 싸우고 있었다. 대로 위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많은 거로 보아, 휘하 병사들의 수는 더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전 중인 벨폰 자작과 마차 행렬을 공격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소설이나 게임 속에 등장하는 정통적인 악역들의 복장인 검은 옷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도시에서 이런 난리가 났는데도 경비대는 아직이냐! 모두 목을 쳐야겠군! 제기랄!”
벨폰 자작 휘하의 기사가 욕설을 내뱉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에서 교전이 발생한 시점에 경비대는 출동을 하려고 했지만 검은 복면을 입은 이들이 경비대 본부를 포위하는 바람에 늦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전장에 진입했다가는 적으로 오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진은 우선 벨폰 자작과의 거리를 좁혔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거리에 진입했다고 판단한 유진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벨폰 자작님! 합류하겠습니다!”
“이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벨폰 자작의 시선이 유진이 서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전투 중인 상황이었지만 벨폰 자작의 표정에 반가움이 묻어 나왔다.
“유진 공!”
공식적으로 지벨 백작가의 ‘은인’이 되어서 그런지 유진의 이름 뒤에 붙은 호칭이 달라졌다.
“가세하겠습니다!”
유진이 흑철검을 뽑아 들었다. 한창 전투 중이었지만 유진이 목소리를 높여 벨폰 자작을 부른 탓에 복면인 중 몇몇 시선이 유진에게 향하고 있었다.
고블린과는 다르다. 놈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살수들이다. 고인물이라고 자부하는 유진도 이번만큼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은 없다.’
한 번 죽으면 끝이다. 유진은 그것을 명심하고는 땅을 박찼다. 혼자 떨어져서 복면인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벨폰 자작과 그의 수하들이 유지하고 있는 진형에 합류하는 게 훨씬 생존 가능성이 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다.’
유진은 벨폰 자작의 진형을 향해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혼란스러운 전장을 뚫고 비교적 안전한 진형에 도달하려는 찰나 유진은 왼쪽에서 싸하고 차가운 기세를 느끼고 황급히 우측으로 몸을 던졌다.
슉.
조금 전까지 유진이 서 있었던 곳에 단검이 날아와 박혔다.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에 단검이 꽂혔을 것이다.
“제기랄.”
유진은 욕설을 흘렸다. 누군가의 눈에 걸린 모양이다. 그는 몸에 잔뜩 묻은 피를 닦아 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일어섰다.
“벨폰 자작가의 용병이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앞을 막아섰다. 유진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벨폰 자작의 수하들은 저마다 복면인들을 상대하며 마차를 지키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대답이 없군. 뭐 상관없다. 우리를 방해할 생각이라면 죽일 수밖에 없지.”
복면인의 말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쟤들 레벨 엄청 높아 보이는데?
―병사들이랑 싸우는 모습 보셈. 적어도 오크급 이상임.
―방장님 새로 시작해야 하는 각인가?
루베니아 연대기는 죽으면 캐릭터를 다시 키워야 한다. 유진은 지금 게임 속에 빙의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마도 죽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확률이 높았다.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님? ㅋㅋㅋ.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간다. 유진은 저 복면인들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단순한 호들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유진은 땅을 박차고서 복면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싸울 생각이군.”
갑작스러운 돌격이었지만 복면인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품속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들고서 유진을 향해 투척했다.
채앵! 챙!
쇳소리와 함께 흑철검에 부딪친 단검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고,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복면인은 하아 하고서 한숨을 내뱉었다.
“마나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
복면인의 소검에서 오러 블레이드가 솟구쳤고, 그 모습을 본 유진은 이를 꽉 악물었다.
‘제기랄! 기사급이었나?’
경로를 틀기에는 늦었다. 이대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유진은 힘차게 땅을 박찼다. 흑철검이라면 오러 블레이드를 상대로 조금은 버텨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앗!”
유진의 검격이 복면인의 소검을 강타했다. 실수 없는 깔끔한 검술에 복면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너, 꼬마 사자였구나.”
“크윽!”
“미안하지만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