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화. 깨어나다
타이니는 꿈을 꾸었다.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꿈을.
그곳에서는 더는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고,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자신과 동료들이 완벽한 전쟁 억제력을 발휘하는 덕에 인류 간의 전쟁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그 평화 속에서 엘븐하임에 머물거나, 전 세계를 떠돌며 에스티나와 함께했다.
-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 생각할 만큼 행복한 나날들이었고, 그 시간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모든 환상들이 지워지더니, 그리웠던 이가 나타났다.
기억 속 모습 그대로.
그녀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대로 달려가 껴안고 싶었지만, 그 거리는 아무리 달려도 좁혀지지 않았다.
- 누나!!!
간절히 소리를 지르는데, 그녀가 조금은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 아직,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리고 그녀의 손짓에 따라, 좀 전의 환상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 그 모든 것이 현실이 될 수 있어.
- 조금만 더 힘을 내 줘, 틴. 할 수 있지?
슬프고도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누나의 얼굴.
그 순간, 타이니는 저릿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현실을 자각했다.
욱신.
신성을 손에 넣고 권능을 완성하고도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치는 현실.
욱신.
한계를 몇 번이고 초월한 몸이 저려 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무게가 다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그는 그리웠던 이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보였다.
- 응. 할 수 있어.
할 수 없어도 해야 했다.
그 말을 기다렸던 걸까.
내내 우울한 표정이던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 ……힘내, 내 동생.
“……응, 그럴게. 반드시.”
사라져 가는 누나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의지를 다지는 순간, 그는 자신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을 자각했다.
그리고.
“깨어나셨다!”
“각하께 알려!”
“드디어…….”
온몸에 쏟아지는 따스한 빛.
신성력의 샤워를 느끼며 타이니는 한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 회복되신 겁니까?”
“신성력을 쏟아부었는데도 회복이 더디셔서…….”
“곧 공작 각하께서 오실 겁니다.”
일어나자마자 주변에서 쏟아져 오는 그 말들은, 누나를 보았던 꿈의 여운을 지워 내고 현실감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여신께서 보우하사, 신성력이 통한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신성을 바탕으로 한 권능을 남용해서 찾아온 부작용에 신성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신성력을 쏟아붓는 사제들의 모습을 보면 솔직한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예? 아, 예!”
쓴웃음을 지으며 나온 말에 사제들이 황급히 신성력을 거두는데.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며 완전 무장을 한 검제가 들어왔다.
“영감님, 시간이 얼마나……?”
“타이니!!! 나태가 나타났다! 그리고 크롬벨 경과 동시에 실종됐어!!”
다급한 표정, 그리고 그보다 더 다급한 말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고작 하루 사이에…….”
허를 찌른 질투의 강림. 그리고 나태와 크롬벨의 동반 실종까지.
기절해 있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지만, 그동안 너무 큰 일이 벌어졌다.
‘인어족 수십만을 쓸어버렸으니까. 사흘은 쉬어도 될 줄 알았는데.’
고작 하루 사이에 큰 문제가 두 가지나 생겼다.
그중에서 일단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히 칠죄종 서열 1위 나태였다.
고대 인류의 배신자, 솜누스.
“나태와 크롬 얘기부터 하시죠. 나태가 강림했다고요? 실종은 또 무슨 말입니까?”
“어부 연합에서 크롬벨 경이 붉은 머리 마인을 상대로 바다를 뒤집는 격전을 벌였다고 했는데, 노을빛 섬광이 한차례 번쩍인 뒤로 둘 다 사라졌다는군. 들어온 정보는 그게 다야.”
그 황당한 상황은 그렇다 치고.
“……노을빛이요?”
노을빛 섬광이 번쩍인다는 말이 그에겐 너무나도 익숙했으니까.
“그래. 나도 전후 사정은 모르겠어.”
“혹시 나태가 크롬을 잡아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그건 아닌 것 같아. 그 전투 묘사를 반만 믿는다 해도, 크롬벨 경은 저번에 보인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을 거야. 파도의 세례를 개량해서 어부 연합 모든 전투원의 마나를 싹 다 끌어다 썼다고 하더라고.”
“그런 게, 되는 거였습니까?”
군단 스킬, 파도의 세례라면 그도 여왕과 싸울 때 잠시 응용해 본 바가 있다.
자신도 좀 더 연구하면 그걸 개량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의 마나를 그렇게까지 대량으로 컨트롤하는 건 나도 자신이 없는데…….’
쿼드러플 8단계라면 그런 짓도 가능한 것일까?
그 많은 인원의 마나를 한 사람이 유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어쩌면 크롬벨은 경지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투를 벌였을 수도 있다.
“거기다 어부 연합 사람들이 마족의 비명 비슷한 것을 들었다고도 했어.”
“……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크롬벨이 일방적으로 당했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다만 둘 다 실종되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크롬도 나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겁니까?”
“그래. 그래서 도무지 상황을 알 수가 없어. 그게 문제야.”
“그럼 당장은 질투를 찾는 데에나 주력해야겠군요. 숨어 다니는 칠죄종이라니, 어쩌다 그런 놈이…….”
“그놈도 큰 문제다. 하루 사이 대륙 중부에서 희생자가 수십만이 넘게 증가했고, 몇 개의 도시는 아예 죽은 자들의 도시로 변했다. 최악의 사태야.”
“그런…….”
“더구나 그 질투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숨어 다니는 통에, 수호자님이나 다른 초인들도 찾지 못하고 있어!”
“빌어먹을.”
낮게 중얼거린 욕설이 서로의 입에서 동시에 나온 순간 움찔한 두 사람은, 또다시 동시에 한숨을 쉬고는 똑같이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닮아 가는 느낌이라 굉장히 찜찜한데.
어째 검제의 표정이 더욱더 안 좋아 보였다.
에이 씨.
“……놈이 모습을 감춘 덕에 고작 수십만밖에 안 늘어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영혼살이라면 수백만을 죽이는 것도 쉬운 일이었을 텐데요.”
“낙관할 일이 아냐! 그렇게 죽은 이들이 거의 다 병사라는 게 문제다. 그것도 보급 부대! 연합의 보급이 끊기면 현지 조달만으로는 한계가 곧 온다. 더구나 그 소문까지 퍼지면서 중부 지방은 지금 패닉에 빠져들었다!”
“마냥 낙관한 건 아닌…….”
“갓 핸드 경이 성기사단을 모아서 언데드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늘어나는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단 말이다!”
“……쩝.”
조금 억울했지만 굳이 따지고 들 상황도 아니었기에 닥칠 수밖에 없었다.
“끄응. 어쨌거나 떠들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질투 그놈부터 찾아야지. 소울 사이트가 필요하겠네요.”
“그래. 수호자님을 비롯해 랑켄 평야에 주둔 중이던 제나스와 블루윙, 그리고 사신과 아르곤까지 놈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아, 그럼…….”
“수호자님은 혼자 움직이지만 대정령 카일룸이 있으니 회피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고, 다른 이들은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뭉쳐 다니고 있어. 지금으로서는 성기사단과 함께 움직이는 갓 핸드 경이 제일 위험해. 그쪽부터 가 보거라.”
“……예.”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검제의 말은 타이니에게 반문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뜻일 터였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걸리는 건.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요?”
“나와 그리드, 문나이트, 저릭 공, 그리고 첫 번째 망치는 일단은 이곳에 남아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그렇게 뭉쳐서 놈을 찾으러 다닐 겁니까?”
“우리가 수색에 도움이 될 것 같으냐? 게다가 그렇게 되면 자유 도시의 해안 방어선을 지킬 사람도 없다. 그리고 잊지 않길 바란다만, 지금 동쪽 바다에서는…….”
“……마충 군단도 오고 있죠. 마룡 군단의 찌꺼기들까지.”
갈수록 첩첩산중이라.
“일단 질투부터 빠르게 잡아야겠군요.”
“그래. 지금으로서는 믿을 게 너밖에 없다.”
“숨어다니는 칠죄종이라니. 이 무슨…….”
“그것 역시 우리가 잘 싸워 온 증거 아니겠느냐? 특히 네가.”
“……참 끔찍한 증거네요. 하.”
타이니는 투덜거리면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욱씬.
역시 예상보다 빨리 깨어난 탓인지 몸이 완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깨어난 거지……?’
기절하기 전의 짐작대로라면 적어도 사흘은 꼼짝도 못 하고 쉬어야 했다.
일주일 내내 끝없이 전력을 쏟아 내고도 고작 사흘 만에 회복된다는 것 자체가 권능 불굴의 놀라운 힘을 보여 주는 것인데, 하루 만에 깨어났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꿈에서 만난 에리나 누나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누나, 누나가 더 늦지 말라고 나 깨운 거야?’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왜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럼, 영감님. 제가 질투 처리하고 올 동안 여기 잘 뭉쳐서 숨어계십쇼.”
적당히 검제의 속을 긁어 주고 바로 출발하려는데.
“그래, 부디 더 이상의 희생이 없도록 최대한 빨리 처리해 다오.”
평상시라면 물고 늘어졌을 검제가 그 농담조차 받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상황의 다급함을 말해 주는 것 같아서, 방을 나서는 타이니의 발걸음은 조금 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북쪽에서 언데드 흔적이 있는 곳부터 훑어. 나는 남쪽에서부터 올라갈 테니까.”
“컹!”
에낙센에서 나서자마자 타이니는 월랑과 남북으로 갈라졌다.
월랑은 북서쪽으로 보내고, 그는 남서쪽을 탐색하기로 한 것이다.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지금이라면, 월랑과 대륙 단위로 떨어져 있어도 실체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일단 칠죄종을 찾는 게 최우선이다. 웬만한 건 무시해.’
- 컹!
욱신거리는 몸을 다시금 불굴의 권능으로 억눌러 가며, 타이니는 그대로 허공을 밟으며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대륙 중부에 악마가 강림했다.
사람들이 마을 단위, 성 단위로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산 자를 물어뜯는 괴물이 되어 배회한다.
재앙의 와중에 소름 끼치는 소문이 빠르게 대륙에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을 만들어 낸 악마, 칠죄종 그린 아이는 저물어 가는 해를 보며 한 어둑한 숲속의 그림자에 녹아들어 있었다.
[슬로스. 네 말대로 동부의 인류 연합군으로 향하는 보급대를 전부 내 권속으로 만들었다. 다음 지시를 바란다. ……슬로스?]
역시나 대답이 없다.
어찌 된 일일까.
‘분명히 강림한 것은 느꼈는데.’
며칠 시차를 두긴 했지만, 놈은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강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쪽에서 큰 파동이 번지더니, 갑자기 놈의 소식이 끊겼다.
‘슬로스가 인간한테 당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슬로스가 당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놈이 자신에게도 숨긴 채 무언가 음모를 꾸민다면,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위험할 테니까.
‘지금의 인간계는 위험하다.’
마계 대전 직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불안이 차오르는 순간, 그는 더욱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중간계를 미친 듯이 누비며 연약한 생명체들을 ‘수확’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다른 칠죄종을 죽인 정체 모를 괴물, ‘노을빛 파멸’이 찾아올 지도 몰랐다.
첫 수확의 때에 그 짐승 신의 종자를 놓친 대가가 뼈아프게 느껴졌다.
‘너무 빨리 소문이 퍼졌어…….’
놈을 놓치지만 않았다면, 진작에 인류 연합군의 보급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권속을 만들어 대륙에 뿌림으로써 중간계에 혼란의 씨앗을 심어 놨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에는 장군급 언데드 몇 개체 정도는 모일 만한 카르마가 다시 쌓였을 것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원래의 군단을 재건하고도 남을 카르마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글렀다.
‘이제는 기다린다. 슬로스가 움직일 때까지, 혹은 라스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끝까지 그렇게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눈앞에 지나치게 혐오스럽고 먹음직한 먹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저건…….’
숲의 어둠에 몸을 숨긴 그린 아이의 시선이, 새하얗게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단을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