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식하는 스트리머 (3)
뿌우우우우우우우!
전장을 뒤흔드는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붉은 깃발이 거센 바람에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수백의 오크들이 뒤따랐다.
“저, 전쟁 군주의 깃발이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옆에서 다이크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용병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유진 또한 오크들이 앞세운 깃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저것은 오크들의 ‘전쟁 기’다.
‘그리고 전쟁 기가 있는 곳에는 워 로드 이상의 오크가 함께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
워 로드의 존재. 그것이 자유 기사 다이크와 살아남은 용병들이 동요하는 이유였다. 오크 워 로드는 일반적인 오크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반적인 기사들조차 단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다.
다들 당황하는 이유는 이거로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진은 왜 이렇게 침착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나다.
‘알고 있었으니까.’
오크들의 전쟁 깃발을 바라보는 유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는 곧 아주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상태 창.”
[전투 중에는 ‘상태 창’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상점 창.”
[전투 중에는 ‘상점 창’을 불러올 수 없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태 창과 상점 창은 열리지 않았다. 시스템은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잠시 시스템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전쟁 깃발의 주인, 오크 워 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크 워 로드 가로카쉬.]
철제 흉갑을 입고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는 오크 워 로드의 이름은 가로카쉬. 역시 루베니아 연대기의 튜토리얼 히든 루트에 출현하는 보스의 이름과 똑같았다. 이 정도면 게임 속에 빙의했다는 게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워 로드 가로카쉬 떴다!!!!!
―워 로드 어서 오고.
―안 놀라네? 역시 고인물이였네.
―아 ㅋㅋㅋ 이게 그 석유 냄새입니까, 휴먼?
게임 진행 초반의 네임드 몬스터로 분류되는 가로카쉬의 등장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유진! 어서 도망쳐야 해! 이대로라면 다 죽을 거야!”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한스가 듣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나약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유 기사 다이크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것인지 유진한테 도망칠 것을 재촉했다.
―한스 어서 오고.
―진짜 한심하다 ㅉㅉ.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한스의 찌질함.
“어디로 도망친다는 말인가! 소년병! 이곳은 전장이야! 도망칠 곳은 없어!”
다이크의 꾸짖음에 한스는 입을 다물었지만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만약 신분의 격차가 없었다면 말대꾸를 하며 맞서 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용병들이 동요하고 있군. 이대로라면 5초도 버티지 못한다. 전열을 정비해야 해.”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다이크. 그의 말대로 지금 상태로는 5초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용병들은 동요하고 있었고, 전열은 완전히 무너졌다. 다이크가 조급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유진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와아, 진짜 고인물이네.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군가의 감탄 섞인 한마디의 채팅에 유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튜토리얼 히든 루트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전열을 사수하라!”
다이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적검 용병단의 단장 안켈 또한 전열이 무너진 상태에서 저 잔혹한 오크 무리들과 조우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1%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이크의 말을 복창하며 용병들을 독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제기랄! 쉽지 않군!”
다이크는 욕설을 내뱉고는 유진에게 다가왔다.
“유진!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돌발 퀘스트: 다이크의 부탁.
적검 용병단과 상행을 함께 하던 다이크가 당신에게 선봉에 서서 전열의 재정비를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다이크의 요청에 응할 생각이라면 창과 방패를 들고 전열의 선두에 서십시오.
보상: 다이크의 추천장.]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 퀘스트 떴다!
―고인물이니까, 당연히 수락하겠지?
시청자들이 두 눈을 반짝이는 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게임 방송처럼 퀘스트 창도 보이는 모양이다.
참고로 여기서 도망친다는 말도 안 되는 선택지가 존재할 정도로 루베니아 연대기의 자유 도는 높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유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곧 귓가에 시스템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띠링! 돌발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퀘스트의 수락과 함께 다이크의 눈빛이 변했다. 마치 전우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신뢰감 가득한 눈동자였다. 그는 유진의 어깨를 강하게 두 번 두드리는 것으로 가볍게 격려하고는 도주하려는 용병들 붙잡았다.
“한스!”
“으, 응?”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오크들은 그렇게 만만한 족속들이 아니야! 도망칠 생각은 버려! 살고 싶으면 창과 방패를 들고 맞서 싸워!”
이 정도면 동기부여는 충분하겠지. 유진은 바닥에 뒹굴고 있는 창과 방패를 한스에게 쥐여 주고는 무너지는 전열의 선두로 향했다.
“전열을 사수하라!”
다이크가 목이 터져라 외쳤고 유진은 일부러 창을 쥔 손으로 방패를 강하게 두드리면서 시선을 모았다.
“도망치지 마라!”
“에라이! 쪽팔리게 이게 무슨 꼴이냐!”
“어서 집결해!”
굳건하게 전열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유진의 모습에 도주하려던 용병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방어 태세 준비 완료!
―어차피 의미 없는 거 다 아시죠오?
채팅 창이 소란스럽다. 유진은 곁눈질로 채팅 창을 슬쩍 확인하고는 정면을 향해 창을 겨눴다. 워 로드가 이끄는 오크들의 군세가 빠른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근본은 칼잡이’ 님께서 50포인트를 후원하셨습니다.]
└아재요!!!!!!!! 아직 한 발 남았다!!!!!!!!!!!
포인트 후원이 들어왔다. 아직 한 발 남았다는 ‘근본은 칼잡이’의 표현은 정확했다. 튜토리얼 시나리오의 히든 루트를 진행하게 되면 등장하는 오크 워 로드 가로카쉬는 절대로 현시점의 유저가 절대로 잡을 수 없는 몬스터다. 그렇다면 히든 루트는 어떻게 해야 클리어를 할 수 있는가?
‘지벨 백작령의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존버’하는 거지.’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저 단 한 번의 ‘충돌’만 버텨 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걸 버텨 내는 것도 헬 난이도이기는 하지.’
선봉은 워 로드 직속의 수하들이다. 그들의 돌격을 무려 ‘한 번’이나 막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용병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집결하여 견고한 방진을 형성했다는 것 정도다.
―온다! 온다! 온다!
채팅 창의 누군가가 환호하는 것과 동시에 오크들이 돌격 속도를 높였다.
100m…… 50m…… 30m.
놈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옆을 지키고 있는 용병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살아서 돌아가면! 에이나한테 청혼을 할 거야!”
누군가 사망 플래그를 꽂는 소리가 들렸지만 옆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유진은 방패에 몸을 숨기고 창을 정면으로 겨눈 채 마음을 정돈했다.
충돌이 머지않았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오크들의 기세가 매섭게 느껴진다. 유진은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루베니아 연대기는 익숙한 게임이었지만 목숨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 가는 느낌이다.
“온다! 물러서지 마라!”
누군가 외쳤다. 오크들이 코앞까지 접근해 왔다. 유진은 바로 앞에 보이는 오크를 향해 힘차게 창을 내찔렀다.
“키에에에엑!”
힘차게 내찌른 창이 오크의 가죽 갑옷을 뚫고 들어가 심장을 찢어발겼다. 운이 좋아서 오크가 무기를 휘두르기 전에 처치한 것이었지만 다른 용병들은 유진처럼 행운이 함께하지는 않았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용병들이 붉은 피를 쏟아 내며 힘 없이 쓰러졌다. 1열이 무너졌고, 유진도 살아남은 용병들과 함께 황급히 2열로 물러났다.
“버텨라!”
다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슬슬 지원군이 올 때가 되었다. 유진은 얼굴에 흥건히 묻은 핏물을 닦아 내고는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창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뿌우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오크 워 로드의 군세가 불었던 투박한 뿔 나팔 소리와는 다른 정교한 울림이 뺨에 닿는 게 느껴졌다.
“지벨 백작가의 영지 기사단이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정교하고 화려한 뿔 나팔 소리와 함께 군마를 타고 등장한 이들은 다름 아닌 지벨 백작령의 영지 기사단이었다.
두꺼운 중갑을 갖춰 입은 기사들이 지휘하는 수백의 기마대는 단숨에 오크 워 로드의 군세를 양단했고 뒤이어 등장한 보병들의 창칼이 오크들을 도륙했다.
영지군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되었고, 결국 오크 워 로드는 군세를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물러가는 오크들을 보며 용병들은 욕설을 내뱉었고 지벨 영지군을 향해서는 환호와 박수갈채를 멈추지 않았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유진은 영지 기사단에서도 화려한 갑주를 갖춰 입은 남자가 용병단장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벨 영지 기사단장 로웨스.]
작중인물 중에서도 꽤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는 로웨스였다. 그는 적검 용병단장 안켈에게 말을 걸었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간략하게 엿들을 수 있었다.
“안켈 단장, ‘물건’은 무사하겠지?”
“예, 물론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켰습니다!”
안켈이 힘차게 대답했다. 피로 물든 왼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이자 채팅 창에서 난리가 났다.
―역시 안켈이야.
―히든 루트에서만 볼 수 있는 안켈의 진면목.
―잘 감상했습니다.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을 감상한 시청자들의 포인트 후원이 잠시 쏟아졌다.
“오랜만이군, 로웨스 경.”
로웨스와 안켈의 대화가 끝나고 수습 기사들이 ‘물건’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보관함을 옮기는 사이에 다이크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게임 속 세계관에 따르면 다이크는 지벨 백작령 출신으로 로웨스와는 선후배 관계다.
서로 껄끄러운 관계는 아니라는 설정이 있는 거로 기억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는 체를 한 것 같다.
“워 로드의 공격을 버텨 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선배님이 지휘하셨던 겁니까?”
“내가 지휘하긴 했지만 이렇게 생존할 수 있었던 건 나 때문이 아닐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을 제외하면 기사는 보이지 않는데요?”
“여기 이 친구 덕분일세.”
다이크가 유진을 끌고 와서 로웨스의 앞에 세워 놓았다. 그러고는 그의 활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설명이 끝났을 땐 로웨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소년병이 이 정도의 활약을 했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네에게는 큰 빚을 졌어.”
로웨스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괜찮다면 영지 기사단에 입단할 기회를 주고 싶군. 자네와 같은 인재에게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돌발 퀘스트: 지벨 영지 기사단으로.
당신의 활약에 감탄한 다이크의 적극 어필로 로웨스가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가 지휘하는 지벨 영지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상: 지벨 영지 기사단의 종자 자격 획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