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전해야 한다
그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롬벨의 얼굴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감정 제어 기술로서는 최고봉인 마인드 킬링조차 통하지 않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이름.
하지만 그것은 상대방에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역시 천계에 있으려나?”
아니, 아니다.
‘그녀는…….’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데, 상대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했다.
“흠. 그녀가 살아 있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서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크롬벨, 네 운명은 여기가 끝인가 보구나.”
스아아아.
태연하게 내뱉은 말과 함께 몰려오는 슬로스의 기세가, 내면에 폭풍이 불던 크롬벨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다만.
“아, 하나 더. 중요한 걸 잊었군. 그분의 무기는?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쓸 만한 무기는 아닌데?”
“뭐?”
이어지는 그 영문 모를 질문에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는데.
“네놈이 아닌가? 역시 그 노을빛 파멸이라는 놈이 가지고 있는 건가? 지금 그놈은 어딨지?”
이런.
그 단순한 반문에도 놈이 무언가를 알아챈 듯하여 잠시 자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 또한 이게 전부가 아니다, 개자식아.’
몸 상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파도의 세례를 통해 공급되는 힘은 여전했으니.
“물어봐야 할 게 더 생…….”
쾅!
놈이 다시 뭐라 지껄이던 순간 쇄도한 크롬벨의 검이 그대로 놈의 몸을 강타했다.
그래, 강타.
‘빌어먹을.’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베어 내야 할 신성 오러가 그저 몽둥이처럼 적을 후려친 꼴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짜증 나게 구는구나, 크롬벨!]
심해까지 추락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태연하게 느껴지는 영파.
‘정말로 불멸인가?’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불멸은 신화시대 초기에 이 세상을 떠난 창조주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
이제는 그 권한을 대행하는 여신만이 불멸에 한없이 가까울 뿐이라는 것이 그의 상식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꼼수가 있을 거야.’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당장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놈의 꼼수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조차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흥. 과연 저 섬의 인간들이 없어져도, 네가 지금 같은 힘을 낼 수 있을까?]
지금의 그와 거의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힘을 보여 주는 슬로스는 여차하면 인술라를 타격할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크롬벨의 움직임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크하하하! 더! 더 발악해 봐라, 크롬벨 라이언하트!]
꽈르르르릉.
바닷속에서 시작된 충격은 또다시 해일과 벼락을 만들어 냈고.
[이거 피하면 저 섬이 증발한다?]
“크하하하하!”
“큭!”
콰아아아아아아앙!
뒤이어 엄청난 폭풍과 함께 먹구름이 몰려오다가도.
꽈아아아앙!
번쩍.
그들이 상공으로 날아올라 공방을 벌이는 순간에는 먹구름이 걷히며 맑은 하늘이 드러났다.
사람이 자연환경을 강제로 컨트롤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그 신화적 싸움의 한계는, 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오게 되었다.
“끄으으……. 테헤논, 더는 무, 무리야.”
전신으로 아지랑이처럼 마나를 뽑아내고 있는 친구, 아론의 말에 테헤논이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힘에 부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저 괴물들의 싸움, 그 신화의 한 현장에 자신들이 힘을 보태고 있다는 것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이었지만.
‘왜 남의 힘을 다루는 데 이렇게 익숙한 건데?’
5만 명에 가까운 인원의 마나를 거침없이 뽑아 쓰는 기량은 분명 놀라웠지만, 그것에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조율을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여보. 이, 이 상태가 계속되면, 싸움이 끝나기 전에 우리가, 다…….”
“알아!”
부인 로엔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지르고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아, 아니 내 말은…….”
“결정해요, 빨리!”
무섭, 아니 사랑스러운 부인 로엔 역시 전신으로 증기처럼 마나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론이나 로엔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가 조금씩 살이 빠지고 있는 것이 벌써 테헤논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는 다 죽는다.’
로엔의 말대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하지만 저 싸움에서 용사라는 작자가 진다면, 그 뒤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X발!’
정말 엿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뿌각.
테헤논은 이 상황에 대비해서 용사가 맡겨 놓았던 푸른 구슬을 깨트린 뒤, 힘껏 소리쳤다.
“이제 곧 모두가 한계요!! 어떻게든 끝내시오!! 5분 안에!”
- 속삭이기만 해도 들릴 겁니다.
구슬을 맡긴 용사가 당부한 말을 잊은 것처럼.
‘빌어먹을, 빌어먹을!’
테헤논의 전언이 머릿속에 울리자마자, 크롬벨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벌써 지친 거냐!?]
눈앞에서는 처음과 다름없이 생생한 적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데.
그런 놈과 그나마 대치할 수 있게 해 주던 가장 강력한 무기가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한순간의 큰 충돌 이후 장난처럼 주먹을 털어 낸 슬로스가 씩 웃으며 섬을 가리켰다.
“이러면 재미없지. 더 힘내지 않으면 저 섬부터 박살 낸다?”
까드득.
“즐거운가 보구나. 쓰레기 같은 배신자가.”
“푸하하하하! 뭐, 그래. 난 즐거운데? 오랜만에 이렇게 힘써 보는데, 조금은 즐겨야지. 그리고 혹시 알아? 네놈이 처참하게 죽어 갈 때쯤이면, 그분의 무기에 대해 털어놓을지?”
마지막 말이 녀석의 진짜 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분의 무기라니.
‘녀석이 대체 뭘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말해 줄 것도 없다.
솔직히 솜누스가 이렇게까지 강해졌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자신에게도 마지막 수는 있었다.
‘마왕을 상대할 때나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우웅.
크롬벨은 심장에 희미하게 자리한, 잠재워 놓았던 마기 서클을 다시 구동하기 시작했다.
타이니에게 배운 마기 치환법도 그저 난폭해지는 성정을 다스리는 요령으로만 활용했을 뿐, 그는 이 9번째 서클을 굳이 흡수하지 않았었다.
번쩍.
서클을 구동하면서도, 그 겉을 신성력으로 둘러 마기의 유동을 놈이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의 무기라니……?”
그 잠깐의 시간을 벌기 위해 연막작전도 같이 폈다.
다행히 놈은 그 말에 즉각 반응해 왔다.
“……정말 모르는 건가? 대략 2m에 가까운 거대한 워해머. 절대로 부러지지 않고,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신의 무기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다룰 만한 무기가 아닐 테니 잘 숨겨 놓았을 텐데? 아니면 정말 다른 놈이 가지고 있나?”
……녹턴.
녀석의 대답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또 타이니 그 작자인가.’
쓴웃음이 나오는데.
“오? 이제야 아는 표정이네. 자, 그럼 곱게 죽여 줄 테니 숨긴 곳을 말해 주겠어? 천계를 정벌할 때 그녀를 만나면 보여 줘야 하니, 시체도 잘 챙겨 줄 거야. 응?”
속을 뒤집는 놈의 능글맞은 미소에 그는 도저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계에 없다, 쓰레기…….”
“뭐?”
그녀는 나를 이 시대로 보낸 대가로, 모든 영광을 버리고 끝없는 고난을 겪고 있다.
그 말을 굳이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너를 막아야 한다.’
- 부디 부탁드리거니와, 그 시대의 일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 맡기면 안 될까요.
그 순간, 자신이 봉인되던 당시 울먹이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어코 자신이 고집을 꺾지 않았을 때.
- 그대는 과거의 흔적일 뿐. 그저 미래의 용사에게 힘을 보태 주시는 선에서 긴 고행을 마무리하셨으면 합니다.
- 그 끝에서 진실한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쌓아 온 감정을 일부러 정리하려는 것처럼, 딱딱하게 기도하던 그녀의 모습도.
그리고.
- 다시 한번 인과를 비튼 대가는 제가 미리 감당하겠습니다.
- 뭐!? 아, 안 돼! 그건 마땅히 내가 치러야 할……!
- 부디 미래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찾으시길…….
- 안 돼!!!
관뚜껑이 닫히기 직전에 들었던 청천벽력 같은 소리도 다시 한번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렇기에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런 희생을 치렀는데, 마왕도 아닌 네놈에게 죽을 수는 없다.’
만일 이것이 끝이라면 적어도.
“그녀가 천계에 없다니? 무슨 말이지?”
“……너 하나는 잡고 가야지.”
“자꾸 헛소리를……. 하,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는 거냐? 난 네 그런 모습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회귀를 했던 나조차도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저 끔찍한 배반자가 현재의 용사에게 닿지 못하도록.
‘내가…….’
우우우웅.
“……처리한다.”
“쯧. 그래, 처리해 주마. 더는 미련을 두지 않겠…….”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에게, 크롬벨이 그대로 돌진했다.
[흥!]
목소리 대신 비웃음 섞인 영파가 울려 퍼지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여태 그를 괴롭히던 놈의 검게 물든 주먹이 올곧게 뻗어 나왔다.
가속된 의식 속에서도 마치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심장 앞에 다가온 놈의 주먹.
신화시대의 말미에 최강의 전사이자 최고의 무투가로 꼽히던 인간이 마족의 권능을 손에 넣고 휘두르는 그 주먹을, 크롬벨은 몸을 살짝 비틀어 그대로 오른쪽 가슴으로 받았다.
푸우욱.
“음?”
“큭!”
저항 없이 가슴이 꿰뚫리는 것을 본 놈이 놀라는 순간, 그는 남은 모든 육체의 힘으로 그 주먹을 붙잡았다.
그가 준비하는 것은 마나나 육체의 힘이 아닌 다른 대가를 요구하니, 이 순간 그의 모든 힘은 솜누스를 붙잡는 데 사용되었다.
그조차 아주 잠깐이면 되었다.
[설마?! 이 미친놈이!!]
[늦었다, 솜누스.]
크롬벨은 영파로 전해지는 욕설을 미소로 받았다.
놈을 다시 만난 오늘, 그가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이 순간을 대비해 여태 영혼에 새겨 놓았던 9서클, 신화급 마법은 이미 발동되었으니.
본래라면 사도의 권능 없이 닿을 수 없었을 신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갈아 넣었다.
세상의 근본에 간섭하는 대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 신화급 마법은 그 사용자의 이미지로 결정된다.
- 카르마가 충분하다면 세상을 멸망시킬 파멸의 빛이 될 수도 있고.
- 부족하다면 촛불 하나 끄지 못하는 허상의 에너지가 되어, 본인의 영혼만 갈아 넣고 자폭하게 될 수 있다.
신화시대에도 유명했던 마도 군주가 남긴 말.
하지만 타이니의 말대로 고대의 크롬벨이 쌓아 놓은 업적은 스스로 생각해도 위대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카르마가 부족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 대마법을 발동한 순간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는, 그가 보았던 것 중 가장 화려하고 강력한 파멸의 빛.
번쩍.
하지만 자신의 몸에서 빛이, 그것도 노을빛 빛살이 퍼져 나가는 순간 크롬벨은 저도 모르게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허…….’
색깔까지 비슷할 줄이야.
[이놈이……!?]
솜누스의 놀란 듯한 영파도 이 순간만큼은 기껍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웃는 순간.
번쩍.
-----------!!!!
꽈아아아아아앙!
그가 기억하는 그 빛이, 생각 이상으로 크게 터져 나갔다.
우르르르르르릉.
꽈아아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콰콰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충격과 폭풍이, 상공에서부터 인식 가능한 모든 영역까지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럴 리가?’
크롬벨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이니의 빅뱅은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며, 그 후에 일어나는 폭발은 여파일 뿐일 텐데.
지금 그가 만들어 낸 빛살은 소멸이 아닌 반발부터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 미친놈이!!!!]
그 빛살 속에서, 목표였던 놈조차 소멸하지 않고 크게 튕겨 나가고 있었다.
마치 놈이 말한 불멸이라는 권능이 진실로 존재하는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안 돼!!’
놈은 죽지 않고, 그저 멀리멀리 튕겨 나가고만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절대 안 돼!’
솜누스를 죽이지 못하고 자신만 죽을 수는 없다.
만족스러운 미소는 그 순간 다급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터져 나온 신화급 마법 속에서, 크롬벨은 이미 지불한 대가를 억지로 다시 끌어 담기 위해 애썼다.
원래는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간절한 의지가 최소한의 힘을 억지로 회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노을빛이 확연히 줄어들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살아야 했으니까.
폐인이 되더라도, 목숨이라도 건져야 했다.
‘알 것 같아.’
전해야 했으니까.
‘……저 쓰레기 놈의 진짜 권능이 뭔지.’
그것을 타이니에게 전해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크롬벨은 흐려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생명력을 끌어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