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3화. 천계
“그레이스 님, 하계의 상황을 지켜보고 계십니까?”
“그렇다.”
인간의 인식에 따르면 하늘 위지만, 실제로는 상위 차원에 있는 세계.
구름과 비슷한 땅 위에서, 빛으로 빚어진 날개를 가진 인간형의 존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천사장님들께서 모셔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가나? 알겠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역시 마계가 승기를…….”
두 쌍의 날개를 가진 갈색 머리 남자가 세 쌍의 날개를 가진 금발여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물을 때.
금발의 여인, 그레이스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할 정도로 잘 버티고 있구나. 기대를 한참 넘어섰어.”
“예?”
“엄청난 변수가 있는 것 같아. 대체 뭐지? 크롬벨이 잘해 준다 해도 이건 예상외인데……?”
“그렇……습니까?”
그 말이 의외였는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씁, 하고 숨을 들이쉬던 그레이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뭐든, 그래 봤자지. 마왕이 그런 역천의 술수까지 만들어서 자기 부하들을 갈아 넣으려 작정을 했으니.”
“…….”
“아무리 노력해 봤자, 인간들은 고비에 고비를 넘어 가며 계속해서 절망을 마주하게 될 뿐이야.”
그 말은 둘 사이에 긴 침묵을 가져왔다.
그러다 남자가 불쑥 꺼낸 말.
“아직도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말에 그레이스의 얼굴이 슬쩍 흔들렸지만, 이내 그녀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그만, 빅토르. 이미 결정이 난 문제다. 다 그분을 위해서야.”
“…….”
부관, 빅토르는 할 말이 남은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천사라고 다 같은 존재가 아니다.
심지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이는 초대 마계 대전 당시부터 존재해 온 그분의 오른팔.
후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둔하다가 몇백 년 전 ‘불미스러운 일’로 소멸한 후대 때문에 다시 그 자리를 넘겨받은 제1 천사장.
고대에 베네피키움(Beneficium)이라 불렸으며 현재는 그레이스(Grace)라 불리는, 천계의 영원한 서열 1위였으니까.
“난 여전히 그때 그분의 결정을 지지하지만, 한 가지만은 여전히 안타깝구나.”
“예? 무슨…….”
“하계로 향한 마왕의 눈을 가린 선택 말이다. 그 때문에 소모된 카르마는 둘째 치고, 덕분에 상황을 알 수 없게 된 마왕이 너무 극단적인 술수까지 개발하게 된 것이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빅토르의 반문은 짙은 회의를 담고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모르지. 하지만 지금 상황만 봐서는 확실히 그분의 실수야. 마왕의 강림이 빨라지는 만큼, 우리 역시 더 많은 카르마를 소모해서 그에 대응해야 할 테니까.”
거침없이 여신의 실수를 지적하고 한탄하는 말.
‘저희도 가끔 내려다볼 수 있는 것뿐이잖습니까. 그렇게 얻은 정보도 완전하지 않고요. 그게 그렇게 큰 차이를 줄 수 있을까요?’
빅토르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감히 반론을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어쨌건 여신께서 직접 하신 일은 분명했으니까.
다만 그 와중에도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를 더 보태고 말았다.
“그래서 그 소모를 줄이고자, 애써 얻은 성물까지 내려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속죄자가 제대로 사용해 줄지가 문제입니다만.”
“그리할 것이다. 그러도록 강제된 자니까.”
그레이스의 대답은 단호했고, 그 커다란 눈망울은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빅토르의 마음 한편에서는 그 확고한 의지에 대한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그것이 고대에 우리를 위해 희생했고 2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다시 현세를 구하고자 하는 사도를 희생시키는 일이 될지라도 말입니까?”
그 말에 순간 그레이스가 멈칫했다.
“크롬벨은 이해해 줄 남자야. 걱정하지 말도록.”
“저희야 고대의 사도와 직접 연은 없습니다만.”
“난 그를 잘 알아.”
‘……그러니 더욱 배신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빅토르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진심을 차마 토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에 품은 회의를 에둘러 표현할 뿐.
“그렇게 희생되면, 영혼도 순환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하계에서나 이곳 천계에서나 말입니다.”
그 말에는 그레이스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지.”
끝없이 선한 카르마를 쌓은 이들은 천계에 올라 복락을 누리며 환생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은 중간계에, 악한 카르마를 쌓은 이들은 마계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
또 환생한 후에 쌓인 카르마에 따라 다시 상위 차원으로 올라갈 수도, 다시 하위 차원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것이 본래의 순리였으니까.
고대 마계 대전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는 천계의 영혼은 천계에서만 환생을 거듭하고, 하계의 영혼은 하계에서만 돈다. 크롬벨도 하계에서 영원히 환생하는 것보다는 소멸하는 게 나을 것이야.”
“그 성녀처럼 살까 봐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것은 저희가 감당해야 할 카르마를 그녀가 직접 감당했기 때문에……!”
“그만!”
“…….”
“요즘 들어 생각이 너무 많아진 것 같구나, 빅토르.”
그레이스의 푸른 눈에 차가운 빛이 담기자 빅토르는 또 말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차가워지도록 해. 그분을 위해.”
그레이스가 그렇게 돌아서려 하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빅토르가 불쑥 또 말을 던졌다.
“그분께서 흐름을 비트신 것은, 영문도 모른 채 소멸해야 할 하계의 생명들을 안타까워해서였다고 들었습니다.”
씹듯이 뱉어 내는 빅토르의 목소리에는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짙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멈칫한 그레이스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담담히 반문했다.
“……그래서?”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말 그분의 뜻에 맞는 일입니까?”
“그래.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해서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수 초의 시간이 필요했고.
굳은 표정의 빅토르를 두고 돌아서는 그레이스의 얼굴도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 이것이 정말 그분을 위한 길인가?
그 원론적 물음이, 이동하는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 * *
“다른 방책은 없을까?”
찬란한 빛살이 내리쬐는 거대한 대전.
저마다 빛의 날개 세 쌍을 단 이들이 완성된 영혼을 의미하는 빛의 고리, 헤일로를 머리 위에 띄운 채 고개를 들어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7개의 상석이 준비된 넓은 대전에서 나머지 여섯의 존재가 한곳으로 시선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레이스 님, 이제 와서 왜 그러십니까? 이미 다 검토해 보신 것 아니었습니까?”
지나치게 밝은 빛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시 반문하는데.
그에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분이 원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 말에 곳곳에서 성토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미 검토가 끝난 일에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의를 위해 희생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은…….”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하자, 빛이 가득한 대전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다.
“그레이스 님.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가득한 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의 중후한 목소리가 소란을 정리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정말 이것을 원하실지.”
“당신답지 않은 말씀이십니다. 대책 없이 반론만 내어놓으시다니요.”
그 말에 그레이스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빛살에 가린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내 그녀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젖히며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죄자가 제대로 역할을 해 준다면 우리가 모두 강림할 수 있을 테고, 우리가 모두 모인다면 마왕과 한번 싸워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말은 대전에 잠시간 침묵을 만들어 냈다.
“우리 모두가 모여도 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 그건 당신께서 저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일한 마계 대전의 경험자로서…… 말이지요.”
“그래, 그랬지. 예전에는.”
“예? 그럼…….”
무언가 달라진 것이 있는 걸까.
은근한 기대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지만.
“하계의 인간들이 생각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어. 우리가, 아니 그들 스스로 예비했던 고대의 용사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던가, 아니면 다른 변수가 있는 거야.”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그 발언은 대전에 동요를 만들어 냈다.
물론.
“그 말씀은…….”
“인간의 도움을 받자는 말씀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그 동요가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의 계획대로 실행되었을 때 그분께서 그 결과를 보시고 분노하신다면, 그걸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 말이 다시금 대전에 침묵을 불러왔지만, 곧 예의 중후한 목소리가 반론을 제기했다.
“애초에 감수하기로 한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해서!”
“우리의 희생 역시 감수해야 합니다.”
쏟아지는 목소리에 그레이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신의 종으로서 그분을 추종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올바르다 할 만했다.
하지만.
-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이 정말 그분의 뜻에 맞는 일입니까?
부관, 빅토르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데.
“설마 이제 와서 그분의 진노가 두렵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레이스 님?”
낮게 깔린 그 목소리가, 그 말이 그녀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멍해졌던 그레이스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봐.”
“그 말씀은?”
“아니, 그대의 말이 맞아. 내가 잠시 마음이 약해졌던 모양이야. 확실한 길을 두고 돌아가려 했다니.”
“아…….”
인간계에 생긴 변수가 어찌 위대한 신성을 대신할 수 있을까.
마음이 약해진 탓에 잠시 헛바람이 들었었나 보다.
그레이스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결론을 내렸다.
“계획은 원래대로 실행한다. 다만 속죄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 대해 다시 의논해 보도록 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전은 훈훈한 분위기를 되찾았고, 천사장들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그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연달아 재생되고 있었다.
- 베네, 나의 사랑스러운 첫 번째 아이야.
- 나는 너만큼, 하계의 모든 생명도 사랑한단다.
- 그랬기에 이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어.
- 그게 결국 더 큰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세상을 통틀어서 가장 존귀하신 자신의 창조주, 위대한 여신.
그분과 나눴던 대화가.
그리고.
- 후회는 없어. 너라면 내 결정을 이해해 주겠지?
그 마지막 한마디와 그 미소까지도.
그분이 택하신 길에 대해선 한 점의 의혹도 없지만, 그랬기에 지난 2천 년간의 허전함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사랑하신 모든 것이 다시 위험해지는 때가 찾아왔으니.
천계의 제1 천사장, 영원성을 가진 유일한 천사이자 여신의 첫 번째 검이라 불리는 이가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사랑하신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러니 부디…….’
- 나를, 우리를 용서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