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영감님……?
‘조금 더, 조금만 더…….’
크롬벨은 자신의 몸 안에 모일락 말락 하는 미약한 마나에 정신을 집중했다.
마나의 씨앗을 만들어 본 것은 거의 2천 년 전의 일.
체감상으로도 수십 년도 더 전이기에 가물가물했지만, 지금은 영혼이 가진 격이 당시와 달랐다.
‘할 수 있어!’
나태를 소멸시키기 위해 신화급 마법을 사용했을 때, 가진바 모든 힘을 뿌리까지 뽑아내느라 영혼의 그릇인 육체마저 망가질 뻔했다.
다행히 타이니를 비롯한 여러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회복하긴 했다.
하지만.
‘곧 최후의 싸움이 다가온다.’
그 싸움에서, 그저 머리만 굴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신의 사도로서 권능을 마음껏 휘두를 때도 버거웠던 적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 다시 마나의 기초를 쌓는다고 해서 그때까지 제대로 된 전력이 되진 못한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확고한 동기가 있었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녀에게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싸움이 끝난 후, 이 세상 어딘가에서 고난을 겪고 있을 그녀를 찾아내서 보호한다.
‘반드시.’
다행이라면, 나태에게 신화급 마법을 사용할 때 골수까지 파고들었던 마기와 그 전부터 강제로 영혼에 각인시켰던 마인드 킬링의 수법이 모두 지워졌다는 것.
그것은 그가 기존의 깨달음을 가지고 순수한 몸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솜누스나 타이니와 같이 그간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힘을 쌓아 올릴 토대가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그들처럼 시간을 거스른 것이 아니기에, 이 시점에 이미 최종 결전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집중!’
심장에 뿌리를 담고 전신으로 줄기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나무를 심상에 그린다.
하나의 나무지만, 그 나무에서 열릴 열매는 4가지.
상상으로만 만들어 왔던 신체 내부의 이능 엔진.
‘위그드라실.’
본래 하나하나 따로 익혔었던 4가지 힘을 동시에 묶어 기본 틀을 잡는다면, 전과 같은 경지에 다시 이르렀을 때 전투 효용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마법과 마나, 신성력과 정령의 힘을 의지에 따라 시간이나 에너지 낭비 없이 전환하게 해 줄 새로운 이능의 엔진, 상상 속의 세계수가 그의 심장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기대되는 효용성만큼 경지의 상승이 힘들어지는 방법이겠지만, 그에게는 이미 닦아 놓은 길을 가는 것일 뿐이다.
우선 마나의 씨앗을 만들고.
우웅.
그 마나의 씨앗에 대마도사의 깨달음을 담아, 전 속성 전환과 효율성 극대화의 패턴을 짜 넣으며 싹을 틔웠다.
우우우우우.
그리고 거기에.
- 끼루루.
정령 오투스의 힘을 쏟아부어 전신으로 줄기를 뻗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신체의 말단까지 뻗을 가지를 맺을 신성력이…….
‘어!?’
……문제가 생겼다.
‘신성력이 모이지가 않아…….’
어째서?
우우우웅.
당황스러운 마음에 기껏 모은 마나 시드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그는 애초에 성기사 출신으로 용사가 된 이가 아니었다.
위난을 극복해 가며 여신에게 선택을 받았던 사도.
그랬기에 그의 신성력은 어떤 사제보다 진하고 성스러웠으며, 강력한 효과를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신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본디 작은 기도만으로도 차오르던 신성력이 왜인지 한 톨도 모이지 않았다.
‘왜? 설마…….’
그분이 정말로 나를 버리신 것인가.
이제 쓸모없어졌다고?
‘그럴 리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우우우웅.
‘내가 버림받았다고? 이제 와서?’
그의 마음이 동요함에 따라, 간신히 심장에 자리를 잡아 가던 위그드라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드득.
“크윽…….”
한순간에 역류하는 에너지가 간신히 수습한 육체를 다시 망가트려 갔다.
그리고 그때.
“얜 또 왜 이래? 거참…….”
갑자기 그의 등에 와 닿는 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은 한순간에 그의 상태를 파악한 듯했다.
“흐음, 이거 괜찮네. 크롬, 약간이면 되지? 신성 말이야. 정말 티끌만큼만 덜어 줄 거야. 더는 안 돼.”
젠장, 전이를 정말 쓰게 되네.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크롬벨의 몸, 아니 영혼 안쪽에 그야말로 티끌만 한 빛이 떨어져 내렸다.
넘치는 신성력과 비교할 수도 없는 작은 힘.
하지만 그것은 신에게 빌린 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의 본질 그 자체였다.
‘신성이……. 분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는 거였던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흔들리던 마음을 다시 다잡은 크롬벨은, 그 티끌 같은 신성을 위그드라실에 더했다.
그 결과.
우우웅.
본래의 의도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쿼드러플 이능 엔진, 위그드라실이 그의 온몸에 온전히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아.
아직 고작 1단계일 뿐인데 상서로운 빛을 전신으로 뿜어낼 정도의 효과.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후으으읍.”
크롬벨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에 영파가 울려 퍼졌다.
[신성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이제 네 카르마가 저절로 네게 흡수될 거야. 그렇다면 경지의 회복도 빨라지겠지? 크롬, 이걸로 나태의 정보 알려 준 빚은 갚았다. 아, 그리고 마왕 정보도 좀 알려 줘. 그걸로 퉁 치자고.]
피식.
“크롬이 아니라……. 하. 이 빡대가리…….”
처음으로 욕설까지 섞인 반말이 나왔지만, 그런 크롬벨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아르곤, 괜찮아?”
“……응.”
괜찮다 대답하는데도 표정이 영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루나는 그런 아르곤을 위로할 만한 말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에게 등을 맞대고 주저앉았다.
자신의 체온이 그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움찔하던 아르곤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독백하듯 다시 말을 꺼냈다.
“……고아원에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무서운 사람인 줄 알았어. 정말 차가워 보이는 아저씨였거든.”
뜬금없는 말이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고, 말수도 적은 데다가 신기한 힘을 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갑자기 나한테 재능이 있다면서 제자로 삼겠다고 했으니.”
하…….
“무서워서 안 하려고 했는데, 원장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모두 좋은 기회라고 부추겨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어. 그게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또다시 작게 토해 내는 한숨 후에 이어진 말은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공부를 시키러 데려온 애가 매일 엄마만 찾으면서 우는데, 그 무뚝뚝한 아저씨가 표정 변화도 없이 안고 달래면서 재워 줬어. 아이가 더 이상 울지 않을 때까지. 매일, 매일같이……. 흐읍.”
일그러진 아르곤의 얼굴에 기어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는데.
그는 울먹이면서도 하소연하듯이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아이는, 그 품이 너무 포근했었던 거야. 그래서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물었어. ‘혹시 아빠예요?’라고. 아빠 얼굴은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아빠?”
“응. 그때 차갑게 굳은 얼굴을 보고서야 아이가 흠칫했어.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거든. 그런데 그 사람의 대답이 의외였어. ‘네가 원하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단 우리 둘만 있을 때만.’”
“그랬구나…….”
“그 사람은 그 후로도 꾸준히 냉담한 표정으로 아이를 한없이 챙겨 줬었어. 아, 물론 공부할 때는 제외하고 말이야.”
흐읍.
억지로 숨을 크게 들이쉬어 보지만.
“하지만 그때 이후로 아이는 단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어. 혹시라도 내쳐질까 봐. ‘스승님’이라고 꼬박꼬박 호칭을 붙였지. 그때 그 아저씨 얼굴이 왜인지 더 굳은 것 같았는데, 그때는 몰랐어. 한참 자란 다음에나…… 알았지.”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스승님에겐 원래 내 또래의 아들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은 사건 때문에,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혹한의 마도사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그때 그 아저씨는, 스승님은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데…….”
“…….”
“다 크고 나니, 오히려 아빠나 아버지라고 부르기가 더 힘들더라. 언제고 정말 스승님이 늙고 힘들어지시면, 그때 확실히 말씀드리고 아들로서 모시고 살아야지. 그 생각만 하고 있었어. 생각만…….”
등의 떨림을 느낀 루나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을 때.
아르곤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직전에, 그러시더라. 잘 자라 줘서 고맙다고. 내 아들…… 아, 아들. 아들이라고……. 으으읍. 흐윽.”
끄으으.
그의 악다문 입술에서 신음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오는데.
루나는 그 등을 조용히 안아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
“……나, 꼴사납지 않아?”
벌게진 눈으로 자신을 마주하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아르곤을 향해, 루나는 담담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정말?”
“응. 멋있어.”
“……거짓말.”
“응.”
“뭐?”
“거짓말 맞다고.”
“……푸흡. 크, 크크크큭. 푸하하하하!”
울었다가 웃었다가. 정말 미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심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아르곤.
그리고 그런 그의 등을 토닥이는 루나의 모습은,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어떤 이가 혀를 차게 만들었다.
“두들겨 패……서 어떻게 하기는 너무 늦었나? 씁…….”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는 조용히 기척을 남기지 않고 돌아섰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서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의 목록이 또 하나 지워지고 있었다.
최후 결전 준비 중, 마법쟁이 멘탈 회복 완료.
* * *
“……어쩌면 나라면, 웨폰 마스터를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목례만 하며 스쳐 지나가려던 순간, 갓 핸드의 그 말이 타이니의 발목을 잡았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생명을 태워서 회복시켰다면, 그는 살아났을 거요. 대신 내가 죽었겠지만.”
한순간 얼굴이 굳어지던 타이니는 그제야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 또, 무슨 말이라고. 헛소리 마시고 전투 준비나 하세요, 성기사 영감님. 아무도 그런 걸로 당신 원망 안 해.”
그대로 다시 발길을 돌리려는데.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웁니까?”
또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웬만하면 무시하고 싶은 헛소리였지만, 갓 핸드는 믿음직한 동료이기 이전에 신전 세력의 중심.
크롬벨의 말에 의하면, 나태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멸마의 빛은 마왕에게도 써먹을 만한 공격이었으니.
핵심 전력이 될 동료의 의미심장한 질문을 마냥 한 귀로 듣고 흘릴 수는 없었다.
“……그거야 당연히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지요.”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굳이 뱉어 내자니, 괜히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고작 그겁니까?”
투구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살짝 보이는 눈빛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이라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딨습니까?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그리고도 여유가 나면 그 밖의 사람들도 돕는 거 아닙니까?”
“당신은…….”
“나야 그 여유가 넘쳐 나니까 세상까지 지키겠다고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고 말입니다. 뭐, 안 하면 나도 죽을 것 같아서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신이 없군요. 확실히.”
그 뜬금없는 대답은 타이니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회귀자라도 여신의 신도는 맞습니다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흐.
투구 속에서 토해 낸 갓 핸드의 한숨이 어색한 공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뒤에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신과 인간 중 어느 쪽을 택할 겁니까?”
그로서는 고심 끝에 나온 신중한 질문이었는데.
타이니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되물을 뿐이었다.
“……영감님, 200살 넘어서 사춘기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