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10)
“아무튼 화공은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진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려 보이는 면모와는 달리 묘하게 설득력 있는 목소리에 안젤라는 물론이고 라이드와 바이스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돌파를 하는 수밖에 없어요.”
스물이 넘는 오크들을 상대로 넷이서 정면 돌파를 주장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라이드와 바이스도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렇군, 정면 돌파밖에 방법이 없겠어.”
라이드가 턱을 긁적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바로 공격하는 게 좋습니다.”
“그 부분은 나도 동의한다. 시간이 지나면 오전에 부락을 빠져나왔던 순찰조들이 돌아올 수도 있어.”
바이스도 유진의 의견에 찬성했다. 결국 무리한 화공보다는 정면 돌파로 계획이 세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바이스가 활을 쏠 줄 아는 궁수라는 것이었다.
후방에서 엄호가 가능한 궁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투에 임하는 이들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
“저 나무 위에서 엄호할 테니까 기억해 둬, 괜히 엄호하기 힘들게 사각지대로 빠지지 말고.”
바이스의 말에 유진은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흑철검을 뽑아 들었다. 라이드와 안젤라도 무기를 빼 들었다. 라이드는 평범한 장검이었지만 안젤라는 귀족들이나 쓸 법한 레이피어였다.
‘신분을 감춰야 하는 상황에서 레이피어라, 역시 생각이 짧군.’
누가 봐도 귀족의 것이 분명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외형의 레이피어를 힐끔 살피며 유진은 혀를 찼다.
복면과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망토와 가죽 갑옷으로 최대한 체형을 숨기는 재치를 보였지만 가장 중요한 무기 부분에서 아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문제가 발생하는 건 예정되어 있으니, 그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오, 말리지 않겠어.”
유진은 선봉을 자처했고, 라이드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으며 그를 앞으로 보내 주었다. 안젤라도 말리지 않았지만 대신 유진의 뒷모습을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바이스가 보초를 처치할 거다. 그걸 신호로 돌격하면 돼.”
라이드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방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유진의 머리 위로 날아간 화살이 망루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오크의 목에 꽂혔다.
‘궁술 실력이 나쁘지 않군. 적절하게 경계할 필요가 있겠어.’
히든 루트의 스토리 진행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는 유진은 라이드와 바이스가 배신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둘을 잠재적인 적군으로 취급했다. 유진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에 라이드가 다른 망루의 오크에게 단검을 투척했다.
“크어어어!”
제법 길쭉한 단검이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일격에 오크의 숨통이 끊어졌다. 부락 입구의 망루 두 곳이 무력화되었다. 이제 유진의 차례였다. 그는 두 눈동자를 살벌하게 번뜩이며 부락의 입구를 넘었다.
“크워어어어!”
부락의 영역에 진입하기 무섭게 오크들이 달려 나왔다. 유진을 발견하고 달려 나온 오크들의 숫자는 총 5마리였다. 벨폰 도시 북쪽 숲의 오크 5마리라 부담이 될 만한 숫자였지만 지금 유진은 혼자가 아니었다.
“엄호할게요!”
레이피어를 들고서 따라붙은 안젤라도 있었고, 배신이 확정되어 있지만 당장은 ‘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드와 바이스도 있었다.
“크아아아!”
뒤편에서 날아온 화살이 창을 든 오크의 목에 꽂혔다. 바이스의 엄호였다. 유진은 남은 오크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단숨에 오크들과의 거리가 좁혀졌고, 유진은 손에 꽉 쥐고 있는 흑철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붉은 피 분수가 솟구치고 오크 2마리가 힘 없이 고꾸라졌다.
“오크 2마리를 일격에?”
바로 뒤에서 라이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고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휘둘러진 도끼를 막아내고서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오크의 목에 쑤셔 넣었다.
“끄르르르륵!”
끔찍한 소리와 함께 오크의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여전히 놀란 기색이 역력한 라이드와 달리 안젤라는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투의 소음을 듣고서 달려오는 다른 오크들을 향해 달려가 레이피어를 힘차게 내찔렀다.
“크어어어!”
안젤라가 내찌르는 레이피어는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레이피어 검술을 전문적으로 연마한 귀족다운 깔끔한 일격이었다.
일격에 오크를 해치운 것에 자신감을 얻은 것인지 안젤라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다가오는 오크들을 향해 레이피어를 내찌르는 동작은 완벽에 가까웠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한 티가 났다.
눈앞의 적에 몰두한 나머지 우측과 좌측의 경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 부분은 유진이 커버해야만 했다. 이런 곳에서 그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유진은 혼자서 활약하는 것보다는 최선을 다해서 안젤라를 보조했다. 후방에서는 바이스가 열심히 화살을 쏘며 지상의 파티원들을 엄호했다.
정신없이 흑철검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오크 전사들은 죄다 시체가 되어 있었고, 주술사 둘만 남겨 둔 상황이었다.
“저 둘만 처치하면 될 것 같아요.”
안젤라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전투 중에 복면과 머플러가 찢긴 것인지 그녀의 고운 얼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옆에 선 라이드가 안젤라의 맨 얼굴을 계속만 힐끔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음흉한 시선이 향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전형적인 악역 엑스트라의 플래그를 꽂으려는 것 같았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쟤 지벨 백작 딸 아님?
―ㄹㅇ? 진짜네, 안나 지벨 설정 일러스트랑 똑같네.
―방장님이 안나 지벨 살리는 히든 루트 진입하셨나 보네요.
―그거 사전 조건 충족하는 거 어렵던데, 다 빌드업이었나 보네.
안나 지벨의 얼굴을 알아보는 시청자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의외였다. 안나 지벨은 스토리 초반에 목숨을 잃는 등장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설정 일러스트까지 찾아서 보는 설정 ‘덕후’들이나 알 법하다.
스트리머들도 안나 지벨을 살리는 히든 루트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사전 조건이 까다로워서 잘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을 아는 시청자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유진은 다시 한 번 적잖이 놀랐다.
“주술사가 둘이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궁수의 지원만 확실하다면 금방 처치할 수 있습니다.”
벨폰 도시 북쪽 숲의 난이도가 높다고는 하지만 루베니아 대륙 전체를 놓고 보면 여전히 초보 존의 범주 안에 있다.
상대가 주술사 둘이라고는 하지만 방심만 안 하면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 유진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주술사들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에서는 자신감이 넘쳤다.
‘다행히 하나는 수습이군.’
유진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 주술사도 급의 차이가 있다. 고인물 플레이어인 유진은 그 미묘한 급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지식과 눈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눈앞의 오크 주술사 둘 중 하나가 ‘수습’의 경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안젤라와 라이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이것은 귀족 영애나 동패 용병의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알 수 없는 레벨의 지식이었다.
“지금 바로 돌격할게요.”
“기, 기다려, 바이스가 신호를 보내면.”
“이미 주술 영창을 시작했어요. 신호를 기다리기에는 늦어요.”
라이드의 만류에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오크 주술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는 것 또한 문제였지만 조금 전부터 바이스의 지원 사격이 눈에 띄게 줄었다. 마치 고의로 유진의 체력을 소모시키려는 것 같았다.
‘얕은수를 쓰는군.’
속이 훤히 보였다.
‘나중에 이빨을 드러내면 바로 죽여주마.’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수습 주술사를 향해 몸을 던졌다. 상대적으로 약한 몬스터부터 먼저 처치할 생각이었다.
“크아아아아!”
수습 주술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주술을 완성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화염구 3개가 공중에 생성되었다. 하지만 유진이 조금 더 빨랐다. 화염구가 발사되기 전에 그의 흑철검이 3개의 화염구를 베어 버렸다.
―오오오!
―오러도 없이 어떻게 마법을 벤 거임? ㄷㄷㄷ.
―흑철은 마법 저항력도 높고 마력을 분해하는 성질이 있어서 마법이나 주술을 벨 수도 있습니다. 출처는 소나무 위키니까 찾아보세요.
채팅 창이 소란스럽다. 하지만 확인할 여유는 없다. 화염 주술이 무력화된 지금 당장 수습 주술사의 목을 쳐야 한다.
수습 주술사를 노려보는 유진의 눈동자가 매섭다. 슬쩍 옆을 살폈지만 예상대로 지원 사격은 없었고 라이드도 어정쩡한 위치에서 전투를 관망하는 것에 가까웠다. 다만 안나 지벨은 유진을 돕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마다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우선은 수습 주술사를 처치하는 게 급선무다.
“하앗!”
기합과 함께 휘둘러진 검이 수습 주술사의 목을 깊게 베었다. 붉은 피가 튀고 수습 주술사는 비틀거리다가 힘 없이 쓰러졌다.
“안젤라 씨! 오크 주술사를 견제해 주세요!”
바이스가 어디로 내뺐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살 지원 사격이 없다. 라이드도 전투에 비협조적인 상황이다. 즉, 오크 주술사가 외울 때 견제할 인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알겠어요!”
“서둘러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안젤라, 아니 안나 지벨이 땅을 박찼다. 그녀는 단숨에 오크 주술사와의 거리를 좁혔다. 오크 주술사가 황급히 주술을 완성하려고 했지만 유진이 단검을 던지며 방해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크워어어어!”
오크 주술사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의 왼손에는 단검이 꽂혀 있었다. 유진이 던진 것이었다. 고통으로 인해 영창이 파기되어 분노한 오크 주술사의 목을 향해 안나 지벨이 레이피어를 내찔렀다. 하지만 오크 주술사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신속하게 영창할 수 있는 주술로 바람의 칼날을 하나 소환하여 안나 지벨을 향해 쏘아 보냈다.
“제기랄!”
안나 지벨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호전적이다. 이렇게 전투에 적극적일 필요는 없다고! 유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안나 지벨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행히 바람의 칼날이 그녀를 머리 없는 듀라한으로 만들기 전에 유진의 흑철검이 한발 더 빨랐다.
채앵!
바람의 칼날을 쳐 내는 것과 동시에 단검을 빼 들고서 오크 주술사의 오른팔을 베었다.
“크어어어!”
오크 주술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땅에 떨어졌다.
“지금입니다!”
“네!”
유진의 외침에 안나 지벨이 힘차게 레이피어를 내찔렀다. 오크 주술사의 목이 꿰뚫렸다. 고생 끝에 주술사 둘을 처치했지만 환호성은 없었다. 라이드의 표정은 묘하게 거슬렸고 바이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