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네놈, 겁쟁이구나
꽈아아아앙!
노을빛 유성이 만들어 낸 폭발은 전황을 한순간에 뒤바꾸어 놓았다.
흑마법의 기운이 산산이 흩어지고, 성기사들마저 그 충격파 속에서 주춤거리며 물러나는데.
그조차 타이니의 마음에 차진 않았다.
‘약해.’
온몸의 통증은 불굴의 권능으로 유예하고 있긴 하지만, 이전에 얻은 부작용을 미처 털어 내지 못한 탓에 유성 떨구기의 최대 출력이 눈에 띄게 저하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네놈이 그 질투? 칠죄종이라는 것이 어디서 숨바꼭질이나 하고, 안 쪽팔리냐?”
감각을 최대한 곤두세워 검은 기사의 정체를 파악한 뒤 최대한 태연한 안색으로 놈을 도발하는데.
[노을빛!? 설마 네놈이……!?]
상대의 반응이 이상했다.
갑자기 주춤 물러서는 검은 기사.
직전의 유성 떨구기를 놀라운 움직임으로 피해 내고 여파까지 흩어 내 버린 놈 같지 않았다.
‘설마 겁먹……. 아니, 그럴 리가.’
어처구니없었지만, 그는 곧 잡생각을 떨쳐 내고서 주춤하는 놈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콰아아앙!
‘속전속결!’
자신의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적이 알기 전에 끝장을 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내 그대로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돌진하는 만큼 뒤로 물러서는 적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콰콰콰.
반경 1km는 될 듯한 숲을 한순간에 돌파하며 다가가면, 뒷걸음질로 그만큼 물러서는 적.
‘아니, 뒷걸음질도 아닌가.’
뿌옇게 흐려진 적의 발을 보며 이를 간 타이니가 이내 돌진하던 자세 그대로 영혼의 파트너를 불러냈다.
‘월랑!’
- 컹!
우드드득!
그의 몸이 한순간에 부풀어 오르고 체모가 새하얗게 변하는 순간.
가속한 그의 몸이 물러서던 검은 기사를 따라잡았다.
쾅!!!
[하?]
끼리리리릭.
결국 물러서는 것을 멈추고 대검으로 녹턴을 흘려 내려던 그린 아이는, 반강제로 힘겨루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워해머에서 나오는 기묘한 흡착력이 흘리기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이내.
쩌저저저적.
그가 들고 있는 대검에 금이 가기 시작하니.
투구 속 녹색 불꽃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그린 아이가 형상화시킨 대검은 반신의 경지에 오른 그의 육신의 일부.
웬만한 데모닉 웨폰을 능가하는 강도의 대검에 한순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니까.
[이런 미친……!?]
콰드드득.
그 반응에 타이니는 싱긋 웃음을 보였다.
“네놈 주인한테 선물 받은 건데, 어때?”
[헛소리!]
쾅!!
동시에 발길을 내지른 그와 그린 아이가 서로의 몸을 주르륵 밀어 냈다.
“쉽게 안 간다 이거지? 짜증 나게.”
타이니는 자신의 역량이 확실히 떨어졌다는 것을 다시 체감하며 이를 갈았고.
금이 간 대검을 다시 유령의 몸으로 흐트러트리며 다른 검을 형상화한 그린 아이는 녹색 불꽃의 기세를 가라앉히며 자세를 낮췄다.
[파멸, 네놈! 정말로 신성에 닿았어! 인간이 어떻게 신성을 얻었지? 어떻게!?]
“파멸?”
생각지도 못한 별칭에 타이니가 어리둥절하는데.
그 반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검은 기사가 갑자기 살기를 뿜어냈다.
[너무 과장됐다 의심했는데, 오히려 축소해서 전한 거였어! 슬로스 이놈이 나를……!]
뭔지 몰라도 단단히 착각을 하는 듯한 모양새.
타이니는 놈에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로 했다.
쾅!
[큭!]
[그렇게 혼자 떠들다 맞아 죽어라!]
타이니는 영파로 놈을 자극하며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꽈꽈꽝!
온몸이 새하얀 거한이 노을빛 번개가 되어 휘몰아치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듯하던 검은 기사는, 어느 순간 갑자기 기세를 높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네놈! 정상이 아니로구나!!]
쾅!
검은 기사가 제 머리를 노리는 워해머를 피해 주저앉으며 미끄러지듯 움직여 타이니의 다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팽그르르 회전하는 타이니의 몸통을 향해 찔러 오는 검.
쾅!
억지로 해머를 들어 검격을 막은 타이니의 몸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우르르르릉.
콰콰콰.
‘젠장.’
숲의 나무를 수십 그루 무너트리며 나가떨어진 타이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정상일 때의 7할 정도인가…….’
애초부터 인간을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단련해 온 현생의 육신은, 9단계에 오른 지금으로선 이미 웬만한 마족을 가뿐히 능가하는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휴브리스 같은 규격 외의 괴물만 아니라면, 웬만한 마족은 힘으로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설령 3할의 손실이 있다 해도 말이다.
문제라면, 지금 상대하는 적이 그 웬만한 마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발목 부근이 반쯤 연기로 변하는 괴상한 육체 상태를 보면 놈의 몸이 무겁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한 방 한 방 부딪쳐 올 때마다 느껴지는 무게감은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압도할 정도였다.
‘지금 상태에서는 스피드는 내가 좀 우위, 힘은 놈이 좀 우위다.’
상식적으로는 속도가 빠른 것이 전투에 더 유리하니, 그럼에도 이길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그의 상태가 문제였다.
머리는 최대치의 움직임을 연상하고 있는데, 몸이 따라 주질 않아 엇박자가 나는 것이다.
항상 전력을 쏟아 내는 전투만 해 온 그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
물론 이젠 그것을 인식했으니, 쉽게 조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만 있으면 되는데.’
상대방이 그런 시간을 주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널 찢어 죽이고 슬로스에게 따져야겠어. 흥!]
어느새 타이니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대검.
이글거리는 암흑 오러가 검 끝에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머리를 관통할 테고, 피한다면 그 암흑 오러가 어느 방향으로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면으로 해머를 휘둘렀다.
“하!”
꽈아아아아아앙!
노을빛과 검은빛이 교차하며 터져 나온 폭음.
콰콰콰콰콰.
충격파가 숲의 한가운데를 터트리고 흙먼지를 비산시키는데.
그 중심에서는 검은빛이 노을빛을 연달아 몰아붙이고 있었다.
[발악해 보라고, 파멸! 푸하하하!!]
콰콰콰쾅!
시야가 가려지는 것 정도로는 전투에 지장을 받지 않는 괴물들.
밀리는 노을빛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다는 듯, 움직임을 줄여 가며 수세를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 그의 가슴속에는 분노가 쌓여 가고 있었다.
[과연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콰콰콰콰콰쾅.
오러 신경망을 최대치로 가동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막아 내면서, 타이니는 이를 갈았다.
‘고작 하위 서열 칠죄종한테 이게 무슨……. 하!?’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그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지?’
칠죄종 하나를 잡기 위해 동료들 모두와 힘을 합쳤던 일도 얼마 되지 않았다.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라도 스스로 오만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 착각이었다는 걸 그 순간 체감했다.
그리고 각오를 다졌다.
‘오만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험한 꼴 봐야겠다.
결심하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콰콰콰쾅!
한 번의 강한 충돌 후 놈에게서 다시 떨어지는 짧은 순간.
그는 그대로 몸을 열어 놓고 녹턴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적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죽여 달라는 거구나!]
푸우우욱.
놈의 검은 대검이 ‘불굴’의 권능까지 파훼하며 그의 오른쪽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놈의 공격도 거기까지였다.
[무슨……!?]
그대로 타이니의 몸을 두 쪽 내려던 대검이 마치 그의 육체에 ‘잡힌 듯’ 움직이지 않을 때.
검은 기사의 머리 위로, 노을빛이 이글거리는 거대한 워해머가 떨어졌다.
번쩍.
꽈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르르릉.
연이은 충격이 일으킨 흙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 사방을 휩쓸며 폭풍과 지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충돌의 맞은편에서.
푸슉.
“크으윽.”
콰지직.
대검, 아니 적의 육체의 일부를 멸살의 권능으로 부숴 버린 타이니가 정면을 응시했다.
‘젠장, 빗나갔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아니, 뼈를 주고 머리를 박살 내겠다는 각오로 내지른 일격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적도 완전히 회피한 것은 아니었다.
[흐, 흐흐흐. 슬로스의 말대로 고스트 계열로 몸을 바꾼 것이 천운이었군.]
스르르륵.
검은 연기로 화했던 그린 아이의 몸이 다시금 검은 기사의 형태를 취하는데, 그런 놈의 오른쪽 반신이 온전히 형상을 취하지 못하고 흐물거리는 것을 보면 그 호기에 찬 영파도 허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라면 놈보다 타이니의 상처가 더 심각하다는 것.
우우웅.
그의 몸 안을 파고든 암흑 오러가 마나바디를 흐트러트리면서 치명적인 부상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젠장, 불굴의 권능도 약해졌어.’
인어족 학살의 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대가는 신체 능력의 저하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이 모험을 절반의 실패로 만들었다.
하지만 타이니는 마나를 움직여 출혈을 막고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자! 반쪽 유령아, 끝장을 보자!”
싸움의 반은 기세다.
평생을 그리 믿고 언제나 전력을 다해 몸을 내던지며 살아온 기사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네놈, 이 상태로는 나와 결착을 보더라도 결국 숨어 있는 슬로스에게 끝장이 날 것이다.]
적의 반응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뭐?”
[우리 칠죄종의 서열 1위, 한때 인간이었던 그 비겁한 놈이 몸을 숨긴 채 나를 네 앞으로 던져 놓았다. 아마 어디선가 너를 지켜보고 있겠지. 그리고 지금 네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면, 놈이 손가락 하나로 네놈을 찢어발길 것이다.]
나태가?
그린 아이의 영파를 듣는 즉시 자연스레 확장되는 감각.
하지만 소울 사이트까지 써서 일대를 훑어봐도, 성기사들을 제외한 다른 움직임은 잡히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태가 틈을 노리고 있다?”
[그렇다. 그래야만 이 모든 상황이 설명이 돼. 놈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인데, 놈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감이 왔다.
‘저놈, 겁쟁이다.’
처음 들었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칠죄종이 겁쟁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같겠지만, 그가 보기엔 분명했다.
계속 싸우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전장에서, 모험을 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건 전사의 자세가 아니다. 겉만 기사 흉내를 내는 놈이야.’
겁쟁이.
죽음이 두려워서 동료를 팔려고 하는 놈에게, 그 이상의 다른 비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투에서 적이 겁쟁이라면, 자신에겐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개소리 말고 끝장을 보자!”
타이니는 그 순간 다시 돌진을 시작했다.
억지로 상처를 봉합하고 남은 힘을 긁어내서 녹턴에 담았다.
[이런 미친놈이! 생각을 하라고……!]
질투, 그린 아이가 기겁을 하며 스르륵 뒤로 물러서는데.
[지금!]
타이니가 영파로 신호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그린 아이의 뒤에서 새하얀 건틀릿이 튀어나오며 유령의 형상으로 변한 놈의 상처를 부여잡고 신성이 담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번쩍!
“여신의 뜻으로!!”
[끄흑!? 네놈!?]
평상시라면 코웃음을 치고 무시할 만한 타격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린 아이는 멸살의 권능에 몸의 반이 스러진 상태로 전면의 타이니만을 경계하고 있었으니.
그 모든 상황이 어우러져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타이니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끝이다!”
쾅!
[끄아아악!]
어느새 그린 아이의 코앞에 다가온 워해머가 놈의 나머지 반신을 강타하는 순간, 전투의 흐름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