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여신의 반려
후으으으.
이제는 더럽게만 느껴지는 중간계의 공기를 한껏 토해 내는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크롬벨 라이언하트…….”
으르렁거리듯 나온 슬로스의 말에는 짙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래, 한 수가 있었다 이거지?’
크롬벨이 거의 준비 과정도 없이 신화급 마법을 발현한 그 순간, 슬로스는 실로 오랜만에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절대적이라 확신한 자신의 권능이 흔들릴 정도.
물론 견뎌 내긴 했지만, 그 후유증을 흩어 내느라 거의 나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간단한 영파도 컨트롤하지 못할 정도로.
더 큰 문제는.
‘노을빛이라니, 설마 크롬벨이 그 파멸……은 아니겠지. 그놈은 그분의 무기인 워해머를 쓴다고 했다.’
그 소름 끼치는 파멸의 빛을 쓸 수 있는 놈이, 크롬벨 말고도 한 놈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아니지.”
크롬벨 놈은 그 수를 쓰기 위해 심상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을 터였다.
‘사도의 권능이 없음을 확인했다.’
다른 하찮은 인간들의 마나를 끌어들여 경지를 초월한 전투력을 보인 것은 인상적이었지만, 그것이 결코 사도의 권능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무심결에 뱉어 낸 말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후련함? 아니면 허탈함?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슬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나에게 이런 감정이 남아 있었나?’
천계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옛 동료.
언제고 직접 목을 꺾어 줄 생각이었는데.
……그래, 그 아쉬움일 것이다.
‘살아 있어라, 크롬벨. 내가 직접 다시 숨통을 끊어 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야, 파멸을 빛을 견뎌 낸 후유증이 육체에서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연스레 깨달았다.
자신이 몸을 추스르는 고작 나흘 사이에 다시금 눈살 찌푸리는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그린 아이가 소멸?]
자연스레 뻗어 나간 그의 정신파가 이제 유이하게 살아남은 마충 군단의 군주, 라스에게 닿았다.
[이제야 연락이 닿는군, 슬로스.]
[라스! 어떻게 된 거냐?]
[본토에 진입하기 전에 너를 기다릴 겸 재밌는 일을 준비 중이었다. 며칠은 더 기다려 보고도 소식이 없으면 홀로…….]
[그린 아이는 어떻게 된 거지?]
[알 게 뭔가? 시체놀이나 하는 놈 따위.]
하…….
‘그럼 그렇지.’
역시나 라스는 벌레들의 군주답게 생각이 없고 욕망만 충실한 놈이었으니.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직 마충 군단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건…….
[나조차 당했을까 봐 조심하긴 한 건가? 칭찬해 줘야 하나, 라스?]
[무슨!!! 그저 인간들을 확실하게 멸망시키기 위해 숨을 고른 것뿐이다. 재미있는 물고기들이 접촉을 해 오기도 했고.]
[물고기? 인어족을 말하는 것이로군. 그들에게 새로운 대표가 생겼나?]
[대표? 뭐, 그 비슷한 놈이 찾아왔다. 묘하게 마기를 품고 있더군. 놈과 내가 마련한 계략을 시작으로 한 번에 들이칠 생각이었다. 슬로스, 어떤가? 너도 이 작전에 숟가락을 얹어 볼 텐가?]
거만한 영파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린 아이와 자신의 소식이 끊기자 주춤한 것이면서, 이제는 오히려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감을 보인다.
‘답지 않게 무언가 수작을 준비한 모양인데.’
[마인 군단도 온전히 강림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뭐, 장군들을 다 잃었다고는 해도 허약한 인간들쯤이야 쉽게 처리하지 않겠나? 네 카르마에도 도움이 될 텐데.]
스스로 겁을 먹었었음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 마계에서 가장 번성한 군단의 주인이라는 아이러니.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대세에 마인족들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러유저 수준의 정예들 백여 명이 도움이 될 리가.’
장군들을 모두 잃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태 권능의 파편을 받은 최정예들을 더욱 아껴서 후대의 장군으로 키워야 했다.
[인어족에 얽힌 카르마도 느끼지 못하는가, 라스? 지금은 인어족이 내 병력이나 다름없다.]
[……꼼수를 써 놓은 것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제 와서 어찌한들 내 마충 군단이 만들어 낼 카르마를 따라잡지는 못할 테니.]
흐.
[슬로스. 합류하든 지켜보든 네 마음이지만, 후일을 생각한다면 알아서 나를 돕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흐, 흐흐흐, 프하하하하!”
라스의 엄포에, 육성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일이 꼬이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리도 듣게 된다 싶었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린 아이가 당했다면, 그분의 무기를 가진 놈의 짓이겠지. 그 파멸의 빛의 원래 주인.’
크롬벨이 죽었다고 본다면, 이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한 놈.
‘놈이 라스와 마충 군단을 어찌 상대할지 일단 지켜봐야겠어.’
흐.
[뭐, 그러도록 하지. 라스, 방심하지 않도록 해. 휴브리스가 죽고 러스트가 죽었다. 둘 모두 너보다 서열이 높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푸하하하하! 그 서열이란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이미 동대륙에서 깨달았다. 내가 쓸어버린 허약한 인간 놈들에게 몰이를 당해 죽은 휴브리스 따위가 내 위라니, 웃기는 소리 마라.]
[뭐?]
그 휴브리스가 몰이를 당해서 죽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일순간 혼란이 찾아오는데.
그 혼란과 상관없이 라스의 오만방자한 메시지가 계속되었다.
[정명한 신이 되실 그분의 아래 남은 세상의 불멸의 지배자가 될 것이 나다. 슬로스, 이제 시작할 진군의 시기에 네가 어떻게 나오는지 봐서 미래의 네 대우를 생각하겠다. 최선을 다하도록.]
놈은 벌써 전쟁이 끝난 것처럼 거드름을 피워 대고 있었다.
‘멍청한 놈.’
휴브리스와 마룡 군단은 이미 동대륙에서도 막대한 카르마를 벌어들였다.
그런 휴브리스가 죽었다면.
‘동대륙의 인간들도 만만히 볼 수 없다. 뭔가 있어. 아니면 그놈 때문이든지.’
결론을 내린 슬로스가 다시 입꼬리를 씰룩였다.
[뭐, 열심히 해 보도록.]
[그 거만한 자세를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슬로스.]
그는 더 이상 라스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저 멍청한 놈이 쓸 술수나 구경해 볼까.’
인류 연합과 마충 군단, 그리고 인어족이 서로 상잔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한다.
인류 연합이 이긴다 해도 라스가 그냥 죽지는 않을 테니, 인류가 기진맥진하는 순간에 자신이 나타나 그 파멸이란 놈을 처리하고 나머지를 정리하면 그만이다.
신화의 흔적이 사라진 현생 인류 따위야, 핵심 영웅 몇을 제거하고 나면 영혼살로 죽이면 끝이다.
혹여 섬에서 보았던 그 요상한 기술들이 일반화되었다고 해도, 처리하는 데 걸릴 시간만 좀 늘어나는 것뿐이다.
그리고 만약 마충 군단이 이긴다면?
‘중심이 되는 커다란 벌레 하나 치워 버리면, 나머지는 그냥 생각도 못 하는 곤충들일 뿐이다.’
그분께서 질책하실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지배자로 남겨 둘 칠죄종 하나는 필요하실 터이니.
다른 칠죄종들이 모두 소멸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혹시 모를 함정과 위험은 네가 모두 떠안아라, 벌레. 과실은 내가 딸 테니.”
찜찜함을 털어 낸 인류의 배반자가 살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 * *
“이젠 괜찮아?”
“응. 얻은 것도 있고…….”
끼이익.
타이니가 에스티나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우와아아!”
“광휘의 기사다!”
“타이니 경!”
“여기! 여기 한 번만!!!”
와아아아아!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이, 이게 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불굴의 후유증을 털어 내기 위해 회복에 전념하며 사실상 기절해 있던 그가 방문을 열자마자 생긴 일.
당혹스러운 것은 에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쓰러져 있는 이틀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들었는데, 벌써 이렇게까지…….”
“소문?”
그 말에 에스티나가 자신이 들은 소문을 간략히 전해 주었다.
광휘의 기사, 타이니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 우와아아아!
“구원? 내가?”
“뭐, 결과만 보면 크게 다르지 않긴 하잖아.”
에스티나가 눈짓으로 사방의 작은 성벽을 가리켰다.
지금 소리치는 사람들 역시, 타이니가 불과 엊그제 언데드 군단을 박살 냈다는 소문을 듣고 이 중소 도시 루소까지 찾아온 이들인 것이다.
그가 잠든 곳까지 용케 알아내서, 영주의 관저 근처까지 모여든 사람들.
“허…….”
타이니가 멍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는데.
“빛의 기사님! 제발 우리를 구원을!”
“축복해 주세요!!”
“여기, 여기 손을!!”
눈길이 닿는 곳마다 난리도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도 공명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전생에는 아예 세상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새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 기준으로 봐도, 이런 눈 돌아간 반응은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 우와아아아!
- 우어어억! 날 보셨어!
그가 시선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발작하듯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사람이 보였다.
맹목적인, 오해에 의한 광기.
그 시선은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빨리 떠야겠어. 지금 나 어디로 가야 해, 티나?”
스스로 뱉어 놓고도 정말 바보 같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차 하는데.
에스티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왜?”
“카룬……이었는데, 이젠 늦었어. 일단은 자유 도시 에낙센을 중심으로 인류 정예들을 집결시키고 있으니까…….”
타이니는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늦었다고?! 그럼 카룬은?”
“그게, 한 시간을 버티지 못했대.”
“뭐!?”
순간적으로 익숙한 얼굴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자신만만하던 헨리 왕자, 끝까지 왕을 지키려 했던 노기사 리암.
그리고 타이니가 크라켄을 돌아가게 만들고 오르투스의 재앙을 거둬 낸 이후 그를 향해 환호하던 사람들까지.
현생의 광휘의 기사라는 이름은 사실상 카룬에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사람들은!? 왕이나…….”
“몰라. 소식이 없어. 그리고 마충 군단이나 마룡 군단의 잔당들도 왜인지 카룬에서 하루 넘게 안 움직이고 있다고 해.”
“대체 왜 카룬 혼자 싸운 건데! 피하거나 합류하지 않고!?”
“인어족의 공세 때문에 카룬에서 벗어날 틈이 없었을 거야, 아마.”
“아니, 그게……!”
괜히 버럭 소리를 지르다 보니, 이게 에스티나에게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미안. 너도 정신없었을 텐데.”
그 말에 에스티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적어도 이렇게 한 번쯤은 감정을 풀어놔야 안 지치지.”
빙긋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니 괜히 더 미안해져서 먼 산만 바라보는데.
“일단 에낙센으로 가자. 테르티우스에서 인어족을 몰아낸 다른 동료들도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음……. 안 좋은 소식이 더 있어.”
“또!?”
더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크롬벨 경이 의식 불명 상태래. 그래서 신전의 교황까지 에낙센으로 달려가고 있다나 봐.”
“크롬이……!?”
- 아우우우우!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이를 갈며 반사적으로 월랑을 소환해 올라탔고.
그 순간.
“우와아아아아!”
“신수다!”
“신의 정령이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그에 타이니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자, 에스티나는 웃으며 상공에 거대한 독수리를 소환했다.
우우우웅.
“그래도 카일룸이 빠르겠지? 가자.”
쓴웃음을 지은 타이니와 에스티나가 그대로 뛰어올라 카일룸의 등에 올라타는 순간.
- 빛의 기사! 여신의 반려!! 우리를 구원하소서!
뒤늦게 합창하듯 들려온 목소리에 에스티나의 인상이 순간적으로 팍 일그러졌다.
여신의 반려?
“저건 또 무슨 헛……!”
카일룸을 움직이다 말고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르려던 에스티나는 이내 멍한 표정의 타이니를 발견하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신경 끄라며?”
“어, 알았어.”
내 거야. 아무리 여신이라도…….
중얼거리는 에스티나의 목소리에, 타이니는 마음이 무거운 와중에도 피식 웃을 수 있었다.
‘그래, 정말 멀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사라진 나태. 다가오는 마충 군단.
그 모든 것을 처리하고 나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주적이 강림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정말 끝이 다가온다.’
이 긴 싸움의 끝이.
허공을 바라보는 타이니의 시선이 투지로 불타오를 때.
거대한 독수리의 정령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