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나태 강림
“크롬벨 경. 오늘도 밤을 새울 겁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쉬고 있으니까요.”
그 대답에, 괜히 걱정스러운 말을 건넸던 테헤논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가슴을 탕탕 치며 언제나처럼 호통하게 말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이젠 인어족의 공격도 뜸해졌으니.”
“괜찮습니다.”
“바다 사나이들은 은혜는 잊지 않으니, 우리 역시 함께 싸울 모든 준비가 되어 있소.”
“고맙습니다.”
크롬벨은 거듭 정중한 말로 대답해 왔지만, 그 모두가 결국엔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으니.
“거참…….”
아무리 넉살 좋은 테헤논이라도 입맛을 다시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크롬벨의 시선은 여전히 검은 균열에 꽂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얼마 전 타이니가 남기고 떠난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네가 세운 업적이라면 넌 이미 신성을 얻고도 남았어야 해. 만약 그 모든 추앙을 여신께 돌리지 않고…….
‘추앙이 신성을 만든다.’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것 또한 이해가 간다.
하지만 타이니의 주장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세운 업적은 태반이 여신의 권능을 바탕으로 한 일이니…….’
애초에 여신을 섬기는 자로서, 자신의 공을 여신께 넘기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 생각이 크롬벨의 마음을 조금 더 무겁게 만들었다.
타이니가 떠난 이래 무수히 궁리해 봤지만, 그는 도무지 자신의 업적과 신을 분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민해 봤자 그가 내릴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안 돼. 그건 내 길이 아니야…….’
끝없는 시련을 여신에 대한 믿음 하나로 극복하고 이겨 내 왔다.
그리고 여신께서는 그런 그를 가호하고 보듬으며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셨다.
신앙은 이미 그의 삶이자 영혼이니.
‘나는 여신의 종이자 칼이다.’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자신이 이 상황에서 더 강해질 방법이 없어진다.
‘결국 그 수뿐인가.’
우웅.
심장에 자리한 마기 서클을 새삼스레 인식한 크롬벨은 다시금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이 다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게 만들었다.
“여신이시여. 제게 길을, 길을 알려 주시길…….”
우우우웅.
하늘 높이 솟구치는 신성의 빛줄기.
그것은 주변에 자리 잡은 3개의 성물의 핵이 그의 신성력과 동조한 결과였으니.
- 오오!
멀리서 감탄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8단계 성자급의 신성력이 성물 결계에 의해 증폭되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기도에 응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어째서…….’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천계와의 연결도 희미해지리라는 건 스스로의 몸을 봉인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여신의 사도임에도 그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에 조금 당황했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인데도 말이지.’
크롬벨은 그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금기된 흑마법의 술식에 신성력을 더해 만든 봉인이었다.
아무리 신성력을 에너지로 썼다 한들,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 한들 금기를 어긴 것은 분명했다.
그랬기에 여신께서는 희미한 연결마저 끊어 내어 자신을 ‘벌’하신 것이리라.
그래도 여신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니, 언젠가는 다시 그 목소리를 듣게 될 줄 알았는데.
그 생각은 최근의 신탁 사건으로 깨어져 나갔다.
‘속죄자에게 신탁을 내리셨으면서, 왜 제게는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까. 여신이시여…….’
신탁을 내리실 정도라면, 신화시대에 정식으로 임명받은 마지막 사도인 자신과의 연결은 그리 어렵지 않을 터인데.
‘대체 왜?’
답답하기만 했다.
인류를 위해 금기의 술식에 몸을 맡긴 것이 그리 큰 죄였을까.
아니면 마기 서클을 일부러 만들어 낸 것이 문제일까.
타이니가 인간이 자력으로 반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이후로는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은, 그간 신앙이 막고 있던 의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여신께서 사도의 연결 고리를 회복하시고 내게 다시 카르마의 활용을 허락해 주신다면, 이 싸움은 훨씬 쉬워질 텐데? 왜 신탁은 내리시면서 나는 외면하시는가?’
과거 솜누스가 그랬던 것처럼, 마계의 초창기 공격은 회귀자인 타이니가 정보 우위를 이용해 확실하게 막아 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공격도 차원 관측기로 강림의 장소를 미리 알아내서 좀 더 수월하게 방어해 낼 수 있었다.
‘후손들이 만든 가장 큰 업적이지.’
심지어 그 후의 공격은 절반이 동대륙에 흩어지기까지 했다.
인어족의 여왕은 예상외였지만, 그 또한 오러마스터가 된 타이니 덕분에 잘 막아 냈다.
남은 인어족들이 우환거리가 된다 해도, 적어도 솜누스가 배신하며 인류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고대의 마계 대전 말기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제가 사도의 권능을 회복한다면, 인류는 이 시련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여신이시여! 왜, 왜 답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답답한 마음이 절로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하늘 높이 치솟는 신성력이 흔들리는 것이 지금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생각이 다른 것에 닿았다.
‘혹시 연결이 끊긴 것이, 내가 흑마법의 공식을 빌려 쓴 것 때문이 아니라면?’
현시대의 인간들은 여신에 대한 이미지를 막연하게 그리고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실제로 여신을 배알한 적이 있고, 상시 목소리를 들어 온 사도였다.
‘여신께서는 현명하시다. 쉬운 길을 두고 일부러 돌아가실 분이 아니야.’
설령 자신이 금기를 범했다 한들, 이런 난세라면 공을 세워 죄를 씻으라 하실 분이었다.
그렇다면 왜…….
“……설마!?”
그 순간 굉장히 확률 높은 가설이 직감적으로 떠올랐지만.
크롬벨은 바로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신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추측이었으니.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불경한 생각을 용서하소서, 여신이시여.”
혼자 중얼거리다가 또 혼자 발작하듯 고개를 흔들며 기도를 한다.
광인, 아니 전형적인 광신자의 모습이었다.
자연히 그를 지켜보고 있던 어부 연합의 인물들이 뜨악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서는데.
그러던 어느 순간.
“허!?”
발작 같은 기도를 하던 크롬벨이 갑자기 성검 포이나를 빼 들고는 엄청난 기세를 뿌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오러유저 테헤논조차 그의 자세가 바뀐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인지했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크롬벨은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온다!!”
지이이이잉.
그 순간, 동료들이 남겨 놓고 간 3개의 성물이 크롬벨의 의지에 반응하여 섬 전체를 신성 결계로 뒤덮었다.
강림하는 칠죄종에게 타격을 주기 위함이 아닌, 영혼살의 힘에 어부 연합의 병력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
파지지지직.
신성력과 균열이 서로 반발하며 빛을 뿜어내는 사이, 균열 안에서 검은빛 전투 부츠가 슬쩍 튀어나왔다.
“흐…….”
그것을 본 크롬벨이 이를 악물자, 그의 전신이 부풀어 오르며 두 눈이 노랗게 빛나고 등 뒤로 갈색 날개가 솟아났다.
그 순간.
저벅.
지면에 발을 디딘 부츠 위로 정체 모를 검은 금속으로 된 각반이 드러났고, 뒤이어 검은빛 가죽으로 만들어진 하의와 검은 금속의 상체 갑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세계도 오랜만이군…….”
이제는 알아듣는 이가 없는 고대어 몇 마디와 함께.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자의 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지지지직.
쏟아지는 신성력의 세례도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한다는 듯이 오연한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는 남자.
알 수 없는 압박감 앞에서 모두가 숨을 죽일 때.
영역이 동조되거나 상쇄되지 않고도 그 고대어를 알아들은 단 한 사람.
“솜누스!!!!!”
크롬벨이 고함을 지르며, 어느새 벼락처럼 남자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정령 합신 상태의 전신에 서린 마나의 힘은 어느새 전개된 7가지 보조 마법에 짙푸른 빛을 더했고.
그 모든 힘을 더해 증폭된 힘, 이글거리는 신성 오러는 남자가 있는 공간 전체를 양단하는 빛살이 되어 쏟아졌다.
쩌어어어억.
“음?”
쾅----------!
측량할 수 없는 충격이 남자, 슬로스가 있는 공간을 강타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방어한 그가 그대로 해수면을 연달아 폭발시키며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콰드득.
“제법…….”
공격을 막아 낸 슬로스의 오른손 건틀릿이 박살이 나 흩어지자 그의 인상이 찡그려지는데.
그 공격을 날린 크롬벨은 어느새 다시 그의 눈앞에서 하늘 위로 솟구친 성검을 내리긋고 있었다.
‘천벌.’
번쩍.
응축된 신성 오러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슬로스의 몸까지 관통하는 한 줄기 벼락이 되어 천지를 연결했다.
꽝!
꽈르르르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콰.
터져 나온 바닷물이 구름까지 솟구쳐 오르고.
그대로 강타당한 슬로스의 몸이 바닷속 깊숙한 곳으로 추락하는데.
그 뒤를 쫓아 바닷속으로 뛰어든 크롬벨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꾸르르르.
‘이것도 버텨?’
기습에 가까운 치명적인 공격의 2연타.
그런데 첫 공격에 건틀릿 한쪽이 날아간 게 고작이었고, 두 번째로 가한 비기, 천벌도 상체 갑옷을 반파시킨 것이 전부.
정작 솜누스의 몸에는 이렇다 할 상처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정령 오투스의 권능, 약점 포착으로도 보이는 것은 갑옷이 감싸지 않은 부위뿐이니.
‘저 갑옷 파츠 하나하나가 전부 초월무구 수준? 빌어먹을.’
그렇다면 그것들을 모조리 부술 때까지 계속하면 그만이다.
번쩍.
이미 활성화된 보조 마법들의 출력이 다시금 최대치로 올라가고.
정령 합신 상태의 오투스의 날개가 물속에서도 속도를 더했다.
[그대로 꿰뚫어 주마!]
신성 오러의 화살이 된 그의 몸이 바닷속에 새하얀 빛의 궤적을 남기며 적의 중심을 강타했다.
꽈아아아아앙.
물속이라 조금 느려지긴 했어도, 속도는 그의 장기였으니.
‘됐다!’
연달아 타격을 받은 솜누스는 그대로 공격을 허용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스스로 만들어 낸 격랑과 거품, 에너지의 파동이 걷히면서 드러난 광경.
적의 몸을 꿰뚫은 줄 알았던 크롬벨의 공격이, 겨우 왼손의 건틀릿 하나를 부수고 그 손바닥 앞에서 멈췄다는 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제법이야, 인간. 내 옛 이름을 아는 자여. 순식간에 데모닉 웨폰 셋을 부수다니. 아깝게…….]
[솜누스, 네놈!!]
콰드드드득.
그대로 공격을 밀어붙이는데 그 손바닥 하나를 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크롬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괴상하게 변한 외모가 조금 이상하긴 한데, 바뀐 기세도 조금은 익숙하단 말이지. 너무 익숙해.]
표정이 괴상하게 변하는 것은 슬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펜릴은 어쩌고 그런 저급한 걸 들인 거냐, 옛 친구여. 그리고 무엇보다…….]
꾸르르륵 솟구쳐 오르는 거품과 함께 보이는 기괴한 미소.
[대체 어떻게 여태 살아 있는 거지, 크롬벨?]
짙은 의혹을 담은 살기 어린 눈동자가 크롬벨을 직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