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3화. 인어들의 왕?
저벅저벅.
푸른 물결이 치는 듯한 신기한 머리를 한 남자가 복도를 걷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이이이잉.
왕궁의 복도에 걸려 있던 화려한 미술 작품들은 무참히 훼손되어 있었고, 항아리 같은 공예품 안에는 정체 모를 벌레 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런 왕궁을 날아다니는 벌레 하나하나의 크기가 거의 주먹만 하니.
그것들의 빨간 점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듯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남자는 혐오감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해상 왕국 카룬의 왕성이었던 이곳은 이미 벌레 둥지가 되어 있었다.
‘바닷속에서는 볼일이 없어서 다행이지. 쯧.’
잠시 주춤하던 남자의 걸음이 다시 옮겨지려는 그때.
어느새 그의 눈앞에는 더욱 혐오스러운 것이 다가와 있었다.
[기분이 나쁜가? 불쾌한 감정이 느껴지는군.]
벌레의 머리에 사람의 몸뚱이를 한, 마치 벌레 머리 형태의 투구를 쓰고 검은색 갑주를 입은 듯한 괴물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벌레 인간의 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달린 것은 날카로운 칼날 같은 앞발.
그야말로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에 남자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크마…….”
마충 군단의 제2장군.
1장군 엑시드의 가장 날카로운 발이 잘린 뒤로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실질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내 이름은 굳이 소리 내서 말해 주지 않아도 안다, 물고기. 하지만 예의를 지켜라. 이곳은 이제 왕의 둥지다.]
“왕이라…….”
그 영파를 듣고서야 남자는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이미 몇 번 만난 바 있는 괴물을 또다시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눈앞의 벌레 인간의 주인이자, 이 흉물스러운 광경을 만들어 낸 가장 큰 흉물.
‘벌레들의 왕.’
하지만 기죽을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됐다.
자신 역시 위대한 여왕이 사멸한 이후 다시금 종족의 부흥을 이끌기 위해 선택된 ‘왕’이니까.
살아남은 동족들의 영혼과 가능성을 조금씩 모으고 있으니, 자신이 이 눈앞의 벌레 인간을 능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벌레들의 왕 또한…….
“날 안내하고자 왔는가.”
[보호겠지. 그렇게 적의 어린 냄새를 주변에 뿌리다가 우리 아이들에게 죽게 되지 않도록 말이다. 주제를 알아라, 물고기.]
……이런 수모도 언젠가는 갚아 줄 수 있으리라.
물론 그 전에.
‘그 괴물부터 반드시 처리해야겠지. 벌레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괴물’을 떠올리는 남자의 눈가에 희미한 두려움이 깃들었다.
인어족에게 여왕은 단순한 지배자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으니.
자신들을 멸종시키려 했던 여신을 꺾고 새로운 신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았던 종족의 정수였다.
수많은 인어들 중 가장 큰 가능성을 가진 개체에게 수억에 가까운 동족들이 저마다의 영혼과 가능성을 바쳐 만들어 낸 새로운 신.
그랬기에 그 신이 봉인되었을 때 인어족들은 모두 영혼의 일부가 봉인되며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긴 인고의 세월을 지나 부활한 여왕은, 허무하게도 다시 사멸했다.
‘끝도 없이 노을빛 파멸을 뿌려 대는 괴물에게.’
여왕이 죽었는데도 왜 자신들이 다시 타락하거나 죽지 않고 종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은 확실했다.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채 상실감에 시달리던 인어족은, 스스로 여신을 죽였노라 천명하는 적에게 분노하여 달려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종족적 분노.
그 대가로 이미 수십만, 수백만에 가까운 동족이 그 괴물에게 갈려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종족적 위기감이 개체 전체에 퍼졌다.
- 저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종족의 미래는 없다.
그 때문에 선택된 것이 바로 자신.
인어족의 대표로서 그 괴물을 끝장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새로운 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과정에서 동쪽에서 날아온 벌레들의 군단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잡념이 많은가 보군. 흘러나오는 냄새가 두서없다.]
아크마의 말에 움찔한 그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럴 수밖에. 그 괴물을 유인하고자 하는 계책은 제대로 실행했겠지?”
[왕께서 명하시면 우리는 따를 뿐. 질문은 왕께 하라.]
뭐, 이런 멍청이들이기에 더 이용하기 쉬운 것이니까.
남자는 말없이 아크마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숙인다.’
그렇게 다시 다짐을 하면서.
끼이이이이이.
“큭!”
웨에에에에에엥!
거대한 대전의 문이 열리며 우글거리는 벌레 떼가 튀어나온 순간, 남자는 다시금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텅 비어 버린 듯 휑해진 대전 안쪽에 시선을 던졌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대전의 천장은 뻥 뚫려 있었고, 화려한 왕좌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7개의 뿔에 7개의 꼬리를 가진 기괴한 형태의 거대한 여왕 벌레가 자리하고 있었다.
뚫린 천장의 구멍 위로 한참을 올려다봐야 머리가 보이는 혐오스럽고 거대한 벌레.
벌레들의 왕이,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하다, 정말…….’
푸르르르.
엄청나게 거대한 겹눈이 흉측스럽게 떨리며 남자를 응시하는데, 그는 거기서 왜인지 비웃음을 느꼈다.
[여전히 겁이 많아. 왕이라더니?]
“칠죄종 분노의 군주, 마충의 왕을 뵙소이다.”
남자는 종족의 기억에 따라 머릿속에 새겨진 고대의 예법을 그대로 따라 했는데.
이것은 두 번째 만남에서 강요당한 예의였다.
‘내가 이런 벌레 따위에게.’
언제고 반드시 이 굴욕을 갚아 주리라.
새삼 그리 다짐하는데.
[왜 또 찾아왔지?]
벌레의 왕은 대뜸 홀대의 뜻을 전해 왔다.
“계책의 진행 정도를 여쭈고자 왔습니다. 그리해야 우리의 군세 역시 준비를 할 테니 말입니다.”
[흐흐흐흐. 그래, 그 계책. 내 아이들이 당했다는 그 파멸의 빛의 주인을 꾀어내겠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아. 그런데, 아직 반응이 없네?]
“이, 인간은 그대들과 우리와 다르게 개체 간의 연락 속도가 늦습니다. 그것을 고려하심이……!”
[그래서 기다리고 있지 않나? 하지만 슬슬 지겨워지니, 그냥 공격을 할까 생각 중이었다.]
저런 멍청이가……?
‘역시, 벌레는 벌레일 수밖에 없나.’
남자는 다시금 분노를 되씹으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냄새’로 감정을 읽는 벌레들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론 주장은 확실히 해야 했다.
“그 괴물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 인어족은 섣불리 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군주!”
[정말 겁쟁이라니까. 너희 종족이 어찌 멸망해 가는지 알 것 같다.]
뿌드득.
벌레 따위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다가 스스로 놀라 흠칫하는데.
[뭐, 한 번쯤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다른 칠죄종이 죽은 것도 그 파멸의 빛을 가진 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으니. 그 슬로스가 여태 조용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저 벌레 대장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유인책은 얼마나 진행 중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미 충분히 뿌렸다.]
역시나 불성실한 대답이 돌아오자, 남자는 다시 한번 물음을 던졌다.
“얼마만큼 뿌리신 걸까요? 진행 정도에 따라 그 괴물의 행방이 결정될 것 같은데…….”
나름 타당한 질문이라 여겼는데.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서늘해졌다.
[……정말 귀찮게 구는구나!]
찌이이이잉!
“큭!”
미친…….
뒤이어 분노 어린 영파가 울려 퍼지더니 머릿속을 헤집는 듯한 두통이 몰려왔다.
“그, 그만!!”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말을 뱉을 여력도 없었다.
[고작 한 번 허물을 벗은 것이 종족의 왕이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자꾸만 나를 자극해?!]
대체 뭘 자극을 했다고.
“저, 전 무슨 뜻인지, 제발…….”
끄으윽.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기 시작한 한참 후, 그를 미치게 만들 것 같던 살기가 어느 순간 갑자기 잦아들었다.
“푸하악.”
쿨럭. 쿨럭.
‘이렇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났던가.’
남자가 아직 비루한 자신의 모습을 벌레들의 왕과 비교하며 비통해할 때.
[호오, 떠났다?]
놈이 살기를 거둔 이유가 드러났다.
그에 남자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고개를 들어 보는데.
“떠, 떠났……?”
[그래. 제법 강한 존재감을 풍기는 놈이 인간들의 무리를 떠났다. 내 계책이 제대로 통한 모양이야.]
내 계책?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숙여야 할 때였다.
“그럼, 저희 종족도 준비를 하겠습니다.”
마치 좀 전에 고통을 받았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그대로 돌아 나서려 하는데.
아크마가 슥 하고 길을 막았다.
“뭐지?”
놈은 말없이 턱을 끄덕이며 대전의 상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벌레들의 왕, 라스의 거대한 머리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것이 보였다.
“윽!?”
혐오감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다가 그것이 실수임을 깨닫고 억지로 허리를 펴는데.
“아직, 말씀하실 것이 남으셨습니까?”
[너, 내 것이 되어라.]
“……예?”
[굳이 귀찮게 의사 결정 수단을 거쳐서 통보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전쟁은 속도가 생명인 것을.]
“……무슨 말씀이신지?”
[마계 대전을 준비하며 내가 개발해 낸 것이 있다. 이 또한 기밀이었지만, 이제 슬슬 선보일 때도 되었지. 아니, 애초에 너는 알고 있을 텐데? 여기 있던 인간들이 어찌 되었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바로 그 설마다. 인어족의 어린 왕아. 감히 계속해서 날 자극해 놓고, 그 꿍꿍이를 모른 체해 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저,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인어족은 마족과 동맹하여 인간들을 박멸하고자…….”
하지만 그 변명은 끝까지 나오지도 못했다.
[적대하는 냄새를 그리 풀풀 풍기는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푹.
황급히 뒷걸음치는 순간 등 뒤로 아크마의 앞발이 슬쩍 와 닿자, 그는 온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아, 안 돼…….”
그리고 그런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라스의 머리에서는 아주 작은, 실처럼 가느다란 벌레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저 실벌레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얼마 전 똑똑히 본 적이 있었다.
“안 돼!!!”
[하등한 생물을 지배하는 데 굳이 현혹의 권능까지 필요할까. 이것이 더욱 완벽하거늘.]
“끄아아아악!”
실벌레가 인어족 왕의 귓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그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통증은 전혀 없었지만, 본능의 영역에서 느껴지는 공포가 그를 압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비명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라스의 머리는 기분 좋은 영파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냐, 아크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왕이시여.]
[마계 대전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러스트는 내 밑의 서열로 강등되었을 것이야. 물론 이제 와 그 서열 따윈 믿지도 않지만.]
그 여유로운 영파 속에서, 남자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나, 난, 절대, 안…….”
[호오? 자신의 신체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하등한 생물이, 그래도 제법 버티는구나.]
“인어는 굴복하지, 않…….”
[아니, 넌 굴복한다. 하지만 또한 나는 궁금하다. 너를 지배하게 되면, 과연 나머지 인어족들은 너와의 연결을 끊을까? 아니면 나에게 지배당할까? 지배당한다면, 너희들이 전과를 올리면서 모으는 카르마는 슬로스의 것이 될까, 나의 것이 될까?]
그 마지막 영파가 흘러나올 때에는, 인어족 왕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