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죽음의 길
우르르르르릉.
꽈아아아앙!
상공에서 하늘이 뒤집힐 듯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지상의 병력들은 그 싸움보다는 바로 눈앞의 전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정확히는, 생각지도 못한 아군의 등장에 시선을 빼앗긴 것이었다.
위이이이이이잉.
“캬아아악!”
“[email protected]#!$!”
쾅.
푸부부북.
털썩.
인해전술의 공포를 다시금 느끼게 해 주겠다는 듯이 매섭게 돌진해 오던 인어들이 허무하게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범은 인간이 아닌 벌레, 그것도 죽은 벌레들이었다.
“우와아악!”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벌레들이 우리를 돕는다!?”
죽었던 마충 군단이 갑자기 일제히 날아오를 때만 해도 긴장했었는데.
그 마충들이 전부 인어들을 공격하는 순간, 연합군은 모두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부류만 제외하고는.
“참으로 참담한 모습이로다. 허허.”
항상 선한 미소만 짓던 교황이 언데드 마충 떼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고는 자신의 신성력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갓 핸드 경.”
“예, 조금만 더…….”
심장이 뚫린 상처에도 죽지 않고 어떻게든 움직이려 하는 갓 핸드.
아무리 최고위 사제들이라 한들 심장을 뚫린 사람을 회생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상식인데.
스아아.
교황과 두 명의 추기경은 갓 핸드를 회복시키기 위해 거침없이 신성력을 쏟아 내고 있었다.
쓰러진 웨폰 마스터에게 달려든 추기경들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놀랍게도 갓 핸드의 상처는 실제로 조금씩 아물어 가고 있었다.
강대한 신성력이 진득한 암흑 오러를 밀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성력만 충분하다면 심장 따위 없어도 된다는 것처럼.
그 또한 순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완고한 성직자들에게 마충들의 부활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요 갓 핸드의 부활은 신의 은혜인 것이다.
“어찌 됐건, 덕분에 인류의 위기를 극복해 가고 있는…….”
추기경 중에서도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40대의 드루이 추기경이 언데드를 옹호하는 말을 꺼내다가, 살기 어린 교황의 눈길을 받고는 말끝을 흐렸다.
“섭리를 거역하고 살아남느니, 차라리 섭리에 따라 죽는 것이 낫습니다. 드루이 추기경.”
교황의 발언은 광신도의 표본이라 할 만했다.
드루이는 반론하고 싶었지만, 신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말에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이가 그의 편을 들었다.
“여신의 뜻은 이 재앙을 극복하는 데 있습니다, 성하. 필요하다면, 뭐든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꽉 막힌 신전의 규율 그 자체라 불리던 성령 기사, 갓 핸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교황과 추기경들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졌다.
“갓 핸드 경?!”
“하지만…….”
“교리에 대해 논쟁할 시간이 없습니다, 성하. 지금은 싸워야 할 때니까요.”
멈춰 있는 심장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간다는 것을 느끼며, 갓 핸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 콰아아아아아앙!
- 우르르르르릉.
공중에 뜬 두 점이 서로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공기가 떨리면서 폭풍이 일어난다.
그에 구름이 뭉개지거나 퍼지면서 한쪽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한쪽에는 태양이 내리쬔다.
고작 두 명의 인간이 싸우는데 전장의 기후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대충 봐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저 싸움의 결과로 결정된다.’
타이니나 저 나태나, 이미 숫자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었다.
좀 전의 나태가 12대 기사 중 최강이라 할 수 있는 다섯을 홀로 농락하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저 싸움에 자신이 낄 자리는 없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갓 핸드의 시선이 다시금 바다를 향했다.
인어족들이 몰려오고 있는 곳, 그 너머의 깊은 바닷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파도와 물보라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칠죄종이 저 싸움에 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전면을 가로막은 인어족들은 연합군과 벌레 떼들이 밀어 내고 있지만, 바닷속에 있는 숫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전부 뛰어넘어 도달해야 할 곳은, 물속에서 격전을 벌이는 거대 괴수들의 전장이다.
수중 전투의 경험도 없는 자신이 그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거기까지 도달이나 할 수 있을까?
막막함을 느끼던 그때, 전방에서 물러나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듯했던 검제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새하얗게 센 머리와 깊어진 주름이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듯한 느낌이 든 순간.
[바닷속의 크라켄을 도와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담은 정신파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떻게 말입니까?”
“예? 갑자기 무슨 말……?”
옆에 있던 교황이 당황하는 것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아르곤 경이 희망의 빛의 여력을 저와 저릭 경에게 집중시키기로 했습니다. 바닷속에서 싸울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니 성기사단은 블루윙과 함께 저희가 바다까지 가는 길을 뚫어 주십시오.]
그 영파에 갓 핸드의 시선이 다시금 밀려드는 인어족을 향했다.
그나마 멀쩡한 최강의 기사들에게 운명을 걸겠다는 의미는 알겠다.
하지만.
“크롹……!”
“캬아악!”
저 광기로 가득 찬 군대는 폭뢰와 화살과 마충들의 공세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조금씩 밀리기만 할 뿐, 물러설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저것들이 전부도 아닐 텐데.
“바닷속의 인어들은 어떻게 할 셈이십니까?”
“갓 핸드 경, 아까부터 왜 혼잣말을……?”
교황과 추기경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황당한 답이 들렸다.
[그건 사신이 뚫어 줄 겁니다.]
“예?”
어쩌면 지상에 올라온 것보다 많은 인어들이 있을지 모르는 바닷속 길을, 사신이 혼자 뚫어 줄 거라고?
‘어떻게……?’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뛰지 않는 심장이 완치된 것을 느끼는 순간, 갓 핸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갓 핸드 경!?”
놀라는 교황을 부드럽게 밀어 낸 갓 핸드는 그대로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성기사단 정렬!! 앞바다까지 길을 뚫는다!”
그 순간, 최전선에서 난전을 벌이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정말 가능하겠어? 몸이 정상이 아닌데?”
아르곤의 말에 루나는 창백한 안색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익숙해.”
동생의 권능으로 겨우 형태를 되찾은 양팔에는 아직도 짜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허풍은 아니었다.
암살자로 훈련받아 온 동안 이런 고통을 참는 데에는 이력이 나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스아아.
‘통각 마비.’
이런 재주도 부릴 수 있으니까.
그녀는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금이 간 움브라-테그멘을 쓰다듬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팔이 아까…….”
“시간 없어. 그만, 아르곤.”
“아니, 그래도 바닷속에 인어들을 어찌 혼자…….”
계속 걱정을 토해 내던 아르곤은 이내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고는 강제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콰아아아아아앙!
성기사단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희망의 빛 안에서 자신들의 단체 스킬인 여신의 세례를 중첩 가동시킨 성기사단은, 갓 핸드를 필두로 거침없이 인어족들을 무너트리며 ‘길’을 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제나스와 블루윙이 합류하는 순간, 그 돌파력은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탁하네, 루나 양.”
“부탁한다, 꼬마 아가씨.”
저마다 주름이 는 검제와 저릭을 보며 루나는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둬.”
하지만 그녀 곁에는 여전히 방해꾼이 남아 있었다.
“너 혹시 생명력을 갈아 넣겠다든가 하는 거면, 차라리 내가…….”
“희망의 빛에나 집중해, 아르곤. 둘이, 바다에서도 싸울 수 있게.”
“……젠장.”
구겨지는 아르곤의 표정을 보니, 급한 걸 알면서도 한마디 더 보탤 수밖에 없었다.
“내 특성상, 생명력 갈아 넣어 봤자, 효과 못 봐. 걱정 마.”
“……그래.”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은 걸까.
‘겁쟁이…….’
예전 같았으면 경멸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그가 무엇을 겁내는 건지 알기에 오히려 마음 한편이 따스해져 왔다.
“나 돌아와, 반드시. 걱정 마.”
“그런 걱정은…….”
쪽.
루나가 가볍게 볼에 입 맞춘 순간, 아르곤은 눈동자가 확 커지며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다음 건, 돌아와서…….”
그녀가 그렇게 돌아서자.
휘이익~!
“좋을 때다.”
“걱정 말게, 아르곤 경. 반드시 루나 양은 안전하게 돌려보낼 테니.”
직전까지 생명력을 갈아 넣느라 늙어 버린 동료들이, 장난스레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아마도 사기를 올리기 위한 억지웃음이겠지만, 아르곤은 그에 대꾸할 정신도 없는 듯 멍해져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스르륵.
루나는 그대로 성기사단의 후미에서 달리는 말의 그림자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일격의 심상을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다 죽일 필요는 없어.’
길만 뚫으면 된다.
목표가 뚜렷해질수록, ‘죽음의 영역’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어 갔다.
‘변형.’
더는 자신의 영역을 상쇄시킬 악마급들도 존재하지 않으니.
‘집중.’
영역을 압축시켜,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만드는 상상을 한다.
조금 전 웨폰 마스터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여 준 그 수법처럼.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쏟아 넣는다. 그리고…….’
부르르.
루나는 그림자 속에서 단검 움브라-테그멘을 바라보았다.
가보인 움브라에 천 개의 눈의 핵을 더해 그란돌이 만든 초월무구.
드워프의 초월무구 테그멘을 능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죽음의 단검이자 그림자 갑옷.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우우웅.
그녀의 부탁에 응답하듯 애병이 울었다.
직전의 전투에서 나태의 일격을 막아 내는 순간, 이 안의 핵에도 금이 갔다.
지금이라도 그란돌을 찾아가서 복원하면 어떻게든 본래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핵이 깨어진 탓에 그 에너지가 넘치듯 흘러나오는 지금, 오히려 그것을 확실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남아 있었다.
‘미안해. 모두를 위한 일이야.’
우우웅.
괜찮다는 듯 울어 주는 애병을 쓰다듬으며, 루나는 움브라 테그멘의 마지막을 가장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한 심상의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지금!!]
검제의 영파가 전해져 오는 순간.
스륵.
바닷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 가득한 인어족을 향해,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뼈 칼을 한순간에 쏟아 냈다.
파바바바바박.
- 캬아악.
- 꼬르르르륵.
- 끄륵!?
한순간에 붉게 물들어 가는 바닷속에서 인어족들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그녀에게 몰리는 순간.
루나는 심상을 완성했다.
그녀가 그리는 것은, 바닷물을 매개로 퍼져 나가 아가미로 호흡하는 인간형 적들만을 골라 죽일 죽음의 독.
그 시간은 짧아도 상관없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독을 이 대군 전체에 퍼트릴 만한 거대한 에너지를 담은, 치명적인 일격.’
우우웅.
콰드드드득.
움브라-테그멘이 전신에 균열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작별을 고하는 순간.
‘잘 가!’
마지막 인사와 더불어, 현시대에 태어난 최고의 초월무구가 그 안에 담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주인의 의도에 따라 폭발시켰다.
그리고.
꽈아아아아앙.
그 폭발에서 시작된 검은 빛이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일직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영역 변형, 관통.
최종 오의, 사신의 길.
쯔으으으으으으으.
기괴한 음파와 함께 쏘아져 나간 검은색 광선이 인어족들을 아무런 저항 없이 관통했다.
그 광선에 닿은 모든 인어족이 일순간에 피거품을 뿜어내며 그 자리에 고꾸라지는데.
- 캬아아악!
- 투스!
-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개중에는 분노하며 벌게진 눈으로 그녀를 향해 달려들려던 인어족들도 있었지만.
- 꼬르륵.
- 끄륵!?
그들 역시 이내 스스로 목을 잡으며 피거품을 내뿜기 시작했다.
루나가 있는 곳에서부터 심해로 이어지는 일직선.
- [email protected]#!!
- 끄아악!
인어족들이 본능적으로 그 주변에서 점차 멀어지는 순간.
바닷속에 가득한 인어족들의 시체 사이로, 심해로 나아갈 확실한 길이 뚫렸다.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새하얗게 센 머리의 인간과 녹색 피부의 오크가 새하얀 빛을 휘감고 돌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