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나는 분하다네
“적들이 몰려온다!!”
“불화살 준비!”
“폭뢰 준비!!”
“마법사들을 보호하라!”
비틀거리며 날아온 커다란 참새 정령과 그 위에 탄 강철 거인 드워프가 전한 소식에, 에낙센의 병력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투쟁심을 불태우는 이들이 있었으니.
“일반 벌레들 따윈 싹 다 무시하고, 장군급부터 쳐 죽여야지.”
“나야 벼락으로 지지면 되는데, 넌 어떡하게? 벌레들이라면 날아다닐 확률이 높지 않아?”
“흥. 공중이라고 내가 힘을 못 쓸까? 그리고 여차하면 너…….”
“또 나를 타면 된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지껄이면 그 못생긴 상판 갈아 준다, 저릭.”
“……이름을 바꾸라니까. 죽은 내 형제랑 자꾸 이미지가 겹친다고!”
“아니, 왜 늑대 수인이랑 그냥 늑대를 비교하는 건데!? 내가 네 앞에서 비스트 폼으로 변한 적도 없는데!”
“그럼, 태워 줄 수도 있다는 거냐?”
“야 이 씨……!”
또다시 시작된 저릭과 실버 팽의 언쟁에 다른 이들은 그냥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매번 똑같은 주제로 다투는 것도, 저들이 싸움 직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의식 같은 것이라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품위는 좀 없지만.’
웨폰 마스터, 그리드 반 셀던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그렇게 힘드냐!? 한 번만……!
“닥치라고 했지!”
뻐어어어억.
“끄…….”
“너, 이 색…….”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이 서로 크로스 카운터를 먹이며 살기를 뿜어내기 전까지는.
“둘 다, 스탑!!!”
그에 그리드가 다급히 마나를 끌어 올렸고.
쩌저저정.
이내 자신의 냉기가 과하게 달아오른 두 짐승의 열기를 식힌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려는데.
“아. 거, 무기 영감님. 장난인데…….”
“우리, 마나도 안 썼는데 말이오. 어험험.”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는 저릭과 실버 팽을 보는 순간,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마찬가지로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군. 내가 더 긴장했나 보네. 허허.”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자괴감이 들었다.
‘저게 장난이었다니……?’
어느새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에 올라 버린 악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때는 나란히 이름이 언급되던 오크의 대전사와 수인족의 대장군도 이제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는 것이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이런 내가 웨폰 마스터라…….’
스스로의 이명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크흠, 나는 다시 무장이나 점검하겠네.”
민망한 마음에 들어서 회의실을 나오는데, 자연스레 자신이 가진 무구들에 시선이 갔다.
이제는 완벽히 자신의 냉기 오러에 적응되어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다섯 개의 초월무구들.
빙하의 검, 프리즈&태그.
증폭의 활, 라이프 이즈 원샷.
관통의 창, 뱀부 스피어 오브 소울.
철벽의 버클러, 아이언 페이스.
신속의 손도끼, 볼트 블루.
특이한 이름만이 문제일 뿐, 언제나 자랑스럽고 든든한 애병들이었지만.
- 초월무구를 너무 많이 쓰면 영격을 잡아먹어 성장을 늦춥니다.
한때는 어린 꼬맹이였던 광휘의 기사가 해 준 말을 떠올리면 당장 이것들을 처분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우우웅.
‘아니, 진심은 아니야. 다 내가 약해서지.’
동시에 떨리는 다섯 무구의 울림에 그리드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탓했다.
무구가 무슨 잘못일까.
오히려 지금 이 막막한 전장에서 그나마 초월무구 덕에 경지 이상의 무력을 뽐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판이다.
그래, 분명 그래야 하는데.
“분한 거지? 동료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당연히……. 아?”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는 창백한 안색의 드워프의 말에, 그리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하이넨 공. 동료들이 강하면 좋은 것이지, 제가 왜…….”
“끌끌, 자네는 그게 문제야. 솔직하지 못한 거. 소드 엠퍼러와 얘기할 때는 안 그런다면서, 왜 다른 사람 앞에서는 가면을 쓰는가?”
너무 친해진 탓일까.
하이넨이 선을 넘는다는 생각에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가면이라뇨? 예의를 지키는 겁니다. 예의가 품위를 만들고, 그것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이넨 공도 예의를 좀…….”
“솔직히 난 분하네.”
“…….”
갑작스레 튀어나온 하이넨의 고백에 그리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난 분하네, 그리드.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것이.”
“그야 하이넨 공은 연세가…….”
“나이가 적고 많고의 문제가 아니야. 자네도 그렇지 않나?”
“…….”
하이넨이 연달아 그의 아픈 마음을 찔렀다.
“나는 전사야. 물론 자네들이 말하는 기사와는 조금 다르네만, 그래도 강함에 목숨을 거는 것은 똑같지. 그런데, 내가 12대 기사 중 거의 말석이라네.”
“그렇게까지…….”
“제나스라는 그 젊은 친구도 블루윙과 함께라면 검제 못지않은 시너지를 낸다고 하니, 받아들여야지. 하지만 그래서 더 분하다네. 그런데 자네는 아니 그런가?”
이글거리는 하이넨의 시선이 그리드의 눈을 직시했다.
그리고 300세가 넘는 늙은 드워프 초인의 솔직한 고백은, 그리드가 항상 지켜 오던 ‘예의’를 걷어 내고 속마음을 꺼내게 만들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그리드는 어색한 마음에 괜히 콧수염을 튕기면서도 왠지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하이넨이 웃으며 강철 손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그럴 거야. 그것부터 시작이야.”
“예?”
“난 그래서 불벼락의 마개조를 허용했지. 덕분에 직전에는 좀 활약할 수 있었고. 하지만 난 아무래도 그게 한계일 듯하이.”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자네는 나와 다르니까.”
“……예?”
하이넨의 말은 그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들었다.
“선대의 첫 번째 망치가 사고를 당한 이후, 난 아주 젊어서부터 이 테그멘을 탔어. 오러유저가 되기 전부터였으니, 거의 평생을 한 몸처럼 살아온 거지. 이 엄청난 초월무구와 말이야. 하지만 자네는 아니지 않나?”
“아…….”
“솔직히 말해 자네의 초월무구 다섯은 이 테그멘 하나보다 영격을 덜 잡아먹을 걸세. 심지어 그 검을 얻은 것도 초인이 된 후였다고 들었네만?”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다 보니 어째 셀던 왕국의 보물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긍정하는 셈이 됐지만, 하이넨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자네, 타이니 그 싸가지 없는 녀석이 그 말을 해 준 이후로는 극대소멸파를 쓸 때를 제외하고 거의 본신의 무력만 쓰고 있잖나?”
이어진 말도 어김없이 그의 양심을 푹 찔렀다.
“……티가 났습니까?”
“말만 안 했지, 다들 알고 있을 걸세.”
“……으음.”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이 나왔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전쟁에서, 자신의 발전을 꾀하겠다고 무력을 아낀 꼴이다.
대놓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난 자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이어진 하이넨의 말은 의외였다.
“예?”
“전방에서 싸우다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자네가 끝까지 그 철면이라는 방패를 안 쓰는 걸 봤거든.”
하이넨이 손가락을 들어 그리드의 목 근처 상처를 가리켰다.
인어족을 상대할 때, 동맥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창날이 만든 상처.
“누가 미래의 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겠나? 그리고 누가 항상 최전방에서 칼을 휘두르는 전사에게 비겁하다 욕을 하겠나? 혹시나 양심에 찔린다면, 그런 생각 버리게. 실제로 그래서 자네의 실력이 오르고 있지 않나? 그게 오히려 인류의 이득이야.”
하이넨의 말은 그의 마음을 통째로 읽고 위로해 주는 듯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제 곧 60이 되어 가는 나이가 부끄럽게도, 별것도 아닌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과 비슷한 갈색 눈이 새삼 푸근하게 느껴지는데.
하이넨의 조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확실한 벽을 느꼈네. 내가 넘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지. 하지만 그 덕에 깨달은 것도 있다네.”
“예?”
“그 벽을 넘으려면 마음에 거리낌이 있어서는 안 돼. 우리가 오러를 깨칠 때 한계를 넘는 일을 간절히 바랐듯, 순수한 마음으로 열망하는 것이 기본이 돼야 한다는 거야.”
“아…….”
정말 단순한 발상이었지만, 그 말은 그리드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답답하고 묵직한 마음의 짐 덩어리 하나를 날려 버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에게 더 무거운 짐을 얹었다.
“마충 군단에서 살아남은 악마급은 많으면 여섯이야. 알고 있지?”
“예? 아, 예. 장군 둘에 부관급 넷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줄었으면 좋겠지만, 일단 대비하는 입장에서는 최대치로 가정해야지. 그리고 칠죄종은 둘이 있어.”
“……예.”
“최정예에 속하는 초월급들을 제나스와 블루윙이 모조리 떠맡는다고 쳐도, 우리 중 최강자들은 칠죄종에게 달라붙어야 해. 검제와 오크 대전사, 문나이트, 마도 기사, 세계수의 수호자, 그리고 사신까지 모두. 아무리 따로 준비한 ‘그것’이 있어도, 타이니의 말에 따르면 그래도 위험할 수준이니까.”
“크롬벨 경은, 결국 회복 못 한 겁니까?”
“그렇다고 하네. 심지어 세계수의 수호자는 왜인지 지금 자리를 비운 상태야.”
“그럼…….”
“마도사들이나 우란 누드가 그 빈자리를 메워야겠지. 엘프의 정예 정령사들은 다른 벌레들을 상대하는 데도 벅찰 수 있어. 그 말은 자네와 나, 그리고 갓 핸드 경이 악마급 마족 여섯을 잡아야 한다는 뜻이야. 알고 있지? 우리 목숨을 갈아 넣어도 그게 가능할까?”
회의에서 다른 초인들이 그들의 자존심을 배려하여 에둘러 표현했던 말이, 하이넨의 입에서 직설적으로 나왔다.
“아니면, 동대륙에서 악마급 대다수를 죽여 주었기를 바라면서 기도나 올릴까? 그쪽 초인 중에는 마충 군단과 제대로 싸웠다는 사람도 거의 없다던데?”
“……그럴 수는 없지요.”
“그래, 그럴 수는 없어. 그래서 난 목숨을 걸 생각이네.”
“……하이넨 공.”
“불벼락이 박살 나도 된다는 생각으로 싸울 거야. 거기에 내 목숨까지 얹으면 악마급 둘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런데 자네도 그럴 수 있겠나?”
“……못해도 해야지요.”
그 의지의 표현에 하이넨이 비로소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때는 초월무구를 전부 가동시키게. 그래도 목숨이 위험할 테니까.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 싸움이 자네가 한계를 넘게 만들지.”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설마라니, 이 사람아? 내가 왜 지금 그런 말을 하겠나?”
“예?”
“자네, 지금 벽을 느끼고 있지 않나? 손에 닿을 듯한 수준은 된 것 같은데?”
“……예. 넘을 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만.”
안 그래도 초월무구가 잡아먹는 영격에 부담을 느낀 탓에, 잠시나마 그것들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것만으로 준비는 된 거야. 스스로를 믿게. 아니면, 이렇게 장담하는 나를 믿든가.”
“하이넨 공.”
“그렇지 않으면 미래가 너무 암울하지 않겠나? 또 간신히 버티다가 오러마스터 타이니가 구하러 오기만을 바랄 텐가?”
“……절대 아니지요.”
“그래, 나도 아니야. 자존심이 상한 채로 사느니, 기왕이면 명예롭게 자존심을 지킨 채 죽는 걸 택할 거야. 인류를 위한 전장. 이보다 더 나은 무대가 있을까?”
한 종족의 대표이자 최강의 전사 중 한 명이 담담하게 전해 오는 불꽃 같은 각오.
누군가 들었다면 정말 미친 소리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불꽃은 골수 기사인 그리드의 마음에도 옮겨붙었다.
“저 역시 그럴 생각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뱉어 낸 말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정신을 맑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지금 그리드가 그러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불필요한 감정을 덜어 냈다.
오랜 악우에 대한 열등감도.
새파랗게 어린 친구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도.
그리고 형님 전하와 왕국에서 자신에게 거는 기대마저도.
그 모든 것을 덜어 내고 나니, 남는 것은 오로지 40여 년 전 기사로서 처음 검을 잡고 명예로운 삶을 맹세하던 순간의 자신뿐이었다.
‘그래. 남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내가 언제부터…….’
약자를 지키며, 주군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살겠다.
그 당시의 순수하고 충만했던 맹세의 순간이 다시금 가슴에 떠올랐다.
인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지금, 다가올 전장에서 바로 죽는다 한들 한 점 부끄러움이 있을까.
‘없다.’
반사적으로 뱉어 낸 말이 필사의 각오로 이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생애가 만들어 온 삶의 흔적이 이 순간 그의 영혼에 확실히 자리 잡은 것이다.
그리고.
우우우우웅.
그리드의 몸에서 난데없이 차가운 냉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자연스레 하이넨의 눈동자가 확 커지고.
“흐, 벌써!? 자네는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 푸하하하! 좋아, 아주 좋아! 가능성이 높아졌어. 기왕이면 명예도 얻고 목숨도 지키는 게 최고지!”
우우웅.
하이넨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리는 동안, 푸르고 차가운 기운이 성 가운데서 주변으로 퍼져 나갔고.
그 기운에 놀란 초인들이 하나둘씩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들려 할 때.
- 옵니다!
에낙센의 앞바다에, 마충 군단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