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어디 가게?
에스티나는 타이니와 나태가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전장의 근방에 와 있었다.
지상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먼 하늘 위에.
그럼에도 그녀가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지상의 전투에서는 인류가 우세해. 변수는 저 나태뿐이야.’
왠지는 모르지만 죽음의 느낌을 풍기는 마충 떼들이 인류가 아닌 인어족을 공격하고 있었고, 마충의 군주인 분노는 그 사실도 모르는 듯 해저에서 강력한 마기를 풍기는 마물과 싸우고 있었으니까.
‘마족과는 느낌이 달라. 아마도 크라켄…….’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그 거대한 문어는 엘프의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었으니, 에스티나는 지금 칠죄종 분노를 막아 내고 있는 괴물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초조한 마음을 억눌러 가며 전장 밖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면서.
‘타이니를 도와야 해. 나태만 잡으면 돼.’
나태의 감각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니, 타이니의 능력으로도 자신을 못 찾을 만한 거리를 두고서 말이다.
처음에는 카일룸의 능력 중 하나인 이글 아이와 자신의 영역 ‘타겟팅’으로 나태의 빈틈을 노리고 원호를 하려 했다.
하지만.
번쩍.
슈으으으으.
콰콰콰콰콰쾅.
하늘을 지면처럼 여기며 사방팔방에서 노을빛과 검은빛 오러를 뿌려 대는 두 괴물의 격전은 차마 그녀가 끼어들 여유를 주지 않았다.
타겟팅으로 화살을 유도해 봤자…….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힘들어.’
그렇게 결론을 내는 순간, 에스티나는 타겟팅의 대상을 바꾸었다.
타이니, 그에게 두 개의 유물을 전달하기 위해서.
- 동대륙에서 오러마스터에 올랐던 이들의 유물이야. 신성뿐만 아니라 권능도 남아 있을 수 있어.
- 지금의 녹턴이라면 그 힘을 내가 흡수할 수도 있을 거고, 그것만으로도 난 강해질 수 있어.
하지만 그조차 기회를 보며 기다려야 했다.
나태가 눈치를 채고 유물을 가로채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다 허사가 될 테니까.
그러던 와중에 타이니의 빅뱅이 터졌다.
번쩍.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
‘읍!?’
과거에 편법을 써서 오러마스터에 오른 상태로 휴브리스를 상대하던 때와 비교해도, 파괴력의 차원이 달랐다.
전장의 하늘을 거의 감싸 버리듯 퍼져 나가는 노을빛 파멸의 빛.
그 충격파만으로도 전장의 한참 밖에 있던 그녀의 몸이 흔들릴 정도였으니.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타이니와 나태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녀 역시 타이니를 타겟팅 해 놓지 않았다면 그 흔적을 놓쳤을 것이다.
‘저 작은 균열!’
그 안에서 위기에 처한 타이니의 모습까지 감각에 어렴풋이 잡히는 순간.
“칫!”
그녀는 반사적으로 균열을 향해 날아가 그대로 그를 향해 유물을 쏘아 내려 했다.
갑자기 지상에서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락크투스!!”
“락크투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죽은 벌레 떼들의 공격을 받건 말건 오직 인간들을 향해 돌진하던 인어족들이, 갑자기 바닷속을 향해 반전하기 시작했다.
‘어??’
당최 무슨 일인지 몰라 바닷속에 집중해 보니.
크라켄과 함께 칠죄종을 상대하는 동료 둘의 강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랐지만, 그 상황만 보고도 얼추 추론되는 것이 있었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리가 번개처럼 회전해 답을 만들어 냈다.
[그 벌레 아직 죽이면 안 돼요!!]
해저의 동료들에게 자제를 부탁한 뒤.
[타이니, 바깥에선 분노를 잡기 직전이야. 그쪽으로 놈을 유인해!]
왜인지 적과 대치만 하고 있는 균열 안의 타이니에게 나태를 밖으로 유일할 방법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균열에서 나태가 튀어나온 순간.
[티나, 나 말고 바깥의 동료들을 도와!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타이니의 다급한 영파가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바보가!!’
[그럴 거야. 하지만 그 전에 이것들부터 받아!]
그녀는 두 개의 유물을 단 화살을 타겟팅의 대상이 된 타이니에게 쏘아 냈다.
정확히는 그의 녹턴, 그 망치 머리를 향해.
그리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른 적을 향해 타겟팅을 조준했다.
특히나.
[하여간 무능한 벌레 놈이!!!!]
꽈아아아아앙!
“[email protected]#!!!”
“캬아아악!”
외팔이가 된 붉은 머리 인간, 아니 마인을 향해.
나태는 전장에 엄청난 마기를 뿌려 대며 벌레 사체들과 인어족, 연합군의 일각을 지워 버리더니.
퍼어어어어엉!
그대로 해수면을 폭발시킬 듯한 충격파를 일으키며 바닷속으로 잠수했다.
[나태가 갑니다! 조심해요! 타이니가 올 때까지 시간만 끌어요!]
에스티나가 동료들에게 위기에 대해 경고하고.
‘카일룸!’
“끼루루루루루!”
우드드득.
한순간 정령 합신을 시도한 그녀의 등 뒤에서 갈색 날개가 솟구쳐 오르고 몸이 살짝 부풀어 오를 때.
우우우우웅.
굉음을 내며 놓아진 시위에서 쏘아져 나간 녹색 빛의 화살은 에스티나의 타겟팅의 유도를 따라 목표를 향해 날아갔고.
수호자 비전, ‘증폭의 궁술’을 통해 또 그 위력이 몇 배나 증폭되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그 안에 루나가 자주 사용하던 은신의 묘리를 더해, 최대한 그 기척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한없이 끌어 올려진 집중력이 만들어 낸 단 한 발의 기적.
‘천벌!’
한순간에 모든 힘을 싣고 쏘아진 화살이 소리도 없이 전장을 가로지르며 해수면을 그림자처럼 통과해 나태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한순간에 저릭의 몸을 튕겨 내고 검제를 향해 주먹을 뻗어 내던 나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 우르르르르르릉.
그녀가 성장한 만큼 천벌의 위력 역시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감히! 어떤 놈이!!!]
그것으로도 그저 나태를 튕겨 내고 심해에서 지상의 전장까지 울리는 살기 어린 영파를 뽑아 냈을 뿐이었다.
‘저 몸, 어떻게 된 거야…….’
타이니와 싸우는 걸 볼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상하게 타격을 아예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일정 수준 이하의 공격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는 그 괴물, 칠두룡 휴브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권능이었지만.
‘……그것과는 또 달라.’
저 권능이 약자멸시 같은 계열이라면, 아예 튕겨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타이니는 어떻게 그런 적의 팔을 날려 버린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타겟팅을 취소한 순간부터는 균열 안에서 그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
‘시간을 끌어야 해.’
그사이 심해의 싸움에도 변화가 느껴졌다.
크라켄이 필사적으로 분노를 붙들고 있는 동안.
검제와 저릭은 수세로 전환한 상태에서 힘을 합쳐 나태의 공격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데도.
‘밀린다…….’
오러익시더의 극에 달한 두 사람과 고대 정령을 팔 하나 없이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나태.
그러면서도 검제와 저릭이 크라켄에게 붙잡힌 여왕벌을 향해 대놓고 쏟아 내는 공격을 모두 몸으로 막고 있었다.
타겟팅으로 그 움직임을 읽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무력.
‘내가 무리를 해야겠어……. 카일룸.’
- 끼루?
힘을 아끼기 위해 현신을 취소한 영혼의 반려가 그녀의 의지에 의문을 보내 왔다.
이미 한 번 전력을 짜낸 몸으로 다시금 천벌을 쓰려는 그녀를 말리는 것이다.
‘나도 알아.’
경지에 비해 한참 부족한 지구력은 언제나 그녀의 발목을 잡아 온 문제였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힘을 빌려줘.’
고작 시간을 끌기 위해, 수명을 깎을 각오를 하는데.
그 순간.
[수호자님.]
정신파가 아닌 메시지 마법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먼 지상의 전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아르곤 경?]
시선을 돌려 보니, 아르곤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모인 동료들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마나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실버 팽, 갓 핸드, 하이넨, 제나스와 다른 마도사들, 거기에 우란 누드까지.
‘어……?’
루나와 웨폰 마스터 그리드,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연합군 정예들의 몸에서 시작된 각양각색의 빛이 아르곤을 거쳐 어떤 대머리, 아니 교황이 치켜든 지팡이로 모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희망의 빛을 연결하겠습니다. 수호자님의 영역으로 목표 지정만 해 주십시오. 이번에 끝장내겠습니다.]
스으으응.
우우우웅.
이내 한줄기 빛살이 전해져 온 그 순간, 그녀는 아르곤의 말뜻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 반드시 마족을 말살시키겠다.
멸마의 빛.
하나가 된 인류 연합군의 의지가 거대한 힘과 분노로 엮인 대마법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레 에스티나의 영역, 타겟팅이 다시금 나태를 특정하는 순간.
번쩍.
지상에서 솟구친 오색의 빛줄기들이 새하얀 빛으로 합쳐져 그녀를 거쳐 가더니.
우우우우웅.
그녀의 감각을 따라 그대로 나태를 향했다.
찌이이이이잉!
어떤 기척도 없이 해수면을 통과해 목표를 향해 쏘아지는 빛.
그 경로에 휩쓸린 마충 떼들이 그대로 녹아내리듯 사라지는데도, 해수면은 미동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번 통할 것 같으냐……!]
나태가 그녀의 영역을 강제로 잘라 냈다.
‘윽!’
그러나.
번쩍.
그녀는 타겟팅이 흐릿해져 가는 와중에도 거대한 빛줄기가 나태를 휩쓰는 것을 확인했다.
‘됐어!’
그녀의 눈이 커지는 순간.
우우웅.
바닷속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그녀가 있는 하늘까지 솟아올랐다.
번쩍.
우우우웅.
스아아아아아!
‘오……?’
온 세상이 성스러운 빛으로 물들고 그 빛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엄하기까지 했다.
어떤 마족도 그 빛에 휩쓸리는 순간 끝장나리란 것을 그녀는 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그 힘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그조차도 섣부른 기대인 듯했다.
우르르르르르릉.
이내 심해에서 엄청난 흔들림이 느껴지더니.
퍼어어어어어어엉!
콰콰콰콰콰콰콰콰.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을 뒤집을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하늘 위에서.
[아주 지긋지긋하구나. 인간 놈들!]
다시 소름 끼치는 영파가 울려 퍼졌다.
찌이이이잉.
“윽!?”
영파 안에 담긴 살기에 휩쓸리는 것만으로도 두통에 인상이 일그러질 정도.
그리고 그 순간 솟구친 바닷물이 소나기가 되어 전장에 쏟아져 내렸고.
그렇게 비가 쏟아져 내리는 맑은 하늘 위에서.
200m에 이르는 거대한 일곱 꼬리 여왕벌의 축 늘어진 몸체를 하나 남은 손으로 들어 올린 마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왼쪽 무릎 아래도 사라져 있는 마인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인류의 최정예들이 여력을 모조리 쏟아 냈는데도 다리 하나 끊어 낸 것이 고작이라는 뜻이었다.
[신화의 흔적은 모두 없어졌을 텐데. 어떻게 이런 마법까지…….]
그가 뿜어내는 존재감과 마기는 한순간에 하늘을 장악해 지상에 있는 인간들마저 찍어 눌렀다.
- 저게, 나태…….
수십만에 달하는 인간과 초인들이 오직 한 사람의 존재감에 짓눌릴 때.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엉뚱한 이들이었다.
“락크투스!”
“락크투스!”
“[email protected]#!$!”
왜인지 나태와 분노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는 인어족들.
그들이 집어던진 마나가 실린 창이나 투척 무기들이, 나태가 있는 허공까지 날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
당연히 그 공격들은 나태에게 아무런 타격조차 주지 못했지만.
인류 연합군의 정신을 확실히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파아아아앙.
그 사이 해수면을 폭파시키며 나타난 두 인영.
“놈은 확실히 타격을 받았다! 죽여!!!”
“이번에 끝장을 내자!”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왼팔이 날아간 검제와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저릭이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며 고함을 질러 댔다.
그 기세가 통했을까.
[지겨운 것들. 오늘은 이쯤 해 두마. 하지만…….]
살기를 뿜어내는 나태가, 축 늘어진 분노를 일견하고는 이를 갈며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인어족이 던져 낸 거대한 창이 그의 바로 발아래 구름에 그림자를 만들어 낸 찰나.
덥썩.
“어디 가게?”
그 속에서 노을빛을 휘감은 손이 튀어나와, 나태의 멀쩡한 발목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