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내가 무서웠나 보네. 미안하네
- 끼루루루루!
커다란 참새 정령의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평온하기만 했다.
곧 시작될 재앙은 전혀 모른다는 듯 잔잔하기만 한 바다.
그런 바다를 담담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순간, 갑옷 테그멘의 가슴에 고정된 수정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카룬의 시민들을 다 죽이실 생각입니까?]
“찬성한 줄 알았소만, 공작?”
검제의 말에 하이넨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이넨 님을 걱정하는 겁니다.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역시.’
소드 엠퍼러, 제국의 철혈 공작은 그 붉은 오러가 주는 인상과는 다르게 언제나 냉정하기만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리 죽을 운명으로 취급한다 한들, 적에게 죽는 것과 아군에게 죽는 것은 전혀 다를진대.
그런 가혹한 임무를 실행해야 하는 아군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한다면, 가장 나이가 많은 내가 하는 게 맞겠지. 마음의 짐은 나 혼자 짊어지고 가리다. 그게 늙은이가 해야 할 일 아니겠소? 마침 딱 맞는 무기도 생겼고.”
그 말에 수정구에서는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가시다니요? 꼭 무사히 돌아오십쇼.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이넨 님.]
생각지 못한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공작, 당신도 항상 차가운 건 아니었구먼.
“뭐, 그러도록 노력해 보리다. 엘프 아가씨, 그런 의미에서 조금만 더 속도를 내 주시오.”
[예, 옛!]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 현혹 마법에 대비하기 위해, 하이넨이 타고 있는 정령의 주인은 수정구로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의 파트너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물론 영물 출신인 정령이 정령사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할 리는 없겠지만, 애초에 기대했던 카일룸의 비행 능력과는 대충 봐도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엘프와 드워프가 사이가 좋지 않다 해도, 이 일을 빌미로 날 죽게 만들 생각은 접어 두시고.”
[저,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절대……!]
“농담이외다, 아가씨.”
[…….]
나름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수정구 속 검제와 엘프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참 재미없는 사람들이다. 농담을 몰라.
‘저들에게 진짜 농담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도, 이게 마지막이 되어선 안 되겠지.’
하이넨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만약 이 임무를 성공한다 해도 수십만을 참살했다는 마음의 짐을 어찌 감당할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 생각을 하면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해 온 것이라 봐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 무장을 해야 할 차례였다.
멀리서 밀려오는 먹구름 같은 벌레 떼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하이넨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에낙센에서 카룬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 텐데…….
“왜 아직도 저기까지밖에……?”
카룬의 배들이 짐작보다 이상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헨리 1세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인류의 영광을 위해 마계의 군대를 분쇄하는 행진의 선두에 서는 꿈을.
‘훌륭하다, 훌륭해.’
카룬의 정예들과 그 정예들을 이끄는 자신의 모습은, 그 옛날 모험왕이 이끌던 왕국보다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의 군대를 끝없이 격파하고 전쟁을 지휘하면서, 그는 어느 순간부터 위화감을 느꼈다.
‘너무 쉬워…….’
인류의 위협이라는 마족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함정일지도 모른다, 리암 경! 영웅들에게 알려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하게!”
하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아니, 황제 폐하! 이대로 진격하여 마왕을 척살하시면 됩니다!”
심지어 최측근인 리암 경마저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지끈.
갑자기 두통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분명 이상해.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배들의 진행 속도를 늦춰라!”
“폐하!”
지끈지끈.
왜인지 두통이 점점 심해졌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서!”
이 상황은 명백히 이상했다.
‘이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은 없다.’
타고난 혈통으로 왕위를 잇는 과정에서조차 골육상쟁의 난리를 겪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것은 마계 대전이 아닌가.
인류의 존망을 건 전쟁이 이리 쉽게 풀리는 것은 너무 이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왕위를 물려주시고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언이 떠올랐다.
- 세상일이 너무나도 쉽게 풀린다면 의심하거라, 아들아.
- 네 주변에 간신이 득실거린다는 뜻이니.
‘간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암벽의 기사 리암 폰 피터슨이었다.
왕국을 위해 노년에도 생명을 갈아 넣는 노력을 통해 오러를 깨친 인재.
“일단 늦추라 하시기에 늦췄습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폐하? 이러다가 다른 나라에 공을 빼앗깁니다!”
절대 간신일 리가 없는 기사가, 이 명백히 이상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진격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봐도, 충직한 기사들 모두가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그 순간, 다시 심각한 두통이 엄습했다.
찌이이이잉.
“윽!”
동시에 머릿속에 성스러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마족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하라!]
“신탁! 신탁입니다! 폐하께 신탁이!!”
“우와아아아!”
가장 가까이 있던 리암이 감격에 차 소리를 지르는 순간, 주변의 기사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는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신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는데.’
조금의 이상함이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죄송합니다. 여신이시여.’
그는 속죄의 기도를 올리고 난 후, 다시금 진격의 깃발을 올리려 했다.
자신이 탄 대장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늘어선 천여 척의 배.
‘그래…….’
카룬 왕국의 총력을 투자한 함선들이 수많은 병력을 싣고 함께하지 않는가.
‘아무리 마족이라도…….’
저 용감한 병사들과 기사들의 힘이 있다면, 그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걱정이 과했다.
‘저렇게 용감한 병사…… 병사? 너무 작은데?’
그때, 모험왕의 아티팩트 중 수평선 안쪽 해상의 모든 것을 파악해 주는 ‘인도자의 눈’이 이상한 광경을 포착했다.
대장선에서 먼 배를 타고 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너무나도 ‘작은’ 병사들.
‘그럴 리가…….’
찌이이이잉.
“큭!”
다시금 심해지는 두통.
[마족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하라!]
“우와아아아!”
재차 울려 퍼지는 신탁과 주변의 환호성이 그의 결단을 재촉했다.
하지만.
‘인도자의 눈’은 보고 말았다.
정예 병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병사들의 눈빛이 두려움에 차 있는 것을.
그 눈빛이, 헨리 1세로 하여금 두통을 무시하고 다시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찌이이잉.
“큭.”
통증과는 별개로 정신이 조금 맑아진 듯한 느낌이 들자, 의구심의 구체적인 윤곽도 드러났다.
우리 왕국에 군선이 이렇게 많았던가?
아니, 애초에 천여 척에 가득 채울 만큼 병사가 많았던가?
……그럴 리가?
‘뭔가 잘못됐다.’
콰드드득.
자각하는 순간, 머릿속 한쪽에서 무언가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끄으으윽.”
동시에 눈앞의 세상이 깨어져 나가며, 잊혀졌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항전의 와중, 앞발 하나밖에 없는 뿔 달린 사마귀에게 잡혀 거대한 벌레를 마주했던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기억이.
그리고 그때, 그와 리암은…….
“흡!?”
이가 갈리는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자 자연히 터져 나오는 신음.
그것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광기 어린 리암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도로 삼켜졌다.
“폐하? 어서 빨리 진격하심이…….”
“아. 아, 리암 경…….”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려 나왔다.
그 고고하던 기사가 마족의 노예가 되다니.
머릿속 통증과 상관없이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다 내 부덕이다. 나 때문이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순간, 손에 낀 반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속적으로 반짝이며 주인에게 위험을 알리고 있던, 모험왕의 아티팩트.
공포와 현혹을 방비하는 초월무구, 오네스타스(Honestas).
자신이 정신을 차린 것도 이것 덕분일 터였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리시오. 리암 경.”
“예? 잠시……? 예, 잠시만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헨리 1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리암 경을 한 발짝 뒤로 물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카룬의 백성들이 마물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음을.
‘나 때문이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폐하?”
“아, 아닐세.”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을까.
딱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한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으로 그칠 것 같았다.
그랬기에 함락 당시에도 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헨리 1세의 눈이 빠르게 사방을 훑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난관에서 자신을, 아니 백성들을 구해 줄 희망을 찾기 위하여.
그러다가 마침내 멀리 하늘에서 그 희망을 찾았다.
인도자의 눈을 통해 그 상세한 인상착의까지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새를 타고 날아오는, 강철 갑옷을 입은 거인.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 얼굴과 무구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기갑왕 하이넨! 12대 기사!’
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름값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엄연히 대륙 최고의 반열에 드는 초인이 카룬의 함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팔에서 유동하는 엄청난 마나의 흐름이 향하는 곳은…….
“아, 안 돼!!”
[하이넨 공, 그 배에는 우리 백성들이 타고 있소! 공격하지 말아 주시오!!]
황급히 전개된 메시지 마법에 하이넨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헨리 1세는 다급히 그를 향해 연거푸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내게, 내게 백성을 보호할 방법이 있소이다! 내 뒤의 괴물들만 공격해 주시오, 제발!! 벌레 괴물들의 주의를 잠시라도 돌려 준다면, 내 백성들을 온전하게 만들 방법이 있소! 믿어 주시오, 하이넨 공!]
그 반응을 보니, 더는 망설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리암 경.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뒤를 부탁하겠네.”
“폐하?”
“일단은 후퇴하여 왕국의 보존에 애써 주시게. 못난 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듯하네.”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리암이 광기에 물든 눈으로도 의문을 표해 왔지만, 지금은 대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기갑왕의 왼팔에 다시금 엄청난 화염의 마나가 모여드는 것이 보였으니.
[내가 신호를 보내겠소이다! 보면 알게 될 것이오! 내가 내 백성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괴물들만 공격해 주시오, 제발!! 부탁드리겠소이다!!]
또다시 움찔하는 하이넨을 보며, 헨리 1세는 자신의 왕관을 뒤집어썼다.
“폐하?”
더는 긴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리암 경, 부탁하겠소.”
동시에 품 안의 작은 단검을 꺼내 그대로 왼 손목을 그었다.
“카룬의 후손, 그 이름으로 기원하노니…….”
“폐하!?”
리암의 목소리가 다급히 울려 퍼졌지만, 헨리 1세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걸 정말 쓰게 될 줄은 몰랐군……’
하지만 지금 자신의 보신보다는, 마족들의 인질이 된 백성들의 목숨이 더욱 중요했다.
번쩍.
각오를 굳힌 그의 몸에서 일어난 황금빛 빛살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는 하이넨을 향해 다시 메시지 마법을 보냈다.
[지금입니다! 마족들을……!]
그리고 그 순간이 되어서야.
[세뇌충을 이겨 냈다고? 인간이?]
음습한 영파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으며 전해져 왔다.
‘늦었다. 괴물들!’
그 생각을 반영하듯, 다가오던 거대한 새의 위에서 시작된 화염의 폭풍이 뒤쪽의 벌레 군단을 강타했다.
콰콰콰콰콰콰콰.
[이건 또 무슨……! 드워프. 한 놈이 감히! 죽여!!]
괴물 두목의 의식이 성공적으로 하이넨에게 쏠렸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곳에 있는 카룬의 백성들이 살아남기를.
“지금 이곳에 기적을……!!”
카룬 최고의 영웅, 모험왕이 후대를 위해 안배해 놓은 수법.
언제고 위기에 처한 왕국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최후의 수단.
번쩍.
스아아아아아.
하늘로 솟구쳤던 빛살은, 곧 황금빛 축복으로 화해 카룬에 속한 모든 이에게 쏟아졌다.
“폐, 하……?”
붉게 충혈되어 있던 리암의 눈동자 역시 본래의 갈색빛을 되찾아 가는데.
그런 그를 보며, 헨리 1세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 축복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리암 경, 적어도 하루 동안은 백성들이 모두 어떤 저주나 병마도 통하지 않는 축복 속에 있게 될 거네. 그사이에 후퇴하게. 그리고 카룬을 지켜 주시게.”
이 황금빛 빛살은 지금 백성들의 몸 안에 심어진 끔찍한 벌레의 유충들까지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엄청난 기적의 대가는.
모험왕의 모든 초월무구의 소멸과, 그것의 정명한 주인…… 국왕의 죽음이었다.
“그때…… 그때 결심했어야 했는데, 무서웠나 보네. 내가 너무 모자란 왕이었나 보네. 미안하네, 정말로.”
희미한 웃음과 함께 더욱 희미해지는 헨리 1세의 몸.
“아…….”
그런 그를 바라보는 리암의 갈색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