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에필로그 1 - 그 후의 이야기
- 마계 대전이 끝났다!
- 우리가 승리했다.
- 우와아아아!
마계 대전이 종식되었다는 선언이 에낙센의 연합군 본진에서부터 전해졌을 때.
통신구로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전달받은 각국의 지도부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나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것은 급격한 재정 소모로 하루하루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 가고 있던 제국의 내무대신이었다.
“우와아아악! 폐하! 드디어! 드디어 끝났습니다! 광휘의 기사가 마왕의 골통을 박살 냈다고 합니다!”
60대 골수 귀족 노인네가 황궁의 예법도 잊은 채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는데.
정작 그것을 지적해야 할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이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다!”
“드디어 끝났다!!”
“이제 고기 먹어도 되겠……. 크흠.”
최후의 결전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노심초사하며 대전에 모여 있던 모든 대신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그 정점에 있는 황제만은 반응이 달랐다.
옆에 앉아 있는 황후 클로이의 초조한 표정을 일견한 그가 방방 뛰던 내무대신을 진정시키는데.
“피해는?”
“남동부 해안에 해일과 지진이 몰아닥치며 산골 마을들이 박살이나 마수들이 날뛰는…….”
“그거 말고, 병력 피해!!”
“아. 아, 없습니다!”
“없다고!?”
믿을 수 없는 대답에 황제와 황후의 눈동자가 커지는데.
“결사대 중 성령 기사 갓 핸드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 한 명의 안타까운 전사 소식이 더해졌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얼굴에 미소만을 더했다.
“다행이군.”
“참으로 다행, 다행입니다. 폐하.”
이제는 제법 배가 불러 온 황후 클로이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황제를 끌어안았다.
최후의 결전 직전에 연결했던 통신.
- 믿으십시오, 황후 전……. 흐, 아니. 믿어라, 내 딸. 아빠가 이 한 몸 갈아 넣어서라도 마왕을 처리할 테니. 손주를 위해서라도.
갑작스레 새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와 짙은 주름으로도 애써 웃음을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금 떠오르며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데.
“광휘의 기사와 마도 기사, 사신과 세계수의 수호자가 대정령 카일룸을 타고 아세리안으로 오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어진 소식은 다시금 대전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정확히는 그 소식 뒤에 이어진 황제의 한마디.
“대체 무슨 보상을 내려야 하는가?”
그 말이 가져온 파장이었다.
“세계수의 수호자와 마도 기사는 몰라도, 광휘의 기사와 사신에게는 포상을 내려야 합니다. 특히 사신은 명목상으로나마 제국 소속이고, 가문의 복권이라는 명분도 있으니까요.”
“누가 그걸 모르오? 그래서 어찌해야 하냐 이 말씀이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적어도 후작위와 대영지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소이까?”
“작위야 그렇다 치고, 영지는? 영지는 어떻게 마련할 참이오?”
“황실 직할령의 일부를…….”
잠시 황제의 눈치를 보던 노대신이 슬쩍 꺼낸 말에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좋은 생각이로군. 사신이 내 직속 신하가 된다니, 앞으로는 짐의 밤이 더없이 편안하겠어. 혹시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어도 금방 사라질 테고.”
젊은 황제의 너스레에 말을 꺼낸 노대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계 대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으로 황실의 재정과 직속 병력이 엄청나게 소모되었다는 것을 핑계로 황제를 견제해 볼 요량이었는데, 그 말 한마디에 손해가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 그렇다면, 이번 재앙으로 죽은 귀족들의 땅을 합쳐서…….”
“전부 떨어져 있네. 영주가 동시에 죽은 곳도 있지만, 가문이 아예 몰살당한 곳은 거의 없으니…….”
“그럼 대귀족들이 조금씩 땅을 떼어서…….”
“필립 백작, 그대가 먼저 영지를 내어놓겠나?”
“어허! 어떻게 그런……. 흠흠.”
제국의 대신들과 지방의 대영주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상석의 황제가 냉소 어린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가운데.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비교적 젊은 대신이 슬쩍 의견을 내었다.
“차라리,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음?”
“공작, 아니 대공의 작위를 내리고, 영지는 최대한 축소해서 내리는 겁니다. 최고의 명예를 선사하되, 영지는 적당히 타협하는 방안이지요.”
“사신은 광휘의 기사와 같은 가문 소속인데, 그걸로 되겠는가? 혹시라도 그가 모르스 가문의 가주로 나서겠다고 하면?”
“그거야…….”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기사이자, 고대 마계 대전의 용사조차 실패했던 마왕 토벌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뤄 낸 당사자.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대전은 다시 한번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쯧쯧. 위기를 넘기고 나니 다시 욕심이 생기는가. 대귀족이라는 자들이 참으로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황제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대전에 모인 수십의 귀족들 대다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폐하, 그 말씀은 과하셨습니다.”
그때, 필립 폰 루센트 백작이 귀족들의 대표로서 불만을 토로했다.
사실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 황궁의 재난 속에서도 큰 피해 없이 황실을 물려받았던 젊은 황제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재앙이 있었다지만 황실의 병력은 대다수가 건재했고, 발렌티아라는 최강의 가문이 든든하게 그 뒤를 받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필립 폰 루센트는 지금 이 순간이 크나큰 후유증이 남은 제국에서 귀족의 발언권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 그래도 막대한 희생을 치른 제국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귀족의 도움이 필수였다.
‘발렌티아도 재정이 크게 소모되었고, 집계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이가 죽었다. 멀쩡한 황제라도 귀족을, 그것도 나 같은 대귀족을 쳐 낼 여력은 없어.’
발렌티아뿐만 아니다.
젊은 황제가, 아니 황실이 마계 대전을 적극 지원하며 개털이 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다.
그러니 더더욱 기회였다.
“뭣이라?”
황제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필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는 이렇게 나서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광휘의 기사가 아직 미숙하던 어린 시절, 필립의 못난 장남이 영지에서 그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못난 놈은 즉시 연을 끊고 외가로 보냈지만, 광휘의 기사와 발렌티아가 난세 속에서 위명을 더해 갈 때마다 불안하던 터였으니까.
“폐하, 여기 있는 모두가 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모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기를 꺾는 말씀은 자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심장이 쫄깃한 기분이었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향후 귀족 세력의 중심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황궁의 결계에 빌붙어 생을 연장해 볼 목적 아니었나?”
황제가 오히려 더 강하게 나왔다.
그게 어이가 없었다.
‘흥. 역시 젊은이의 혈기란 게…….’
젊은 황제가 위난을 극복하고 보니 앞으로 펼쳐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
“폐하. 군주께서 신하를 핍박하고 무시하시면, 신하들도 군주를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앞으로 제국을 수습하는 데도 지장을 줄 터이니, 부디 현명하게 판단하시어…….”
머리를 굴린 뒤, 최대한 귀족적인 화법으로 황제를 압박해 가려 하는데.
그그그그그그긍.
예고도 없이 대전의 문이 열렸다.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에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던 황제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음기를 띠고 무표정하던 황후 역시 환한 미소를 짓는 순간에는 필립 역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타이니!!”
“타이니 경!”
황후와 황제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대전을 향해 걸어 들어오는 거한이 보였다.
저벅저벅.
거의 190cm는 될 듯한 키에 거대한 워해머를 등에 멘 채 태연하게 걸어오는 검은 머리, 검은 눈의 남자.
예식용으로 갖춘 듯한 어깨 갑옷을 제외하면 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보랏빛 머리 하프 엘프와 녹색 머리 엘프의 아름다움이 잠시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선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쿵.
“마계 대전을 종식시켰음을 보고 드립니다, 폐하. 그간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황제를 향해 담담히 인사를 올리는데.
정중히 예를 표하는 모습에도, 왜인지 황제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것을 내려보는 듯한 오만함과 당당함이 묻어나는 듯했다.
필립은 그에 위축되는 자신과 주변의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타이니 경! 아무리 그대라도 이 황궁에서, 그것도 폐하의 앞에서 무기를 들고 나서는 것은 예법에 어긋납니다! 그대를 통과시킨 기사들에게 죄를 묻기 전에…….”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용기가 생기려던 순간.
슬쩍 돌아본 검은 눈동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고.
“좀 닥치지?”
바로 이어진 한마디에 대전에 한풍이 불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지만, 필립은 점점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면서도 얼어붙을 것 같은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본인은 그저 예법을 언급…….”
하지만 억지로 용기를 내서 꺼낸 그 말은.
“죽일까?”
“좋은 날인데, 한 번은 봐주자.”
싸늘한 어조로 터져 나온 사신의 한마디와, 그런 그녀를 말리는 마도 기사의 목소리에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주변의 모두가 그런 초인들의 눈길을 피하는 것을 보며, 필립 루센트는 자신이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진짜 죽을 수도 있다.’
황제는 제국의 재건을 필요로 하지만, 마왕을 처죽인 신화적인 업적을 달성한 저 영웅들은 그것에 연연하지 않음을.
황궁의 대전에서 제국의 백작을 죽이니 마니 하는데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현실이 그것을 증명했고.
“임산부 앞이다, 루나. 죽이려면 나가서 죽여.”
이어진 광휘의 기사의 한마디에, 그는 전신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자신이 생각보다 더 큰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시, 실언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 살려 주십시오. 제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박는 것뿐이었다.
‘귀찮게.’
이미 수많은 역경을 거치고 온 타이니는 중년 귀족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그가 누군지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제야 좀 쉬려던 찰나에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놈이 ‘조금’ 불쾌했을 뿐이다.
그리고 말을 꺼낸 김에, 그는 새롭게 알게 된 경사를 축복했다.
“경사가 있으셨군요, 황후 마마.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타이니. 아니, 흠. 흠. 고마워요, 타이니 경.”
아마도 클로이는 모를 것이다.
그가 가볍게 건넨 축복 한마디로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자랄 때까지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을 것임을.
굳이 생색낼 생각도 없었다.
‘이제 엘븐하임으로 떠나고 나면. 세상일에 다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그저 어렸을 때 자신의 삶을 바꿔 주었던 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또 그렇기에.
“흠흠. 그래, 승전의 보고를 그대가 직접 하는 것인가? 혹시 이제는 정식으로 제국에 귀의라도…….”
황제의 은근한 제의도 거절했다.
“제 혈육에게 약속해 주신 것이 있다 하여 동행한 것뿐입니다.”
[야, 그건 네가 받아야지! 가문 안 이을 거야!?]
뒤에서 루나가 영파로 속삭이는 소리도 깔끔하게 무시했다.
다행히 황제는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했다.
“마치 남의 일처럼 얘기하는군. 아니, 그것도 아닌가? 흠……. 그대, 떠나려는 게군.”
“예. 반려와 함께 엘븐하임에 머물 생각입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세상 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뒤에 서 있는 에스티나를 보며 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황제의 얼굴에는 슬쩍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이내 황제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었는데.
“내가 한 약속은 모르스 가문을 부활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네. 그런데 자네가 거부한다면…….”
황제와 타이니의 시선이 결국 루나에게 몰리는데.
정작 당사자는 이런 일을 상상하지 못한 듯 화들짝 놀라며 팔을 내저었다.
그러나.
“가문은 집착을 가진 사람이 이어야지.”
“뭐?”
“너는 혈육 아니냐? 네가 이어, 루나. 아르곤과 함께.”
“뭐!? 나, 나!?”
한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루나가 입만 뻥긋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그럼 결정됐네. 난 여기까지다.”
타이니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그리고 황후 마…….”
마지막까지 말투라도 예를 차리려다가 클로이와 눈을 마주친 타이니는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클로이 누나, 그럼 난 가 볼게. 혹시 급한 일 생기면 부르더라도, 웬만하면 날 내버려 뒀으면 좋겠어. 어느 정도 심각한 일은 루나나 아르곤이 해결해 줄 테니까.”
이미 예법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상황이었지만.
황제도 황후는 그런 그를 보며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만 황제의 미소에서는 후련함이 묻어나는 반면, 황후의 미소에는 안타까움이 짙게 어려 있었다.
“많이…… 힘들었어?”
그 한마디에 담긴 진심이 느껴지는데, 그런 그녀를 보면 자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클로이의 모습 위로 겹쳐 보이는 검은 머리, 창백한 안색의 여인.
그 사람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힘들었니?
‘어. 힘들었어, 누나.’
속으로만 대답했을 뿐인데, 왜인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타이니!?”
“타이니 경…….”
주변에서 당황하는 목소리들이 들렸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누나 나 해냈어. 보고 있지? 누나 동생이 세상을 구했어. 그러니까…….’
마음껏 자랑스러워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렇게 힘들게 살다 간 누나가 천국에 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걸.
삼계의 연결은 이미 끊겼으니, 영혼의 향방은 더 이상 개인이 쌓은 카르마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신위를 얻으며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욱 눈물이 나왔다.
에스티나가 다가와 조용히 등을 끌어안고.
“타이니, 괜찮아?”
루나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것을 보고서야, 타이니는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누나 대신, 클로이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어, 그래서 이제 쉬려고. 가능한 한 오래.”
대답을 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삶에 걸쳐 끝없이 싸움만 거듭해 온 생애.
불굴의 신이라는 신명까지 얻은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저 지독한 피로감뿐이었다.
“나 그럴 자격 있잖아. 그치?”
아직 미처 눈물을 털어 내지 못한 그가 태연하게 내뱉는 그 말에 소수만이 고개를 끄덕였고.
타이니는 가벼운 미소만 남겨 둔 채, 에스티아와 함께 그대로 황궁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