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불멸?
[대체 어떻게 여태 살아 있는 거지, 크롬벨?]
옛 동료이자 인류의 배신자.
고대의 회귀자이자, 당시에 끝낼 수 있었던 마계 대전을 이 미래까지 이어지게 한 원흉.
그런 적이 가지는 의문을 굳이 해결해 줄 필요는 없었다.
[네놈을 죽이기 위해서다!]
쾅!
콰르르르르.
크롬벨이 발밑으로 충격파를 터트려 적과의 거리를 벌리는 동안.
그의 성검이 다시 물속에서 어지럽게 움직였다.
비록 사도의 권능을 잃은 뒤로 경지가 답보하고 있긴 해도, 기술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신화시대에도 천재라 불렸던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현시대 마법의 천재, 마도 기사 아르곤의 기술을 어느 정도는 쉽게 받아들였다.
물론 오러 마법까지 베껴 내진 못했지만.
[감싸고, 터트려라!]
본디 그로서도 상당한 시전 시간이 필요했을 8서클의 대마법이 순식간에 완성되며, 솜누스의 전신을 휘어 감는 바닷물의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반경 수백 미터의 바닷물을 모조리 끌어들인 소용돌이가 오직 한 인간, 아니 마족을 압살시키기 위해 몰아치는데.
정작 그 대상의 표정은 오히려 여유를 찾아 가고 있었다.
[사도의 힘은 어디 가고 괴상한 잔재주만 늘었구나, 크롬벨.]
콰콰콰콰콰콰콰.
그 광경이 크롬벨의 안색을 확실히 굳어지게 만들었다.
- ……네가 상대해야 할 것은 2천 년 전 용사 파티의 솜누스가 아니라, 최강의 칠죄종인 나태야. 알고는 있는 거지?
알고 있었다.
타이니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쯤이야 각오하고 있었어.’
애초에 솜누스가 인류를 배신하기 전에도, 자신에게서 사도의 힘을 빼면 놈이 더 강했었다.
회귀자임을 감안해도, 오직 순수한 무력으로는 가장 오러마스터에 가까웠던 이.
그렇기에 자신이 솜누스 대신 선택받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솜누스가 아무리 신성력이 없다 해도, 여신이라면 충분히 그를 ‘신의 기사’ 오러마스터에 임명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땐 그게 운명의 파편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젠 반신의 경지에 올랐을 솜누스를 사도의 권능도 없이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집을 부린 것도 아니었다.
[보아하니 여신과의 연결은 끊긴 것 같은데, 이게 전부냐? 몇 가지 마법을 더해 보지 그래? 마법 중첩은 네 특기였잖나?]
태연한 안색으로 대규모의 소용돌이를 흩어 내기 시작한 솜누스를 보며 크롬벨은 그대로 바닷속에서 빠져나왔다.
퍼어어어어엉!
콰콰콰.
해수면을 터트릴 듯 뚫고 솟구쳐 오른 크롬벨은 그대로 인술라의 하늘 위로 날아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테헤논!!”
“젠장, 준비됐소이다!”
균열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섬의 중심부 쪽으로 물러난 듯, 해안가에 홀로 남아 있는 테헤논.
쿵.
이내 그가 발을 구름과 동시에 손끝에서 솟아난 푸른 기운이 크롬벨에게 이어졌다.
우우우우웅.
“크…….”
인술라 곳곳에 숨어 있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모든 인간의 힘.
5만에 가까운 전투원의 마나.
파도의 세례, 1인 집중.
그 막대한 에너지가 크롬벨에게 전달된 것이다.
우우우우웅.
사실 이런 식으로 힘을 모으면 낭비되는 양이 더 많아 비효율적인 데다, 자칫하면 몰려드는 에너지에 휩쓸려 폭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난 가능하지.’
그는 여신의 사도로서 본신보다 훨씬 강한 힘을 수도 없이 다뤄 봤으니, 파도의 세례를 개조해서 이용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부터 완전한 스킬이긴 했지만, 적어도 단 한 명의 강적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
크롬벨이 들끓어 오르는 힘을 가늠하며 바닷속에 시선을 던지는 순간.
퍼어어어어엉.
그와 비슷하게 해수면을 터트리며 상공으로 올라오는 붉은 머리 남자가 보였다.
“솜누스…….”
그 살기 어린 중얼거림을 통해 뻗어 나온 마나만으로도 대기가 떨렸지만.
그 표적이 된 이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 그 이름 어색해. 이제는 슬로스라고 불러 달라고, 친구.”
이제는 크롬벨에게조차 어색하게 느껴지는 고대어가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데.
그것이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정말 여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말해 줄 생각 없나?”
비죽이 웃는 저 재수 없는 미소가 여전해 보여서 괜히 더 대답하기 싫었다.
“네놈을 처단할 날을, 수없이 꿈꿔 왔다…….”
콰콰콰콰.
몸 안에 들끓는 힘이 이제 어느 정도 통제가 된다고 느껴지는 순간.
“아 이거, 그냥 죽이면 궁금할 것 같은…….”
쾅-------!!
이전에 비해 훨씬 빠르게 가속한 크롬벨의 몸이 그대로 놈을 들이박았다.
‘아직…….’
정령 합신 상태에서 노랗게 변한 그의 눈에 푸른 마나가 넘실거리는가 싶더니.
콰아아아앙!
그의 검에서 폭음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신성 오러가 구름 위까지 솟구쳤다.
실로 거인의 검처럼 보이는 새하얀 검이 번개처럼 허공에 호선을 그리는데.
번쩍.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휘둘러진 그의 신성 오러가, 그대로 슬로스를 강타했다.
꽈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엉.
콰콰콰콰콰콰콰.
힘없이 튕겨 나간 슬로스가 해수면을 터트리고 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데.
그대로 공간을 단축하듯 순식간에 이동한 크롬벨이 그를 따라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술라의 앞바다에는 다시 재앙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
번쩍.
꽈르르르르르릉.
바닷속에서 하늘 위로 거대한 벼락이 솟구쳐 오르고.
한순간에 달아오른 바닷물이 막대한 양의 증기가 되어 구름처럼 떠올랐다.
거기다 거센 파도가 섬을 뒤덮을 듯이 솟구치며 연신 해안가의 건물을 후려치는데.
“제엔장, 이게 진짜 사람의 싸움이 맞나…….”
오러유저 테헤논은 식겁하며 건물 속에 몸을 숨겼다.
그 와중에도 그는 억지로 파도의 세례를 유지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전장의 소란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가 건물 밖으로 조용히 시선을 던질 때.
다시 하늘에서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들이 들렸다.
“뫄, 그량 한숨 의랑 풀꽈@#&%.”
……대체 뭐라는 거야.
그 긴장감 속에서도 테헤논은 파도의 세례에 연결된 크롬벨이 멀쩡하다는 것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정작 상공에서 슬로스와 마주하고 있는 크롬벨의 표정은 아주 좋지 않았다.
“뭐, 그래도 한 가지 의문은 풀렸군. 다른 칠죄종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 말이야. 지금 그 힘에, 그 노을빛 파멸을 쓴다는 놈이 더해진다면 충분히 그럴 만해.”
“흐…….”
“제법이야, 크롬벨. 사도의 권능 없이도 이 정도 힘을 발휘할 줄이야.”
이놈, 타이니에 대해 완전히는 모른다.
크롬벨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중간계의 정보가 마계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고급스럽고 신비롭게까지 보이던 검은 갑옷과 가죽옷들이 넝마가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공격은 충분히 통한 것 같았다.
하지만 슬로스의 표정은 너무나도 태연하기만 했고, 결정적으로 그의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놈의 기운 역시 터럭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넘치는 힘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질 정도로 허망하고 당혹스러운 감정이 크롬벨의 마음속에서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역시 수없이 절망을 딛고 일어선 영웅이자 고대의 마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용사였다.
“……네놈, 대체 어떤 수작을 부린 거지?”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꺼낸 질문.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궁리를 거듭했다.
‘타이니의 불굴과도 달라. 타격을 허용하며 견뎌 내는 게 아니야. 뭔가…… 아예 닿지 않는 느낌. 반격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도…….’
그런데 그 순간.
“아, 혹시 내가 반격하지 않으니까 무슨 약점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캐묻는 거야? 그럼…….”
스윽.
“……착각을 깨 줘야지.”
한순간 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던 슬로스가 갑자기 그의 눈앞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검은 오러로 이글거리는 주먹을 휘둘렀다.
꽝-------!!!
강력한 충격에 그의 몸이 형편없이 튕겨 나갔다.
콰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콰.
한순간에 바닷속에 잠긴 크롬벨이 곧바로 자신을 쫓아온 슬로스를 향해 반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꽈아아앙.
[그렇지. 싸움에는 속도가 중요하다.]
꽝!
[그런데 그거, 내가 가르쳐 준거잖아.]
콰콰쾅!
물속에서 번개처럼 오가는 공수.
둘의 속도는 거의 대등했지만, 점차 크롬벨의 몸이 느려져 가고 있었다.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듯한 슬로스와는 다르게 그에겐 지속적으로 충격이 누적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용량 이상으로 마나가 가득 찬 몸이기에 충격을 회복하는 속도도 느렸다.
결국.
꽈아아아아아앙!
그들이 다시 폭음과 함께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을 때는, 크롬벨의 안색만이 창백하게 변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흠. 이 정도면 증명됐지? 일단 회복하고 대화 좀 해 보자고. 지금 나에게는 네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거든? 아, 혹시 그 꼼수 때문에 신성력은 잘 못 쓰는 건가?”
그리 말한 슬로스의 시선이 전장에서 조금 멀어진 인술라로 향하는 순간.
‘알고 있구나.’
크롬벨은 이를 갈며 스스로의 몸에 신성력을 쏟아 냈다.
번쩍.
스아아아아.
오러로 정타를 허용한 것이 아니기에 몸 상태는 쉽게 회복되었지만, 결코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세에서 밀릴 수는 없었다.
“미스터리한 건 마찬가지다. 네놈, 분명히 지난 마계 대전에는 이런 수준이 아니었는데?”
그저 떠보려고 던진 말 한마디였는데, 슬로스는 단숨에 핵심을 짚으며 대답했다.
“오우. 친구야, 이 친구야. 그게 벌써 2천 년 전이야. 내가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수준일 거라 생각한 건가? 아, 그러고 보니까 넌 그 꼼수를 제외하면 별로 변한 게 없네. 오히려 약해졌어. 혹시 너, 2천 년간 잠이라도 자고 있던 거냐?”
엿 같은 개자식.
이가 갈려 왔지만, 다행히 표정 관리는 완벽했다.
“글쎄? 네놈도 꼼수를 부리는데, 나라고 그런 게 없을까. 그저 2천 년 동안 솜누스 네놈이 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만 해 주지.”
“흐음. 이거 순순히 말해 주진 않겠다는 거지? 흠, 고문 따위 통할 놈도 아니고…….”
그러자 놈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매우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짜증 나지만, 그럼 우리 서로 궁금한 걸 교환해 볼까? 공평하게. 어때?”
이어진 놈의 제안은 정말 의외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놈이 왜 이러는 걸까 싶었지만, 적에 대한 정보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네놈, 그 꼼수가 권능인가? 하지만 그렇다 쳐도 좀 이상한데, 그럼…….”
“그렇지. 권능이다. 그럼 내 차례인가? 네 녀석은 2천 년간 사라졌거나 혹은 잠들었거나 했다가 이 시대에 깨어난 거냐?”
이 새끼가…….
말을 끊고 들어온 질문.
정곡을 찔렸지만, 어차피 놈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했으니 크롬벨은 속으로 이를 갈며 태연히 답했다.
“……그래.”
“그래? 그게 전부라고? 친구야, 이러면 좀 섭섭한데?”
“그럼 너부터 성의를 보이지 그래? 아니면 그 권능, 자세히 말해 주면 꼼수가 탄로 날 만한 권능인가 보지?”
“흐…….”
그 질문에 슬로스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태연한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아. 옛 친구를 만난 김에 자랑해 주지 뭐. 너, 인간이 마족보다 뛰어난 게 뭔지 아나?”
이걸 대답해 주겠다고?
거기다 갑자기 엉뚱한 주제로 새는 듯한 반문까지.
대체 이놈은 뭘 노리는 걸까 싶었지만, 대답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지성이겠지.”
“땡. 반만 정답이야, 크롬벨. 지능이 아니라 사회성이야, 사회성. 인간이 마족보다 유일하게 나은 점 하나. 서로 교류하며 지성과 영격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
그러자 놈이 난데없이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놈이었지.’
덕분에 놈과 연관된 엿 같은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억누르며, 무심한 듯 다시 반응해 주었다.
“흠, 그래서?”
“마족들은 다 빡대가리라서, 뛰어난 신의 권능을 얻고서도 정말 1차원적으로 사용하지. 하지만 나는 그런 머저리들과는 다르단 말씀.”
슬로스가 마치 그의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양 손가락을 까닥이며 피식 웃었다.
“폭식은 먹어치우고, 질투는 의심하고, 탐욕은 남의 것을 탐내고, 분노는 화내면서 강해지고…… 등등, 정말 한심해. 그나마 색욕, 러스트는 좀 2차원적으로 활용하지. 오만이야 뭐 애초에 가진바 힘이 워낙 대단하니까 상관없었을 테고. 물론 내 권능은 그들과도 차원이 다르지.”
“그렇게 대단하다면 말을 해 줘도 상관없겠군.”
놈이 긴말을 늘어놓는 틈을 타 다시 한번 떠봤는데.
“그럼! 당연하지. 내 권능은 불멸. 어차피 네 검은 내게 닿지 못해.”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이 돌아왔다.
‘불멸?’
그럴 리가.
칠죄종의 권능은 그 죄악의 특성을 띠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한계도 분명할 터인데.
혹시 운명의 파편이 그 한계까지 뛰어넘게 만든 것일까.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그러니…… 크롬벨, 어차피 죽게 될 옛 친구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마.”
다시 살벌한 미소를 지은 슬로스가 조용히 말을 더했다.
“혹시 ‘그녀’도 살아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