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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490화 (490/500)

490화. 광신도의 선택

‘내가 이렇게 무력했던가…….’

갓 핸드는 속죄자의 삶이 시작되던 시절에도 겪어 보지 못한 심대한 박탈감과 무력감에 휩싸였다.

우우우웅.

“쿨럭.”

성물의 힘 덕에 마왕의 마법은 조금씩 풀리고 있었지만.

몸이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은 떨칠 수 없었다.

무엇보다.

- ……사멸한 여신의 종자야.

마왕의 그 한마디가 그의 온 정신을 뒤흔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은 적을 기만하여 농락하는 술수라 여겨야 옳다.

하지만 8단계 성자급 신성력을 가진 그는, 마왕의 정신파에 담긴 ‘진심’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여신께서 사멸하셨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마왕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아마도 놈은 그 한마디로 갓 핸드가 무력화될 것도 알고 있었을 터.

그럼에도 그는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럼 내 속죄는? 내 인생은……?’

이백 년의 세월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이 그 무엇보다 컸던 것이다.

‘그냥 이대로, 죽는 게 낫겠다.’

한순간이나마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그런데.

- 반드시,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주마!!!

누가 봐도 밀리는 것이 확연한 상황에서 고함까지 지르며 악을 쓰는 광휘의 기사와.

- 끼루루루루루!

콰아아아아앙!

흐릿해져 가는 정령으로, 답지 않게 근접전까지 시도하며 화살을 쏴 대는 세계수의 수호자.

거기다.

“갓 핸드 경, 빨리 나를 회복시키세요. 당장! 기력이라도 빨리!”

“마나 소모로 인한 회복은 아무리 성법으로도…….”

“닥쳐!! 내 수명을 다 갈아 넣어서라도 되게 만들 테니까! 당장!! 어떻게든 해 보라고!!!”

평상시의 예의는 내팽개친 채, 눈앞에서 광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닦달하는 ‘늙어 버린’ 검제.

그들의 모습이, 이미 의욕을 상실한 자신과 지나치게 대비되고 있었다.

‘이치들은 대체 뭘 얻기 위해 이렇게까지…….’

멍한 눈으로 이미 생명을 잃은 동료들과 잃어 가는 동료들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문득 광휘의 기사와 나눴던 한 달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 영감님, 200살 넘어서 사춘기 왔어요?

- 당연히 인간을 택해야죠. 여신께서도 인간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흐름을 트셨다는데, 그것이 여신을 위한 길이 아닐까요?

- 아, 물론 저는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만요.

- 내가 내 힘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킨다. 멋지잖아요?

- 아니 뭐, 절 생각 깊게 하는 놈으로 보셨습니까? 저 단순합니다.

‘단순하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당신 뭐 하는 거냐고, 지금!! 정신 안 차려!?”

와락 멱살을 잡은 검제의 손을 뿌리쳤다.

“놓아 주시오.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당신……?!”

마지막으로.

그 한마디에, 벌겋게 달아오른 검제의 눈이 살짝 떨렸다.

그리고.

갓 핸드는 사방에 나뒹구는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왼손은 오른손 건틀릿 안에 장비한 권갑을 만지고 있었다.

- 마왕을 막을 수 없다 여겨진다면, 성물과 함께 제물을 바쳐라.

- 가장 강력한 초인,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초인을.

그 신탁이 가리키는 제물은 누가 봐도 광휘의 기사일 것이다.

하지만.

‘여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에게 신탁을 받은 걸까.’

문득, 용사 크롬벨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지나가듯 우울한 어조로 뱉어 내던 한마디가.

- 여신께서는 나를 잊으셨나 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사실 이상하긴 했지.’

고대 마계 대전에서도 끊임없이 여신과 소통하며 그 권능을 빌려 썼다는 사도.

그 사도가 멀쩡히 존재하는데, 왜 교황이나 자신에게 신탁을 내리는지가 늘 의문이었다.

그러나 마왕의 말대로, 여신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여신을 모시는 천사장들의 신탁이었던 거야.’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편해졌다.

‘역시, 여신께서 그럼 참담한 신탁을 내리실 리 없어.’

신은 완전하나 그 종들은 완전하지 않을 터.

설령 그것이 칠극이라 불리는, 선의 극치를 상징하는 일곱 천사장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신탁을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멍한 눈으로 쓰러진 동료들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나의 죄는 오직 여신께서만 사해 주실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삶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 우리는 인간입니다. 신 이전에, 같은 인간을 지켜야지요.

광휘의 기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마 그건 자신이 광신도를 벗어나 인간을 지키는 성기사로서 활약하길 바라며 했던 얘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광신도이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답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 확답을 해 줄 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스로 답을 찾을 수밖에.

다행이라면, 지금이 딱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어머니 여신의 이름으로 기원하나이다…….”

우우우웅.

전신에 모인 신성력이 온몸을 통해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를 여는 것이 느껴진다.

좌절의 끝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니 정신이 더욱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과거에 지은 죄는 그 무거움을 추산할 수조차 없다.’

교회를 타락시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수한 사람을 절망에 빠트리고 세상에 독을 뿌렸다.

그 죄의 무게를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죄이건 간에, 세상을 구하는 공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물론 자신이 직접 그런 공을 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체가 될 수 있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면.

‘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그러기 위해서라도.

‘여신이시여. 당신이 듣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종은 그 뜻을 끝까지 따르고자 합니다.’

나는…….

“……마지막까지 광신도로 남아, 광신자만 할 수 있는 일로 저의 죄를 씻고자 합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여신이시여.”

2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자의식 가득한 기도.

하지만 몸 안에 가득한 신성력은 그 막무가내 기도문에 그대로 응답해 주었다.

우우우우웅.

하늘 위로 더욱 강한 빛살이 솟구치기 시작할 때.

갓 핸드는 오른손 건틀릿을 벗고, 그 안에 착용한 권갑을 꺼내 들었다.

우우우웅.

- 광휘의 기사를 제물로 삼아 우리를 소환하라!

- 제물의 업이 크면 클수록, 더 큰 기적과 함께하리니.

- 그 힘은 능히 마왕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진동하기 시작한 동대륙의 성물은 마치 신탁의 그 목소리를 전해 주는 듯했다.

그것을 보며 갓 핸드는 신탁을 통해 전해진 성법,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제물의 술식을 발동했다.

그리고.

“어머니 여신이시여. 저는 저를 제물로 삼아 속죄를 청합니다.”

그 대상으로 스스로를 지정했다.

우우우우웅.

그 순간 그의 몸이 성스러운 불꽃에 휘감겼다.

화르르르륵.

모든 감각이 공간에 녹아들 듯 사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따라가기 힘든 전투조차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갓 핸드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악을 쓰며 투지를 불태우는 광휘의 기사와.

창백한 안색으로 피를 토하며 연신 화살을 쏘아 대는 세계수의 수호자.

그들의 처절한 모습을.

‘도와야 한다.’

동시에, 갓 핸드는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차원의 문을 열고, 천사장들을 소환한다.’

성물과 자신이 이백 년간 쌓아 온 업.

그것은 자신의 상상외로 컸다.

여신, 아니 천사장들의 신탁을 수행하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꼭 그렇게 쓸 필요는 없다.’

갓 핸드는 그보다 더욱 좋은 활용 방법을 떠올렸다.

아니, 스스로를 제물로 삼으려 했을 때부터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의 시선이 지상에 나뒹구는 동료들의 시체를 향했다.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까운 인재들.

대마도사 솔레인도 감탄한 마법의 천재이자 오러익시더, 광휘의 기사를 제외한다면 단연코 이 시대 최고의 재능이라 할 수 있는 마도 기사.

불가사의한 힘으로 죽음을 집행하는 여인, 초인 중에서도 그 누구보다 살업에 능통하고 그 누구보다 많은 마족을 죽인 사신.

오크의 대전사로서 젊어서부터 수많은 전장을 넘나들며 오크의 명예를 지켰고 마계 대전에서는 최전선에서 모든 공격을 앞장섰던 워로드.

마찬가지로 인류 연합을 최전선에서 이끌었던 용맹한 수인족의 대장군이자 최강의 전사, 문나이트.

‘쓸모없는 나보다야…….’

어느 쪽으로 봐도 뛰어난 인재들.

이런 인재들을 이렇게 허망하게 놓아 보낼 수는 없었다.

갓 핸드는 신탁의 주문을 외기 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하지만 평생 써 보지 않았던 주문을 먼저 외우기 시작했다.

우우웅.

“……내 모든 것을 바쳐, 기적을 바라옵니다.”

자기희생 주문.

부활.

번쩍!!

소멸하는 성물, 그 최후의 힘이 더해진 새하얀 빛이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 퍼져 간다는 느낌이 들 때.

파지지직.

마도 기사의 뚫린 가슴이 메워지며 그 심장이 새로 생성되었다.

“후으으으.”

이내 그가 푸른 눈을 뜨며 심호흡을 시작했고.

우드득.

목이 으스러졌던 사신도 뼈가 맞춰지며 다시금 숨과 생명이 깃들었다.

“후읍!”

반쯤 부서져 있던 문나이트의 몸은 시간을 거스르듯 다시 달라붙었고, 수인족의 그 광기 어린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으으윽.”

마찬가지로 가슴이 꿰뚫렸던 오크의 대전사도 신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상공에서 싸우는 광휘의 기사와 세계수의 수호자의 몸에도 짙은 활력이 전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곧이어 성물을 얻은 본래의 목적대로 천계의 문을 열기 위해, 갓 핸드는 남은 힘을 모았다.

물론 본래의 목적보다 훨씬 작은 문일 테고, 또 천사들이 얼마나 내려올지는 모르겠지만.

‘천사장들이여, 부디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길…….’

번쩍!

남은 힘을 다해 하늘 위로 쏘아지는 빛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

[이런 미친……!?]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마왕의 서늘한 영파가 그의 정신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됐다!’

불타오르는 몸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기적을 이뤄 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희열 속에서 환호하던 그때.

그는 신성력이 빠르게 소모되면서 머릿속을 꽉 막고 있던 무언가가 함께 소멸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속죄의 길을 명한 여신의 진짜 뜻을.

- 너를 희생하여 다른 이를 살릴 마음을 먹는다면, 내가 친히 너를 다시 천계에 거두겠다.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속죄.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갓 핸드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직 자신의 죄만을 머릿속에 새겨야 하는 속죄의 형벌을 받으며 잊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오랜 세월 잊고 있었던 자신의 이름이 생각났다.

‘아……. 그래, 그랬었지. 내 이름.’

그 이름은 자연스레 가문에 대한 생각으로 옮겨 갔다.

자신이 형의 팔을 잘라 버린 이후, 제국에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던 가문.

자신의 이름을 잊어 가면서도 가문의 이름만큼은 억지로나마 기억하려 했었는데.

결국 멸문했다는 소식을 끝으로 그 기억조차 지워졌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름과 함께 잊었던 가문이 다시 생각났고.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며, 상공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또르르 흘러내린 눈물이 불타오르는 성화 속에서 가볍게 증발했다.

그는 2백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힘으로 투구를 벗었다.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한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데.

“여신이시여. 저, 가일 모르스……. 이제 당신께 돌아갑니다.”

갓 핸드. 아니, 가일 모르스는 참회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모두 하늘을 향해 쏟아 냈다.

눈앞에 비치는 찬란한 빛이 인류의 미래가 되길 바라며.

저 하늘에 있는, ‘형님의 먼 후손’이 항상 말하던 대로.

- 인류를 위하여!

“당신이 아닌, 인류를 위하여…….”

마지막 말을 남긴 그의 몸은, 빛살처럼 부서져 세상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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