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에필로그 3 - 그녀의 운명
“콜록, 콜록.”
“엄마, 많이 아파……?”
“콜록. 아, 아냐. 괜찮아. 아가.”
엄마가 기침을 할 때마다 아이 역시 가슴이 저려 왔다.
몸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것도 나 때문……일까?’
언제인지도 모를 아기 때부터 쭉 그런 말을 들어 왔다.
- 다 네년 때문이다!
- 괜히 저것이 태어나서!!
- 저주받은 년이야! 빌어먹을!
처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아빠라는 사람의 폭언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아이는 지나치게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왔던 만큼 몸도 가누지 못하던 시절의 그 폭언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히 말뿐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아이가 자라는 동안, 집안은 정말 시시각각으로 기울어 갔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깨끗한 새집과 새 옷에서, 헌 집과 헌 옷으로.
그리고 끝내 허름한 초가로.
- 전부 네년 때문이다! 저주받은 네년 때문이야!
아빠라는 사람은 틈만 나면 아이를 때리고 학대했다.
모진 삶에서 그나마 희망이 되어 준 것은 눈앞의 엄마뿐이었다.
- 아냐, 아가. 넌 잘못 없어.
- 엄마가 부족해서 미안해.
- 아가, 사랑한다. 미안해.
엄마의 과거 때문에 아빠가 저러는 거라고 했던가.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그것이 엄마 잘못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아빠가 무슨 건달 출신이라고.
“그래도 개중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엄마는 그 와중에도 가끔 아빠 편을 들곤 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힘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씩씩.
“까불고 있어. 건방진 여편네가.”
엄마가 아이를 온몸으로 감싸고 아빠한테 대신 두드려 맞았던 어느 날.
앓아누운 엄마를 두고, 아빠는 강제로 아이를 끌고 나갔다.
“더는 안 되겠다. 너라도 팔아야지.”
지독한 술 냄새와 붉게 충혈된 눈.
항상 무서운 모습으로 기억하던 아빠는 그날따라 더욱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번쩍하고 하늘이 빛나더니.
“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아빠가 쓰러졌다.
그 이후로 아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그날 나쁜 악마들이 무슨 마법을 부려서 세상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에 비해, 유난히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나쁜 아빠를 데려간 것이라고.
‘악마가 아니라 천사님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어흐흐흑. 다행이다. 리나, 다행이야.”
다시 집에 돌아갔을 때, 자신을 끌어안고 우는 엄마를 보며 더욱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저 아이 때문이야.
- 저주받은 저 아이 때문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은 거야.
- 저 검은 머리를 봐. 마족과 한패일 거야.
“왜 그래요!? 우리 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엄마는 적극적으로 아이를 변호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썩 꺼져!! 우리 마을에서 나가!”
“저주받은 새끼들이!”
“다 너희 때문이야!”
빡.
날아온 돌이 엄마의 머리를 쳤다.
엄마의 붉은 머리가 더 진한 핏빛에 물들어 갈 때.
아이는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렸고.
엄마는 아이를 안고 도망치듯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 *
춥고 배가 고팠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엄마에겐 목표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아빠가 죽은 후부터 엄마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는데, 어딘가 사람이 바뀐 것 같기도 했다.
“발렌티아 영지로 가야 돼. 가서, 타이니…… 경을 찾아야 돼. 기억해, 리나.”
엄마는 아이에게 그 말을 각인시키려는 듯 끝없이 되풀이했다.
그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허드렛일을 돕고 먹을 것을 얻어 왔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해도 감자 서너 알을 받아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세상에 전란이 일어난 마당이라, 모두가 먹을 것이 부족해서. 미안하이.”
사람들은 아이가 알아듣지 못할 말과 함께 감자 몇 알을 건넸는데.
아이가 보기에도 너무 불합리한 일이었다.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엄마는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날, 엄마는 밤새 끙끙 앓았다.
그러면서 꿈속에서 자꾸 누군가를 만나는 것처럼 비슷한 잠꼬대를 계속했다.
“미안해. 너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는데. 아는데…….”
“……환락가 출신인 게 알려지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제발…….”
“너밖에, 너밖에 찾을 사람이 없었어. 도와줘. 제발, 특히 이 아이는…….”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듯한 말들.
아이는 그것이 싫었다.
엄마가 왜 누군가에게 사정을 하는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 때문에 때리는 것은 아빠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빠는 이미 천벌을 받았지만, 엄마가 여전히 괴로워하는 걸 보면 결국 이 상황 또한…….
‘나 때문이야.’
아이는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떠나야, 사랑하는 엄마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출했다.
계획 따윈 없었다. 그저 옆 마을로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몇 날 며칠을 걸었다.
결국 마을에 도착했는데, 배가 고파 쓰러질 무렵에 어떤 아저씨를 만났다.
“아가, 배고프지? 아저씨가 먹을 거 줄 테니까 따라올래?”
엄마는 이런 말을 들으면 절대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잡을 뻔했는데.
“안 돼!!!!”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니.
거기에는 마지막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야윈 엄마가 있었다.
“내 딸! 내 딸이다, 이놈아! 어딜 손을 대!!”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고.
그 수척한 몸으로 아저씨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퉤! 미친년이네. 하, 씨. 똥 밟은 셈 치고 간다. 너, 내 눈에 띄지 마라.”
친절해 보이던 아저씨는 곧 악마 같은 본성을 드러냈다.
흠씬 두들겨 맞은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은 채 기절했다.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
아이는 엉엉 울었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보였을까.
세상이 험한 와중에도 감자 몇 알과 과일이 눈앞에 던져졌다.
아이는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지만, 엄마가 깨어날 때까지 그것을 먹지 않았다.
엄마가 깨어난 후에도 모녀는 그 마을에 며칠 더 머물러야 했다.
엄마가 너무 아파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그늘진 나무 아래에 엄마를 눕혀 놓고 마을에 가 구걸을 하며 음식을 받아 왔다.
그나마 날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어느 정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이상한 아저씨가 찾아왔다.
“잘 씻기고 먹이면 볼만하겠는데. 혹시 일거리 필요하지 않아? 문신 봤어. 경력 있지? 애도 있는데, 먹여 살려야 하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아저씨가 이상한 손동작을 섞어 가며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들었어. 어디 멀리 찾아간다며? 그 몸으로 갈 수 있겠어? 요즘 같은 시절에, 도와줄 사람도 없을 텐데.”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서글픈 눈빛으로 한참 동안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구걸해 온 음식을 눈에 담고는 끝내 눈물을 떨궜다.
한참을 고민하던 엄마는, 다음 날 갑자기 일어났다.
“결국 이 운명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리나야, 엄마가 먹을 거 많이 가져올게.”
먹을 것을 많이 가져온다는데.
그렇게 체념하듯 말하는 표정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아이는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마.”
“응?”
“그 아저씨한테 가지 마.”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았기에 아이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엄마의 표정이 더 창백해졌다.
“리나. 설마 너, 엄마가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 아는 거니?”
“아니, 몰라.”
잠깐 안도하는 듯하던 엄마가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왜?”
“엄마 슬픈 거 싫어. 먹을 거, 내가 구할 수 있어.”
그날, 엄마는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래.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 보자.”
엄마는 왜인지 힘을 내는 것 같았고, 그때부터 다시 일을 시작하며 식량을 모았다.
그리고 모녀는 길을 떠났다.
그 길은 험난했지만,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세상도 밝아지기 시작했다.
- 마계 대전이 끝났다!
- 빛의 기사가 해냈다!
- 드디어……!
“됐어! 리나야! 됐어!”
무슨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엄마가 그 소문을 듣고 너무나 좋아하길래 아이는 따라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희망이 보이는 듯하던 모녀의 여정은 정작 목적지에 도착해서 좌절되었다.
“광휘의 기사랑 아는 사람이라고? 하, 진짜 요즘 미치겠네.”
“저, 정말이에요! 엠마, 엠마라는 이름을 대면…….”
“흔한 이름이잖아! 그리고 요즘 그런 말 하는 사람이 한둘인 줄 알아!? 꺼져, 아줌마!”
공작가의 경비병이라는 사람이 엄마를 밀쳐 냈다.
“엄마!!”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엄마를 끌어안고 우는 일밖에 없었다.
엄마는 그때부터 며칠 밤낮을 공작가 앞에서 버텼지만, 소득은 없었다.
“아줌마, 버텨 봤자 소용없어. 그리고 광휘의 기사는 엘븐하임으로 갔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정말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로 가 봐.”
그러다가 며칠을 지켜본 경비병이 불쌍한 듯 건넨 한마디에, 엄마의 눈빛이 확 죽었다.
“너무, 멀어…….”
엄마가 의욕을 잃었다.
들어 보니, 엘븐하임이라는 곳에 찾아가려면 여태 떠나온 것보다 훨씬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같았다.
서쪽으로 한참을 더 가서 무서운 오크족이 사는 곳을 지나, 더 무서운 괴물들이 사는 대수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리나,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눈빛이 꺼져 가는 엄마의 갈색 눈동자가 무서웠다.
그래서 아이는 일부러 의젓하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커서 알아서 찾아갈 거야. 엄마, 힘내.”
“힘……내?”
반문하는 엄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있잖아. 나 혼자 두지 마, 엄마. 나 무서워.”
“……그래.”
울먹이며 억지로 꺼낸 말에 엄마의 눈에 살짝 빛이 돌아왔다.
“……친하다고 했어. 발렌티아. 그럼 언젠가는…….”
그리고 엄마는 다시금 경비병에게 매달렸다.
다만, 말이 조금 달라졌다.
“일할 사람 필요하죠. 네? 나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다 잘할 수 있어요!”
“아이, 진짜! 독하네, 이 아줌마.”
경비병은 그 부탁을 끝까지 뿌리쳤다.
하지만 엄마는 몇 날 며칠을 그 앞에 죽치고 앉아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경비대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곧 각하께서 돌아오신다. 눈에 거슬리는 것들 정리하도록.”
그리 말하는 경비대장의 눈동자가 모녀를 향하자, 경비병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예, 즉각 팔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이 미친 새끼가!? 공작가 이름에 똥칠을 할 생각이냐? 몇 푼 쥐여 주고 며칠이라도 비우라고 해!”
경비대장이 버럭 화를 내는 순간.
엄마가 그 사람한테 소리를 질렀다.
“일자리를 찾고 있어요! 저 뭐든지 잘해요!”
“하…….”
경비병이 이마를 짚었고, 경비대장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다가.
“독한 여자입니다. 며칠을…….”
경비병의 속삭임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채에 손이 필요하다고 듣긴 했다. 하녀로 들여보내고, 일단 눈앞에서 치워.”
그 말 한마디에 엄마와 아이는 공작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본래의 의도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엄마는 공작가에서 일주일 정도 일을 하면서 작은 방까지 얻을 수 있었다.
“애가 있어서 특별히 주는 거야. 고마워하도록. 그리고 좀 씻고. 우물가는 저기…….”
비좁은 다락방이었지만, 오랜만에 집에서 자게 된 모녀에게 그곳의 잠자리는 편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생활이 며칠째 계속되던 날.
“엄마, 정말 그 빛의 기사라는 사람 알아?”
엄마를 도와 걸레를 빨던 아이가 불쑥 생각난 듯 물었다.
이제는 엄마가 실망해도 삶의 의욕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본 것이다.
“응. 그 애도 널 보면 좋아할 거야.”
“그 애?”
그 말에 엄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음, 지금은 애가 아니겠지만……. 상상하기가 어렵네.”
“흐음.”
아이가 못 믿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엄마가 웃었다.
“정말이야. 타이니는 나랑 에리나가 어렸을 때부터 키웠다고.”
“에리나? 나?”
“아니, 너 말고 다른 에리나.”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파아아아앙.
갑작스레 차가운 돌풍이 불며 눈앞에 사람이 나타났다.
“지금 그 말, 무슨 말이죠?”
“후아아.”
아이가 절로 탄성을 내지를 만큼 잘생긴, 반짝거리는 은발이 인상적인 기사 아저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