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카룬의 재앙
“전하, 지금이라도 후퇴하시는 게…….”
“그만. 리암 경, 그 얘긴 끝난 것 아니었나?”
현왕의 아들에서 이젠 성(聖)왕으로 불리게 된 헨리 1세가 단호하게 리암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왕실 기사단장인 리암도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연합군의 정예들은 대다수가 대륙 동부 해안가에 몰려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우리가 군을 물리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카룬이 항전하다가 섬에 갇히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걸세. 대신 그 폭뢰라는 것들을 대량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나? 제조법까지 공유해 주고 말일세. 무엇보다 지금은 백성들을 대피시킬 시간이 없어.”
인어족의 공세가 끝나자마자, 마족이 다가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섬나라인 카룬에서 불과 며칠 남짓한 시일 안에 왕국민들을 전부 피난시킬 수는 없다.
“왕실과 군대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후퇴는 불가하다!”
“하지만 인류 연합의 전력에 비하면 우리 카룬의 역량은 많이 부족합니다, 전하. 부디 전하의 옥체라도 보존하심이…….”
“왕이 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리암 경?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게.”
젊은 왕의 말에 리암이 무거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헨리 1세가 수도 오르투스를 재건하고 동대륙과의 무역을 회복하면서 보여 준 역량은 분명 뛰어났지만, 그럼에도 성왕이라는 호칭은 과한 감이 있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카룬의 국민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더욱 리암은 물러설 수 없었다.
“신은 전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말년에 간신히 오러를 깨쳤습니다.”
우웅.
그의 결심을 말해 주듯, 돌 속성의 오러가 그 늙은 몸에 깃들며 무서운 힘을 부여했다.
암벽의 기사라 불리던 노기사는, 지난번 광휘의 기사 방문 이래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완벽한 오러를 깨우쳤다.
재앙의 시대에 조국을 지키고자 하는 열망이, 늙은 기사의 부족한 재능과 나이를 극복하게 도와준 것이다.
대륙에 알린다면 12대 기사가 아닌 13대 기사로 불릴 수도 있을 만한 자랑스러운 성취였지만, 그는 말년을 오직 이 왕의 곁에서 보내고자 하였다.
“안다. 그대 역시 왕국의 자랑이니.”
“그럼에도 상황이 암담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하.”
다만, 그런 성취에도 그는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는데.
“인어족의 사면 공습으로 이미 많은 피해가 있었습니다. 배가 뜨지 못한 지 보름이 지났고, 물자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거기다…….”
이미 카룬 왕국군에 쌓인 피로와 희생.
그것은 지난 며칠간의 정전만으로는 회복될 수 없는 수준의 문제였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동대륙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마물들의 군대에 대한 소문이었다.
동산만 한 괴물들과 벌레 떼가 몰려온다는 소문.
“소문을 반의반만 믿더라도, 들이닥쳐 오고 있는 괴물 중 저보다 높은 경지를 개척한 마족이 적어도 열입니다. 비통하지만, 본국이 이길 확률은…… 없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어 후일을 기약해 주십시오, 전하!”
왜 연합은 카룬을 지원하지 않는 건지 원통했지만, 그의 힘으로는 대세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단 한 명 왕의 의지도.
“소문대로 그런 괴물들이 몰려오는 거라면, 우리 왕국은 멸망하겠지. 그럼 나 하나 살아남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것이 오히려 수치야.”
젊은 왕이 패기는 자랑스러웠지만, 그렇기에 또 걱정스러웠다.
“……그렇다면 반드시 비처에 숨어 계셔야 합니다. 신이 목숨을 걸고 왕궁을 지키겠나이다!”
왕국을 부흥시킬 만한 이 인재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겠다.
리암이 그리 결심하는데.
왕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지켜야 할 것은 내 목숨이 아니다. 그대가 진정 싸우겠다면 일선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라.”
“아니됩……!”
“그래야 그가 왔을 때, 내가 고개를 떳떳이 들 수 있으니.”
“……예? 그라면?”
얼떨떨한 리암의 시선에 헨리 1세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타이니 경이다. 중부에서 또 하나의 대악마를 끝장낸 광휘의 기사한테서, 회복되는 대로 카룬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왔네. 세계수의 수호자와 함께 말이지. 연합은, 아니 적어도 타이니 경은 우리 카룬을 버리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리암에겐 왕의 흐릿한 미소가 어쩐지 더없이 밝아 보이는 듯했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 비친 자그마한 빛줄기처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희망도 조건부였다.
“아무리 빨라도 하루 아니면 이틀. 타이니 경이 상처를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적어도 그 기간만큼은 버텨야 하네. 리암 경,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마족의 군대가 지척에 다가왔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 어찌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무, 물론입니다! 전하!”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닐 테니, 나도 직접 전장에 나서겠네.”
“예!?”
“왕실 보고까지 열겠네. 왕실의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세.”
“아닙니다. 그래도 참전은!!”
“그대가 나를 지키면 되지 않겠나. 아니면 그조차 자신이 없는가?”
“……알겠습니다. 전하.”
리암은 결심했다.
‘왕실 보고라…….’
왕국의 군비 예산을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이틀을 버텨 보기로.
어떻게든 말이다.
* * *
- 모두, 폭뢰를 최대한 자신의 자리에 쌓아 놔라!
- 조심해라! 혹시라도 자극해서 터트리는 놈은, 폭발에 죽기 전에 거시기를 잘라 주겠다!
- 기사들은 왕실 보고에서 마법 스크롤과 아티팩트를 최대한 꺼내라!!
연신 외쳐 대는 지휘관들의 목소리에 병사들은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고작 3일 쉬었는데…….”
“미친 인어 새끼들 다음에는 괴물이라고……?”
“미친 세상이야. 미친…….”
투덜거리면서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인어족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비록 그 기간이 짧다 한들 이미 베테랑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극소수는 이미 극한의 피로감과 긴장감이 겹쳐진 탓에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나, 날 내버려 둬!”
“야! 너 뭐 하는 거야!? 저놈 잡아!”
“난 괴물한테 잡아먹히기 전에 여신께 갈 거야!”
한 병사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붉은 돌을 잔뜩 들고는 동시에 손아귀에 가득 힘을 주었다.
“이 미친놈이……!!”
주변의 기사나 병사들이 경악하는 순간.
꽈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그 병사는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아아악!”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병사 몇이 불길에 휩싸이며 성벽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사기가 무너지고 있다. 적어도 이건 전하의 판단이 맞아.’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암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전체 주목!!”
오르투스의 내성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엄청난 고함 소리.
카룬의 병사라면 누구나 아는 목소리가 직전의 참상에서 병사들이 시선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준비되셨습니까, 전하?”
“그래.”
그 뒤편에서 국왕 전용 초월무구 아티팩트 세트, 모험 왕의 보물들을 착용한 헨리 1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 전쟁은 전하께서 직접 참전하신다!!”
그 고함과 함께, 화려한 이펙트를 주는 갑옷을 걸친 젊은 왕이 병사들 앞에 등장했다.
그리고.
[짐이 그대들과 함께 이 나라를 지키겠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용사들 모두를 기억하겠다! 싸우자, 카룬의 백성들이여! 우리의 땅과 가족을 지키자!!]
왕의 목소리가 마법으로 확성되며 크게 울려 퍼지는 순간.
좀 전의 참상으로 생긴 일시적인 침묵이 한순간에 깨어져 나갔다.
“우와아아아아!”
“국왕 전하 만세!”
“폐하 만세!!”
“폐하는 제국…….”
“닥쳐!! 우리 폐하 만세!!”
왕이 직접 참전한다.
왕이 죽을 자리에 나설 리가 없다.
즉, 이 전쟁은 이길 수 있다.
이 간단한 삼단 논법를 떠올린 병사들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저기……!”
하늘 끝까지 솟구친 그들의 사기가 진정되기도 전에, 대낮의 동쪽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적이다!”
“괴물들이다!”
“싸우자!”
“이기자!!”
평상시라면 대번에 겁부터 먹고 시작했을 전투.
하지만 직전의 흥분은 병사들의 겁을 어느 정도 상쇄시켰고, 초반의 선전을 이끌었다.
그래, 적어도 초반엔 그랬다.
“발사!!”
파바바바바바박.
지휘관의 구령에 맞춰서 쏟아지는 화살.
하늘을 가득 메운 벌레 떼는 아무렇게나 겨누어도 맞을 정도로 많아 보였지만, 정작 화살을 맞고 추락하는 벌레는 몇 마리 없었다.
결국 벌레 떼는 순식간에 시야를 검게 물들이며 다가왔고.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많은 벌레 떼의 접근에 지휘관들의 안색 역시 순식간에 파랗게 질렸다.
“폭뢰 투척!! 보이는 대로 투척해!!”
쾅! 콰아아앙!
위이이잉!
“아아아악!”
사람 주먹만 한 검은 벌이나 벌레들이 붉은 돌의 폭격 속에 터져 나가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마충들이 달려들어서 폭뢰를 던진 병사를 갉아 먹었다.
“이놈들!”
“누구 맘대로!!”
파바바박.
쾅!
기사나 마법사들만이 적들에게 그나마 유의미한 타격을 입혔지만, 그런 그들 역시 결국 마나가 떨어지고 나면 끝없이 달려드는 벌레 떼에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하늘을, 아니 사방을 가득 메운 벌레 떼가 끝없이 비명만 생성하는데.
“전하!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쇼!!”
콰콰쾅!
굳건한 바위의 오러를 두르고 대검을 휘두르는 리암만이 눈에 띄는 용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내 걱정은 말게!!”
다행이라면.
콰콰쾅!
모두가 합쳐질 경우 초월무구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된다는 모험 왕의 아티팩트 세트는, 4서클에 불과한 헨리 1세가 마도사급 이상으로 전투 마법을 사용하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그럼에도 리암의 딱딱한 표정은 펴질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온통 비명만이 가득한 전장.
눈앞에 보이는 모든 벌레가 적이다.
위이이이이잉!
쾅! 쾅!
가장 작은 것이 주먹만 하고 큰 것은 머리통만 한 벌레들이, 소름 끼치는 이빨이나 꼬리 침을 사람들에게 박아 넣고 있었다.
그대로 사망하면 그나마 다행.
“커어억!”
숨이 붙어 있는 일부 병사들의 입이나 상처에 벌레들이 달라붙어 새하얀 알을 까 넣는 장면은, 리암의 칠십 평생 처음 보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광경이었다.
고대의 용사 크롬벨이 그토록 경계했던 마충 군단의 실체.
그것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이틀…… 이틀이라니!? 이런 괴물들을 상대로?’
도무지 인간이 상대할 수 있는 괴물 군단이 아니었다.
심지어 더욱 참담한 사실은.
‘이건 간을 보는 거다.’
하나하나가 강자라는 마룡 군단의 잔당들은 등장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이 벌레 떼들의 정예들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 타이니 경이 전하길, 그가 동대륙에 있을 당시 장군급 둘과 부관급 넷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오러익시더급 마물이 네다섯은 있을 거라 각오해야 한다.
지금 마충 군단은 하나하나가 하급 마물에 불과한 벌레들만 보내고도 오르투스의 병력을 한순간에 무력화시킨 것이다.
“전하!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알겠네”
울분이 가득한 왕의 목소리는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에 묻혔지만, 리암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결사 항전을 각오하던 왕도 참담한 현실 앞에선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전투의 시작이 그들의 뜻이 아니었듯이, 그 결정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 왕이라? 꽤 큰 카르마가 느껴지는구나. 가지고 있는 신의 무구도 그렇고. 잡아 와라.]
소름 끼치는 영파가 전장에 울려 퍼지더니.
[1장군 엑시드, 군주의 명령을 수행하겠나이다.]
서쪽 성벽을 향해 내달리려는 그들의 앞에, 뿔이 난 커다란 사마귀가 등장했다.
한쪽 발이 잘린 듯한, 기묘한 사마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