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여신이 무슨 대가를……?
“이런 씨…….”
타이니의 입에서 자연스레 욕설이 튀어나왔다.
녹턴을 통해 꿀렁꿀렁 흘러들어 온 나태의 신성 일부와 권능이 반갑지도 않았다.
홧김에 때려죽이기는 했는데, 벌여 놓고 보니 아차 싶은 것이다.
- 날 죽이면, 그분이 바로 강림하실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이해가 갔다.
일곱 명의 장군들을 모두 쳐 죽이면 바로 강림하던 칠죄종.
그것과 비슷한 수법이 마왕한테도 걸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젠자아아앙!”
조졌다.
물론 나태를 때려죽인 것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칠 대로 지친 이 상태로 마왕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 불안할 뿐.
그러다가 곧, 타이니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았다.
칠죄종이 하나 더 남았다는 것을.
‘분노, 그 벌레!’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또다시 노을빛 유성이 되어 동쪽 하늘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우르르르릉.
그 길을 가로막은 몇 개의 산 중턱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버리면서.
그리고 곧.
“이런……!!!!”
에낙센의 해변에 놓인 거대한 벌레를 두고 벌어지는 인어족과 인류의 전쟁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다행히.
“크락투스!”
인어족들도 학습 능력이 있는 것인지, 이번에는 오랜 시간 억지로 버티려 하지 않았다.
* * *
꽈아아아아아앙!
[여왕의 원수,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 길지 않은 싸움 끝에, 인어족들은 의식 공유로 뻔한 소리를 남겨 놓고 일제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광휘의 기사!”
“여신의 반려!! 윽!?”
홀로 인어족을 쫓아낸 타이니는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 와중에 여신의 반려라고 소리치던 이들이 뒷목에 작은 나뭇가지가 박히며 기절하는 광경도 보였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직전의 전투에서 슬쩍 써 보았던 권능, ‘게으른 시간’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이거 나랑 안 맞아. 젠장.’
불굴과 함께라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것 같았던 나태의 권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던 그도 이내 동산만 한 거대한 벌레, 분노의 본체를 난도질하려는 기사와 성기사들을 보는 순간에는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멈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살벌한 기세를 품고 아군을 찍어 눌렀다.
“……이놈을 죽이면 마왕이 바로 강림한다?”
파리하게 질린 병력들의 시선을 받으며 검제가 타이니를 향해 물었다.
“그렇다니까! 장군들을 죽였을 때 칠죄종이 강림한 것처럼!!”
타이니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왼팔까지 사라진 검제를 보면서도 배려 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상황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악마를 살려 둘 수는 없소이다!”
“여신의 대적자를……!”
의식을 잃은 마충의 군주, 분노를 당장이라도 난도질할 듯 노려보는 신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그들의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싼 다른 병력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원수를 갚자!”
“내 친구……!”
“내 가족을 죽인……!”
전장에서 많은 것을 잃은 병사들의 분노가 여기저기에서 새어 나오는 가운데.
“못 들었어!? 마왕이 강림한다고!!!”
타이니는 그 많은 이들의 감정을 한순간에 꺾을 만큼 큰 목소리를 다시 한번 토해 냈다.
그리고 그 쩌렁쩌렁한 고함이 전장의 소란을 잠시 억누르는 순간.
검제의 고개가 자연히 뒤로 돌아갔고, 수뇌부들도 그를 따라 창백한 안색의 크롬벨에게 시선을 모았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크롬벨 경?”
“고대에는 없었던 일입니다만…….”
기대에 찬 시선들을 한몸에 받은 크롬벨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때는 장군들을 죽인다고 해서 칠죄종이 강림하는 일도 없었으니까요.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태가 살기 위해 한 변명일 가능성은요?”
“음……. 그 역시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었으니까요.”
크롬벨은 멍한 눈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의 심리에 관심이 없었다.
“만약 그 말이 거짓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저 칠죄종을 죽이고도 마왕이 바로 강림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고대의 마계 대전에서는 마지막 오만이 강림한 후 7년 뒤였습니다.”
“7년 후?”
“하, 씁. 이놈의 세상은 그놈의 7을 너무 좋아해.”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지만…….”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미동도 없이 늘어진 거대한 동산만 한 벌레의 몸뚱어리를 향했다.
그리고 대다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으, 몇 번 봐도 끔찍하군요.”
그저 그만한 크기의 곤충이라 해도 공포스러울 텐데, 일곱 개의 꼬리에 일곱 개의 뿔까지 달린 분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였다.
더구나 얼핏 보기에도 윤택이 흐르는 놈의 갑각은 기사들의 마나블레이드로도 상처가 나지 않으니, 그것을 뚫으려면 신성력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파괴의 권능인 오러를 쓸 수 있는 초인들 대다수가 탈진 상태였으니까.
“저걸 7년 동안 살려 두면서 지킬 자신 있습니까? 그래도 칠죄종인데?”
“애초에 대체 기절은 왜 한 겁니까? 대악마가.”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교황에게 몰렸다.
그러자 교황은 대머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멸마의 빛 때문인 듯한데…….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르곤 경의 영감이 만들어 낸 새로운 신성 마법이라.”
또 자연스레 옮겨지는 시선.
창백한 안색의 아르곤이 우울한 어조로 답했다.
“……신성력에서 마기의 상극이 되는 효과만 극대화해서, 물량으로 때려 박은 겁니다. 실제로 적용된 마법적 패턴 설계는 8서클의 대마법 광자…….”
“간단히 부탁드립니다, 아르곤 경.”
“……아, 예. 그러니까, 음. 일시적 탈진으로 인한 쇼크로 기절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었다면 한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잃고 죽었을 텐데, 놈은 무언지 모를 수법으로 생명을 건지는 대신 동면 비슷한 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동면이요? 겨울잠? 우리가 아는 그거?”
“마계의 벌레는 동면도 합니까?”
“지상의 곤충 중에도 동면하는 종이 있……. 아니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그런 것 같다는 추측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지금 인류의 중대사를 앞두고……!”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저를 구하기 위해서!!”
아르곤을 붙잡으려던 얀센 추기경이 갑작스러운 고함에 멍해지다가, 이내 안쓰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타……!”
하지만 그가 채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아르곤의 고함이 이어졌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저는 저 타이니처럼 머릿속까지 근육이 박힌 게 아니란……!”
연신 고함을 지르던 아르곤은 이내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말끝을 흐렸다.
흘깃 돌아본 곳에 자리한 것은, 마찬가지로 창백한 안색의 루나.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루나의 모습을 본 아르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 흐.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루나의 팔조차 탁, 하고 쳐 내며 돌아서는 아르곤을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다.
“저 새……. 하, 씨…….”
혼자 울컥한 타이니마저 그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크흠, 그럼 결정을 해야겠군요. 설령 그 나태가 죽어 가면서 허풍을 친 거라 해도…….”
“일말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모두가 지쳤어요. 회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검제의 말을 에스티나가 바로 받았고,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는 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광휘의 기사를 제외하고는 최강이라 평가받는 두 초인 검제와 워로드가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 확 늙어 버린 것이 눈에 보이는데, 누가 그 말에 반박할 수 있을까.
한순간에 모여든 시선에 검제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때.
제나스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바로 말을 보탰다.
“각하. 팔은 회복하실 수 있을 거라고, 교황 성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
“저와 추기경들이 힘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물론 단련을 좀 하셔야겠지만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다행이긴 한데, 내가 웃어도 될지 모르겠구나. 친구가 죽은 마당에…….”
억지로 분위기를 띄우려던 제나스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듣고 있던 타이니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무기 영감이 진짜 죽은 거야? 추기경들이 달라붙는 걸 봤는데?!”
일그러진 얼굴에서 살기까지 뿜어져 나오는데.
교황과 나이 먹은 추기경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자, 젊은 추기경 드루이가 먼저 나서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태의 공격에 심장이 꿰뚫리셨습니다. 모든 힘을 마충 군단을 소멸하는 데 쓰신 상태에서, 어떻게 북돋을 생명력도 부족…….”
“어떻게든 했어야지! 대체 너희가…….”
“타이니, 그만! 추기경님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건 분명해.”
“……칫, 젠장. 거, 거 미안하게 됐수다. 젠장.”
쾅.
검제의 말에 억지로 화를 삭인 타이니가 자리를 박차고 돌아설 때.
“일단 성법으로 벌레 군주를 봉인해 놓고, 장례식부터 치릅시다. 아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몸을 회복하기 전에 모두의 정신부터 위로해야죠.”
잔잔히 흘러나온 검제의 목소리가 돌아서던 그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 주었다.
* * *
“하늘에 계신 우리 주, 자애로운 여신께 아뢰오니…….”
교황의 주도하에 열린 성대한 장례식.
사상자들의 시체를 모아 나뭇더미 위로 겹겹이 쌓아올린 탑을 신전의 사제들이 돌며 축성하고 있었다.
“하늘 가는 밝은 길이~♬♪”
그 움직임과 성광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타이니에겐 그 광경이 눈에 들어 오지가 않았다.
‘회귀한 후 동료들을 모두 지키겠다 약속했는데. 무기 영감, 미안합니다.’
그는 화장(火葬)을 위한 탑의 가장 위에 있을 동료의 시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번 숙인 고개는 태산처럼 무거운 무게에 눌린 듯 좀처럼 다시 들어 올려지지 않는데.
그때, 등 뒤에서 따스하게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전생보다 한결 가까워진 동료. 아니, 연인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 따스한 목소리만큼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안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
“이 모든 재앙을 극복하고 나면, 그리드 경도 웃으면서 축복해 줄 거야. 아니, 이미 천계에서 우리 보고 있을걸? 힘내라고.”
“그럴까?”
“그럼.”
“그래, 그렇겠지. 그리드 영감은 최고의 공훈을 세우고 죽었는데. 거기서도 좋은 대우를 받겠지?”
“그럼.”
빙긋 웃는 에스티나의 얼굴을 보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죽어서 영광된 곳에 이를 길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위로가 되는지 새삼 체감하게 되는데.
그러다 문득 창천검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 ……감히 신성을 탐하는가!
비열해 보이기까지 하던 천사장의 미소.
그리고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까지 떠올리고 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는 듯하던 마음이 와장창 부서지는 것 같았다.
“……티나.”
“응?”
“천계가 정말 그리 정의로운 곳일까?”
“전에도 그러더니, 그 동대륙 오러마스터들 얘기 때문이야?”
“……그래.”
“애초에 여신께서 이 세상을 지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 이 자리에 없을걸? 그들은 분명 더 큰 뜻을 위해 희생된 걸 거야. 우리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그래, 그렇긴 하지.”
그게 맞다. 맞아야 한다.
하지만 자꾸 불길한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많은 대가를 치렀다. 죽은 사람도 너무 많아. 이제 와서 길을 틀 수는 없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최선을 다해 이 재앙을 극복한다.
마왕의 골통을 깬다.
복잡한 일은 그 후에 다시 생각하자.
타이니는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랬다.
“죽은 사람들의 무게만큼 우리는 더 힘차게 나아가야 해, 타이니. 흔들리지 마. 이 모든 게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 치른 대가니까. 그 대가가 무의미하지 않게.”
에스티나의 그 말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크고 작은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아픔을 감수하지 못하면 더 나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은, 그가 두 생에 걸쳐 얻은 깨달음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이제 정말 끝이 다가와.’
그런데.
타오르는 화장의 탑을 바라보며 그렇게 결의를 다지던 어느 순간,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신은, 세상의 순리를 꺾고 전쟁의 도화선을 당긴 여신은 무슨 대가를 치렀을까?’
신조차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가지게 된 의문.
하지만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처연하고 쓸쓸한 밤의 끄트머리에서 그의 머리를 스친 의문은,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잠시간 머물다 스러져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