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새로운 신
번쩍.
하늘을 가득 뒤덮은 빛의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려오더니.
그 새하얀 빛은 그들의 앞에서 뭉쳐져 인간의 형상을 만들었다.
[타이니, 저거!]
[쉿. 우리 편이다. 적어도 천사장 아니면…….]
설마 여신일까.
타이니는 곁에 다가와 영파를 전해 오는 저릭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마왕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편에게 유리한 상황인데…….’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도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놈의 모습이 이상했으니까.
[멍청한 것들, 사멸한 여신을 부활시킨다고 뭐가 달라질 줄 알았나.]
들으란 듯이 퍼트린 그 영파는 더욱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는데.
번쩍.
이내 터져 나간 빛줄기와 함께, 그들이 있는 전장에 또 하나의 존재가 나타났다.
고대 양식의 새하얀 튜닉 드레스를 입고 거대한 지팡이를 든, 4m에 가까운 거대한 여인.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빛만이 가득하고, 머리 위에서 흘러내리는 빛나는 은발은 한 올 한 올이 성스러운 휘광에 휩싸여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임에도, 타이니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여신…….”
“이런, 만물의 어머니시여…….”
“이런 꼴로 여신을 배알하게 되다니, 젠장. 저릭,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일행이 여신을 바라보며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감동한 표정을 짓는데.
마왕은 비릿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오랜만이야. 여전히 역겨운 모습이구나, 가이아.]
그리고 그 말에 빛이 일렁이는 눈이 그를 응시하는 순간.
그녀의 옆으로 두 명의 천사가 다시 나타났다.
[진정한 이 땅의 주인!]
[창조주의 대리인을 뵙습니다!]
그레이스와 함께 나타났었던, 중갑의 천사와 장창을 든 천사.
그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허공을 땅처럼 짚으며 예를 표하는 순간, 빛을 쏟아 내던 여신의 눈에 갈색의 포근한 눈동자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포근하고 따뜻한 눈동자는 예를 표하는 천사들을 보는 순간 깊은 슬픔에 젖어 들기 시작했고.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만 지을 듯하던 여신의 표정도 이내 무참히 일그러졌다.
[어찌 이런 참담한 짓을…….]
그에 예를 표하던 두 천사 역시 표정을 구기며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이 위난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주여.]
[책임을 물으시려거든 저희에게 물으시고, 남은 생명들을 위해서라도 삼계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천사들의 영파에 듣고 있던 타이니의 얼굴도 같이 일그러졌다.
‘역시…….’
온 대륙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과 카르마가 갑자기 증발한 것이 누구의 짓이었는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더욱 열 받는 것은, ‘책임을 저희에게 물으라’고 말하는 천사의 영파에서 정작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함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천계의 천사들이라고 다 선이 아니야. 쓰레기들.’
원래도 깊지 않던 신앙이 근간부터 무너져 내리던 그때.
다시금 마왕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거 재미있네. 왜 이런 삽질을 했나 싶었더니만, 역시 네년의 추종자들한테도 끝까지 진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 같구나. 가이아.]
[닥쳐라, 마왕!]
[오직 파괴밖에 모르는 거짓된 신이! 어딜 끼어드는가!]
마왕을 보자마자 도망쳤던 얼마 전의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두 천사가 당당한 표정을 짓는데.
그들의 편을 들어야 할 여신은 더욱 무거워진 눈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에 마왕이 피식 웃음을 짓자, 그녀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종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페이션스, 템퍼런스. 그대들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어요. 섭리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어찌…….]
[이,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습니다. 신이시여!]
[아니면 어찌 저자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속죄자의 실수로 인해 다른 천사장들도 강림을 못 한…….]
너무나도 당당한 천사들의 태도에, 여신은 얼굴에 슬픔을 거두고 분노를 피워 올리기 시작했다.
[……닥치세요.]
스산하게 번지는 살기.
[그대들은 변했군요. 저는 그저 영혼으로 남아 생명이 살아갈 세계를 지켜보며 완전한 소멸을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순리를 거스른 제가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였으니까요.]
[신이시여, 하지만!!]
[그대들 덕분에 오히려 더한 슬픔과 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죄의 일부는, 그대들이 먼저 치러야 하겠습니다.]
[처벌을 하신다면 마땅히 하십시오. 하지만 그 전에 저 마왕을……!]
[나는 그를 벌할 권한이 없습니다.]
끝내 여신에게서 나온 그 말은, 듣고 있던 모든 이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오직 한 사람, 마왕을 제외하고.
[그래. 사도도 없는 네년이 지금 내게 뭘 할 수 있을까! 아주 약간이라도 날 방해한다면, 그 카르마는 세상의 더 큰 반발로 돌아올 것이다. 아예 네 손으로 천계까지 갈아엎는 꼴이 날 수도 있겠지.]
마왕의 말에 천사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데.
[아니, 지금도 억지로 그 반발을 억누르고 있는 것 아닌가? 네 종들의 만행으로 일어난 균형의 일그러짐을 말이야.]
그 지적에 타이니 역시 여신의 주변에서 공간의 일그러짐을 느끼게 되었다.
[실로 멍청한 천사들이로다. 고대의 천사장들은 그래도 머리를 쓰는 것 같았는데, 후대의 것들은 그야말로 어리석기만 하구나. 아니, 아니지. 지금 내 손에 죽은 베네피키움도 고대의 천사니까, 원래 어리석었다고 해야 하나?]
그 노골적인 비웃음에 중갑의 천사가 마왕을 향해 대검을 꺼내 들고 장창의 천사가 창을 겨누는데.
마왕이 어떤 반응도 하기 전에, 오히려 여신이 그들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대들의 죄를, 일부라도 그대들이 직접 상쇄하세요. 내가 전승시킨 힘은 내가 거두겠습니다.]
한순간 그들의 몸에서 빛의 날개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흡!?]
[신이시여!?]
천사들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한순간에 사라진 날개들과 같이 그들의 몸 역시 쥐어짜이듯 구겨지며 여신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아아아악! 저희는 그저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인데!]
[어찌, 어찌 우리를! 저희는 하등한 생명을 거뒀을 뿐입니다! 끄아아악!]
소멸하는 그 순간까지도 천사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지 못했다.
그리고.
[호오. 그걸로 반발을 메꾸겠다? 임시 조치일 뿐일 텐데?]
마왕은 여전히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공간의 일렁임이 사라지지 않았어. 정말 임시 조치일 뿐이다.’
타이니 역시 느낄 정도였으니.
여신이 마왕에게 대적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천사들이 한 짓은 그저 대륙에 재앙을 일으키며 모든 것을 망치는 자폭일 뿐이었다.
[내가 당신에게 뭘 할 수는 없겠죠, 플루토. 그리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도 없을 테고요.]
다시 전장을 바라보는 여신이 그것을 긍정하는 순간, 타이니와 저릭, 실버 팽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그레이스마저 사라진 마당에, 이대로라면 여전히 마왕에 비해 전력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알면 조용히 꺼져라, 순리를 거역한 배덕자. 아니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세상의 반발을 더 겪어 보든지.]
히죽 웃는 마왕의 미소는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분노한 여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길 정말로 바라고 있다.’
진짜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여신의 눈이 타이니를 향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파편은 다르지요.]
번쩍.
여신의 눈이 번뜩이는 순간, 그는 한순간 영혼의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운명의 파편에 여신이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다.
- 아버지가 남긴 파편은 본능적으로 상위의 차원을 향하게 하지요. 하계의 존재를 오염시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제가 제거해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그 정도면 충분하겠죠? 온전한 신위에 닿으려면 말이죠.
- 나의 반려……라고 불리는 인간의 영웅이여.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여신의 영파.
그 전언에는 흐릿한 웃음기까지 담겨 있었고.
그 순간 타이니는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영혼의 목소리들을 다시 뚜렷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기도’하는 목소리들을.
- 이게 무슨 재앙인지……. 여신이시여, 신의 기사시여. 이 시련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 여신이시여, 여신의 반려시여. 부디 이 위난을…….
- 바라고 바랍니다. 빛의 기사시여, 마족이 일으킨 이 끔찍한 재앙을 극복하도록 저희에게 용기를…….
[뭐? 흥. 이미 파편을 써 버린 놈이 아니던가. 덕분에 완전한 신성에까지 거의 닿은 듯하지만 어차피 세상의 섭리는 허용하지 않을 듯하니, 곧 내게 죽을 놈이다.]
[과연 그럴까요?]
천사들이 일으킨 미증유의 재앙을 마족의 짓으로 인식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를 올리는데, 터무니없게도 그 기도의 삼 분의 일 가까이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허. 어떻게…….’
이유를 파악할 틈도 없이, 한순간에 영혼이 고양되며 영격이 상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알았다.
아까부터 자신의 기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던 힘은, 희망의 빛이 아니라 그 염원들이 만들어 낸 카르마였다는 것을.
하지만 또 깨달았다.
‘마왕의 말이 맞아.’
자신은, 아니 인간은 온전한 신위에 닿더라도 그 격을 유지할 수 없음을.
이 중간계에서는 더 이상 신성이 탄생하는 것이 ‘허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우웅.
여신에 의해 변질된 운명의 파편이 다시 존재감을 피력했다.
이전처럼 ‘힘을 주겠다’, ‘받아들여라’ 등의 오만한 의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온전히 자신이 도움 될 수 있음을 알릴 뿐.
타이니는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발판으로.’
그는 지금 자신이 얻은 신위를 잃지 않게 만드는 든든한 발판으로써 운명의 파편을 활용했다.
그리고.
번쩍.
자신의 영혼 속에서 빛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온전히 완성된 신위와 그 권능을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마왕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한껏 기세를 끌어올린 여신이 그의 주의를 끌고 있는 것이었다.
[왜? 무슨 짓이라도 해 보려면 해 보지?]
그에 자신을 바라보며 슬쩍 미소를 지은 여신이 다시금 하늘 위까지 닿는 광대한 빛의 기둥을 세웠다.
번쩍.
우우우웅.
[푸하하하. 정말 미쳤구나, 가이아. 진짜 힘을 쓰려고!?]
그 도발에 여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플루토.]
[뭐?]
[내 사도는 아직 살아 있답니다. 남은 힘은 그에게 보태 줄 수 있겠지요.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무슨…….]
번쩍!
한순간 퍼져 나간 빛살이 사라진 자리.
고대의 용사보다는 못하지만, 당대의 전성기보다 훨씬 강한 빛살을 뿜어내는 크롬벨이 마왕을 바라보며 투지를 빛내고 있었다.
[네놈!? 어떻게 아직도……!]
마왕조차 경악하는 순간.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끝까지 미친 짓을 하는구나, 가이아!]
마왕의 분노 섞인 말과 함께.
여신의 주변에서 일렁이던 공간은 그대로 그녀의 육신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크롬벨, 나의 사도여. 그리고 인류의 영웅들이여. 뒤를 부탁합니다.]
온몸이 바스러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여신이 허무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갈 때.
“죽여 주마, 마왕!”
푸른 눈으로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용사의 반대쪽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의 신이, 검은 눈동자를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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