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알려야 한다
인어족과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직접 겪지 않고는 믿기 힘든 소문이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얘기 들었어?”
“뭐?”
“인어족과의 전장에 나타난다는 노을빛 유성.”
“아, 그거 광휘의 기사라는데.”
“아, 그 검은 머리라는?”
“그게 뭐야? 불길해.”
“떽! 구원자한테 무슨……!”
구원자.
가장 어린 나이로 인류 최강의 기사라 불리던 이가, 이제는 대륙 전역의 전장을 이리저리 누비며 신화와 같은 무용담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을 넘어, 이제 인어족과의 전쟁까지 이어지던 상황.
극한의 피로감과 불길함에 지친 대중들에게 지배자들이 억지로 소문을 부추긴 것이 한몫하기도 했다.
암울한 시대에 희망의 빛을 보여 줌으로써, 불안과 공포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다만 가장 최근에 그의 ‘구원’을 받은 자유 도시 롬벨에서 연합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이는, 소문의 주인공에게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구원자라니, 불경하다…….’
구원은 오직 여신께서 내리시는 은혜일 뿐인데, 세상은 한낱 인간에게 너무나도 쉽게 그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여신을 모시는 자로서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굉장했지.’
갓 핸드는 명상하는 자세 그대로 기억을 더듬었다.
롬벨에 쏟아지던 인어족의 공세.
그리고 점차 방어선이 무너져 갈 때, 기적처럼 나타난 세 줄기 유성.
처음에는 타이니가 다른 동료 둘을 데리고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유성들이 각기 똑같은 위력으로 터져 나갔다가 때론 한데 모여서 폭발하기도 하면서 인어족을 정리할 때는, 그도 현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개인이 그런 무력을 가질 수 있다니. 말이 안 된다.’
그 파괴력은 어떻게든 이해할 수는 있었다.
본디부터 이해 불가능했던 일격, 빅뱅으로 글러터니를 소멸시키는 것도 그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이번의 그 유성은 빅뱅과 다른 기술이긴 했지만, 타이니가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면 그 파괴력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기술을 끝도 없이 이어 가는 지구력은 불가해할 정도였다.
자유 도시 일곱 곳의 인어족을 박살 내는 데 불과 사흘.
끝도 없이 몰려들던 인어족들도 하늘에 노을빛이 보이기만 하면 바로 후퇴해 버리는 이상 현상까지 나타났었다.
‘인류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다. 하지만…….’
신탁이 문제였다.
- 마왕을 막을 수 없다 여겨진다면, 성물과 함께 제물을 바쳐라.
설령 그런 순간이 온다 한들, 자신이 광휘의 기사를 제압할 수나 있을까.
그렇다고 다른 초인들을 제물로 삼아 봤자 마왕이라는 불가해의 상징성에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광휘의 기사가 이대로 인어 전쟁과 마계 대전을 이겨 낸다면, 그것이 제일 좋다.’
차라리 그랬으면 구원자라는 새로운 이명이 조금 불쾌하더라도 참아 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니야…….’
아무리 다시 기도해 봐도, 다른 신탁은 내려오지 않았다.
여신의 뜻은 확고하다는 뜻이다.
‘그로서는 불가능해.’
성물을 하사받을 때 들었던 신탁.
확실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내려오는 그 느낌은, 마왕에 대한 공포를 그의 가슴속에 심었다.
정확히는 신탁을 내려 준 존재가 가진 마왕에 대한 감정이 그에게 옮겨진 것이었다.
‘여신께서도 두려…… 아니, 거리끼시는 마왕이다. 그걸 인간이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
차마 여신이 무서워한다는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인간 하나가 마왕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했다.
‘그때가 오면 내 목숨을 불태워서라도 그를 제물로 바친다. 사죄는 천계에서 만나서 하리다, 타이니 경.’
그저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며 신탁을 이행할 준비를 할 뿐.
“모든 것은 신을 위해서.”
광신자는 차분한 눈으로 다시금 철야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그의 생각과는 달리, 지배자들의 의도는 제법 먹혀들어 연합군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기 시작했다.
- 희망이 생겼다.
동부 전선에서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인어족의 공세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져 가기 시작할 때.
“갓 핸드 경!!! 후방으로 출격 명령입니다!! 신성력이 필요……!”
후방에서, 생각지도 못한 재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 * *
- 도플갱어 처리. 아모스 경 사망.
우울한 보고를 마친 지 벌써 사흘.
- 보급 부대를 순방하며 대기하라. 혹시 모를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라프탄은 어쩌면 당연한 그 명령을 수행하며 밤하늘의 별을 세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는 굳이 침대로 변하지는 않았다.
‘타이니는 몰라도, 에스티나 님은 믿을 만하지.’
무려 세계수의 수호자가 남은 도플갱어는 한 마리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상부의 명령은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하고 확신하기 위한 것일 뿐이니까.
“충! 근무 중, 이상 무!”
“수고.”
“컹!”
라프탄은 가볍게 경례를 받은 뒤 라미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보급대의 대장 역할을 맡고 있었다.
물론 원래의 신분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니지만, 제국 황실군 소속 6단계 정령사라는 이름은 갑자기 전출 온 상관에 대한 부하들의 의문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사람도 많이 죽었는데, 괜한 인력 낭비는 필요 없지.’
변신도 안 하고 본모습으로 그럴듯한 역할을 하는 것이 얼마 만일까.
괜히 뿌듯한 기분에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갑자기.
- 컹!
그의 옆에 멀쩡히 현신해 있던 라미가 영혼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그리고 그 직후, 그 역시 병영 전체를 감싸는 스산한 기운을 눈치챘다.
‘이건…….’
정령이 유난히 싫어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기운, 마기.
‘설마, 도플갱어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느껴진 마기는 그가 있는 대장 막사가 아니라 병영 전체를 노리는 듯했으니까.
그것도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말이다.
‘이렇게 넓은 범위를 이런 밀도로!?’
도플갱어가 이만한 힘을 동원할 수 있다면, 저번 임무에서 자신도 아모스와 같이 죽었을 것이다.
‘빌어먹을. 이건 상대 못 한다.’
튀어야 한다.
그 생각에 움직이려는 순간.
꽈아아아아아앙!
- 으아아아악!
- 습격이다!
밖에서 폭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있던 막사까지 한 번에 날아가 버리는데.
[호오. 뭐지, 이 혐오스러운 기운은?]
허공에 뜬, 달만 한 커다란 녹색의 눈동자 한 쌍이 그를 명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 옆에 희한한 형태의 지팡이를 두둥실 떠올린 녹색 눈깔은, 병영 전체에 뿌연 기운을 희미하게 뿌려 대는 주범인 것 같았다.
[짐승 신의 흔적이라? 그래, 이런 게 있을 거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런 빌어먹을.
영파가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렸다.
“크르르르르.”
[생각보다 더욱 혐오스럽구나.]
‘눈알만 떠 있는 희끄무레한 거인 주제에, 누가 누구한테!’
따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컥!”
“크륵.”
쿵.
이미 엄청난 압력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었고.
주변의 비명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일어서라.]
녹색 눈깔의 뜬금없는 정신파에, 쓰러졌던 병력이 그대로 다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우드드득.
끼릭.
“커흑!”
관절이 꺾이고 목이 비틀어진 시체들이, 괴상한 소음과 함께 역으로 관절을 맞추며 멀쩡한 몸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명을……,”
“받듭니다…….”
“충……!”
느리지만 또렷한 어조로 같은 말을 읊조리더니 녹색 눈깔을 보며 고개를 숙이는데.
그 순간 라프탄은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치아까지 떨려 올 정도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극심한 혐오감이 느껴졌다.
정령술사로서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마기에 대한 혐오감.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기서 그나마 쓸모 있는 게 너 하나인데, 더러운 게 묻어 있구나.]
“너, 넌 뭐냐, 대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어보는데.
[위대하신 마계의 왕이자, 본디 마땅히 이 땅의 주인이 되셨어야 할 우리 모든 마족들의 신……. 마왕님의 일곱 손발 중 하나. 칠죄종의 질투, 그린 아이가 바로 나다.]
그 말의 진위를 판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좀 전에 병영 전체를 찍어누른 것이 바로 저 희뿌연 유령 같은 게 뿜어내는 순순한 마기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챘으니까.
‘그냥 기운을 발산하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사람을 즉사시키는 괴물…….’
칠죄종이라는 말이 심장에 와닿는 느낌이었다.
또한 재수없는 운명에 대한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X발, 그런 게 왜 여기 있는데?!’
그것도 왜 하필 내 앞에?!
[그 신의 흔적을 버려라. 그렇다면 너를 내 중히 쓸 것이다. 더럽고 혐오스러운 기운을 벗고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쾌감을 맛보게 해 주마.]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지만, 억지로 어깨를 폈다.
“그러니까, 넌 마왕 따까리라는 말이지? 나보고 그 따까리의 따까리를 하라고? 그것도 죽은 다음에? 지랄하고 있네!”
허세 가득하게 내뱉은 말.
그 말에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녹색 눈깔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쯧, 짜증 나는군. 괜히 시간을 허비했어. ‘죽어라.’]
푹.
그 순간 라프탄은 누가 자신의 신체 가슴에다 비수를 꽂은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컥…….”
그저 녹색 눈깔이 그에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대로 심장이 터져 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라미가 막사 저편의 숲속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하?]
그 모습을 본 녹색 눈깔, 그린 아이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에는 짐승 신의 흔적과 인간이 연결된 흔적이 보이니, 저 멍청한 신의 찌꺼기가 도망을 쳐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크흐흐흐! 프하하하하하! 역시 혐오스러운 존재답다! 역겨운 신의 흔적! 비겁하고 더러운 성미 그대로구나!]
주인을 버리고 도망가는 정령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이다.
[어떠냐, 더러운 신의 흔적에게 배반당한 경험은?]
죽어 가는 라프탄에게 그 감상을 물어보는 것도 그에게는 당연히 즐거운 일이었다.
[신의 특성이 그러하다. 비열하고, 배반하고, 약속을 어기지. 그러니 그 더러운 계약을 끊어라. 지금이라도 내게…….]
그가 철저한 절망 속에서 신의 흔적과 계약을 끊어 내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당장은 활용할 만한 수족이 생기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하?]
어느새 죽은 라프탄의 시신이 점점 흐려지더니, 그린 아이가 보는 앞에서 펑 하고 사라졌다.
“……하?”
순간 멍해진 그가 육성을 내뱉더니, 곧 짙은 녹색 불이 엄청난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흐, 흐흐흐흐흐……. 감히 미물 따위가…….”
[나를 속여!!??]
분노한 그린 아이의 영파가 숲속 전역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 영파를 들은 라미, 아니 라프탄은 연신 피를 토해 내면서도 미친 듯이 네 발로 내달리고 있었다.
파바바박.
죽은 라프탄의 몸은, 사실 라미가 의태한 것이었다.
라프탄은 막사 안에 들어설 때부터 라미로 위장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도플갱어가 없다고 확신했어도 한 수는 있어야 하는 법.
혹시나 있을지 모를 암살자를 대비한, 심리적 허를 찌르는 의태였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알려야 한다.’
- 크왕!
‘아프냐? 나도 아프다! 참아!’
달려 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주변 환경에 매 순간 완벽하게 동화했다.
6단계의 극에 이르러 가는 그의 의태 능력에 극한 상황의 집중력이 더해져, 이 세상 어떤 은신 마법보다 뛰어난 효율을 자랑한 것이다.
그 덕분일까.
라프탄의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지면을 거칠게 박차는데도 발밑에는 흙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고 있었다.
‘절대 들키면 안 돼. 제발!’
그렇게 사자의 모습으로 달리는 라프탄의 몸 위에는, 그의 존재감을 더욱 흐리게 하는 특이한 형태의 뿌연 기운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기존의 6단계를 넘어서는 순수한 기운이 그의 의지에 따라 변이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