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타란 전선
마계의 무덤. 그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녹색 불꽃 한 쌍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여태 침묵하던 언데드 군단의 군주, 그린아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그의 머리를 울리는 영파 때문이었다.
[움직여라, 그린 아이. 더는 변명을 듣지 않겠다.]
지극히 불쾌한 명령조의 영파.
“이제는 대놓고 명령인가, 슬로스? 네가 아무리 서열 1위라도…….”
[닥쳐라!! 그분이 직접 명령하신 일이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항명은 용납하지 않겠다!!]
머릿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슬로스의 영파는 지극한 분노와 살기까지 담고 있었다.
‘감히…….’
그 무례한 영파에 그린 아이의 눈에서도 분노 어린 살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곧바로 머릿속을 채운 의문에 밀려나며 사그라들었다.
‘이놈이 왜 이러지?’
언제나 여유롭던 슬로스의 말 같지가 않았다.
조급하게 서두르는 나태라니,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그렇기에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언데드 군단의 재건은 이제 고작 3할. 허물을 벗은 강자들은 아직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그런데…….”
[중간계는 이미 전장이다, 그린 아이! 네 녀석이 활용할 수 있는 강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을 것이란 말이다! 당장 움직여!!]
확실히 이상했다.
‘당연한 소리를 이제 와…….’
무엇이 나태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동시에 알 수 없는 위기감 역시 강해졌다.
“나는 네가 강림하는 시기에 맞추겠다고 이미 몇 번을 말했…….”
[그분의 명령이라 했다, 그린 아이!!!!]
찌이이이잉.
“큭!”
이제는 먼 거리를 격하고 건네는 영파만으로도 숫제 골이 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린 아이는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 정도였나…….’
같은 칠죄종을 영파만으로도 압도하는 존재감이라니.
한 번 허물을 벗은 마족이었다면 이 영파만으로도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이미 삭아 버린 자신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 느낌에, 그린 아이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것을 항명이라 여겼을까.
조급해진 나태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았다.
[네놈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네놈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균열 밖으로 밀어 내 주겠다. 당장…….]
빌어먹을.
“좋다. 움직이겠다.”
[……흐. 이제야 겁쟁이가 현실을 깨달았나.]
“하지만 이유는 말해 줘야겠다, 슬로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지?”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야 나태다워지는 건가 싶던 그때.
곧 이어진 영파는 그런 느슨한 생각을 대번에 날려 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중간계에 변수가 생겼다. 휴브리스가 당했어. 더는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뭐라고?”
그 칠두룡이?
나태가 조급해진 것이 대번에 이해가 될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너의 강림은 조용해야 한다. 은밀히 강림하여 숨어서 다가가, 인간족의 뒤를 쳐라. 그들은 지금 인어족을 상대하고 있을 터이니…….]
이어진 슬로스의 요구는, 그의 걱정을 크게 잠재울 만큼 성미에 맞는 요구였다.
* * *
우우우웅.
검은 머리 남자가 정좌한 채 눈을 감고 있는 방 안.
그에게서부터 서서히 퍼져 나가는 노을빛 마나가 옅게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건물을 가득 채우다가 곧 에낙센 전체를 뒤덮어 나갔다.
- 우와!
- 저건……!
- 광휘의 기사다!
건물 밖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는데, 타이니는 그 순간 의식을 더욱 확장하여 영역을 최대한 넓혀 나갔다.
그리고 이내.
콰직.
의식 속에서 무언가 끈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영혼이 세상의 이면으로 파고들어 갔다.
온통 회색의 공간. 세상을 구성하고 떠받치는 차원의 벽.
지끈.
‘큭.’
의식이 확장될수록 두통, 아니 혼통(魂痛)이 정신을 괴롭혔다.
아무리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신성을 얻었다 해도 한자리에서 대륙 전체를 관조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듯했다.
‘굳이 다 살필 필요도 없어.’
그는 대륙에 존재하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2개의 균열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차원의 구멍에 큰 변화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구멍을 만들어 낸 신성의 거대한 존재감은 여전히 차원 너머에만 존재했다.
‘좋아. 이상 없다.’
타이니는 두 개의 균열에 집중하던 의식을 동쪽으로 옮겨, 끝없이 해안가로 몰려들거나 내륙으로 파고들어 오는 이질적인 종족들을 살폈다.
‘인어족.’
물론 온 대륙에 몰려드는 모든 인어들을 다 살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놈들의 대략적인 분포와 머릿수를 얼추 가늠하는 것뿐. 그것도 해안가 한정으로 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계획을 정하는 데는 충분하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 통증을 참아 가며 전체적인 전황을 파악한 그는 그제야 비로소 눈을 떴다.
번쩍.
노을빛이 일렁이는 안광이 전면을 슬쩍 비추는 순간, 그는 그대로 튕겨 나듯 일어나며 순식간에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타이니 경!”
“광휘의 기사님!? 부상은…….”
“완치했습니다. 그러니 검제 영감님께 전해 주세요. 난 인어족 쓸어버리러 간다고.”
“축……. 예?”
“그럼.”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저.
쾅!
지붕을 뚫고 하늘로 솟구칠 뿐.
- 아우우우우!
- 콰아아아앙!
그리고 곧바로 천지를 울리는 늑대의 하울링과 함께 멀쩡한 밤하늘에 생겨난 노을빛 유성은, 그를 지켜보던 기사들의 멍한 시선을 뒤에 단 채 사라져 갔다.
* * *
-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 크락투스!
- 크롹!
- 콰아아아아앙!
- 쾅!
성벽 밖에서 밀려오는 무수한 군세.
알아듣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인어족의 공세를 지켜보며 저릭이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크락투스가 대체 무슨 말이냐!? 빌어먹을.”
“내, 낸들 알겠소이까.”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히익!”
저릭이 그 험악한 얼굴을 더 사납게 구기며 들이대는 순간.
반년 전쯤 웬 폭발 사고로 무주공산이 된 타란의 새로운 지배자, 록펠이 새파랗게 질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저릭은 굳이 녀석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곳 병력들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숫자는 많았지만 질이 좋지 않았다.
“어딜!”
그가 애병 아너를 벼락같이 휘두르는 순간 날아간 은빛 오러가, 인어족이 아닌 후방에서 도망치려던 아군의 코앞 땅을 갈랐다.
“히이이익!”
기겁을 하며 주저앉는 병사, 아니 양아치를 보며 저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아랫도리에 지린 흥건한 무언가가 멀리서도 눈에 들어왔지만, 저릭은 그것 때문에 인상을 찌푸린 게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쓰레기들.’
검제의 당부를 듣고 자신이 이곳 타란으로 오긴 했다.
무법 도시니 뭐니, 인생 막장들이 모이는 곳이라 해서 나름 각오를 하고 왔는데.
그럼에도 이곳에서의 지난 일주일은 그에게 지나친 정신적 피로를 가져다주었다.
그 원인으로는, 바다에서 쏟아지는 인어족들보다 아군에 의한 스트레스가 더 컸다.
그리고 그는 그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담아, 전선의 앞이 아닌 뒤를 향해 소리쳤다.
“기사들!! 도망치려는 놈들 먼저 죽이라니까!? 뭐 하는 거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 소리에, 성벽의 뒤쪽에서 ‘아군을 감시’하던 기사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명예로운 기사가, 도망치는 아군의 목을 베어 공포와 강압으로 사기를 올리는 독전관의 역할을 언제 해 보았을까.
아무리 저릭이 강요해도,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쉽게 검을 움직이지 못했다.
‘빌어먹을. 우리 오크의 전사들을 데려왔어야…….’
테르티우스로 보낸 전사들이 새삼스레 안타깝게 느껴졌지만, 그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네놈! 목이 나았으면 다시 소리 질러야지?”
“히익! 예, 예! 다, 당연히 그래야 합죠!”
저릭은 대머리 록펠의 목에 다시 도끼를 들이댔다.
그 결과.
“인어족 귀 한 쌍당 1골드를 준다! 1골드라고! 싸워! 싸우라고 이 쓰레기 새끼들아! 도망치면 어차피 죽어!!”
록펠이 엄청난 목청으로 전장을 울리는 고함을 질러 댄 순간, 성벽 안쪽에서 바깥으로 ‘붉은 돌’을 던져 대는 병사, 아니 양아치들의 속도가 잠깐이나마 빨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저릭의 눈에 찰 리 없었다.
‘내가 앞장서서 신나게 도끼를 휘둘러야 하는데, 이 쓰레기 놈 때문에…….’
뿌드득 이를 갈며 다시 록펠을 노려보는데.
“왜, 왜 그러심까! 저, 저는 분명히 소리를…….”
벌벌 떠는 대머리, 록펠.
놈을 보며 저릭은 일주일 전 첫 공방전 때의 황당함을 다시 떠올렸다.
- 전군 돌격!
자신이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내달릴 때.
- 우와아아!
거친 고함…… 아니, 비명과 함께 전방이 아닌 뒤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아군들.
순간적으로 인어 여왕이 다시 나타나 신화급 정신 마법을 쓴 게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양아치들의 가장 뒤쪽에, 이 록펠이라는 놈이 있었다.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마차를 향해 달려가는 놈.
‘설마 자기 고향까지 버릴 줄이야.’
그것을 확인한 순간, 저릭의 도끼는 인어족이 아닌 이 록펠을 비롯한 타란의 쓰레기들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꽈아아앙!
꽝!
그 양아치들의 손에서 쏟아지는 붉은 돌들이, 그의 부재를 상당 부분 메꿔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애드런 공! 폭뢰는 충분한가!?”
다만 그것도 일주일 밤낮을 쏟아 냈으니 떨어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예!”
“……예?”
내가 공용어를 여전히 잘 못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저 대머리 새끼가 창고 가득 폭뢰를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제작법이 발견되었을 때 이미 새어 나갔던 거 같습니다!!”
꽈앙.
- 캬아악!
꽝.
- 크락투스!
전장의 폭발음과 괴성을 뚫고 소리를 지르는 애드런의 목소리가 저릭을 더욱 어이없게 만들었다.
“하?”
이 새끼 봐라?
저릭의 살벌한 눈동자가 다시 록펠을 향했다.
“그때 나한테 쓴 게, 보급을 빼돌린 게 아니었구나?”
록펠을 잡아서 간신히 내성벽을 기준으로 다시 전선을 만들었을 때, 놈의 부하들이 일제히 폭뢰를 던져 왔던 기억.
그때의 불쾌감이 저릭의 눈에 살기를 감돌게 만들었다.
“그, 그때 저, 저희는 자위를 위해서……. 그, 더, 덕분에 전장을 유지하고 있잖습니까!? 사, 살려 주십시오!”
그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것이, 이 무법 도시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놈이 얼마나 뿌리부터 썩은 놈인지를 대번에 보여 주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놈이 필요하니까.
“혹시 감춘 폭뢰 있으면 다 내놔라.”
“예. 예. 물론입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털어 내야 할 거다. 폭뢰가 떨어지면, 먼저 네놈과 부하들을 저놈들 가운데로 던져 줄 테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록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괴, 괴물 새끼.’
의지를 싣지 못한 공격, 폭뢰의 폭발은 오러익시더의 영역에 휘말리며 큰 충격을 주지 못하는 데다가.
저릭의 특성인 약자 멸시는 그 영역의 효과를 더욱 증폭시키니,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도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었다.
수백 발의 폭뢰가 터진 후 피어오르던 연기 속에서 태연하게 걸어 나오던 저릭의 모습을 떠올린 록펠은, 차마 그의 말에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넘실거리는 살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 괴물은 폭뢰가 다 떨어지면 정말로 자신부터 저 인어족의 가운데로 집어 던질 것이다.
“이미 하나도 남김없이 기사님들께 제공했습니다!”
그 말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다만, 그 모든 폭뢰를 동원해도 앞으로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불행일 뿐.
- 이곳은 곧 인어족에게 점령된다.
협박을 하는 저릭도 당하는 록펠도, 그리고 싸우는 양아치, 아니 병사들까지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사실.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때.
“어?”
저릭이 갑자기 시선을 상공으로 던졌다.
하늘 위에서 느껴진 강력하고 익숙한 기파 때문이었다.
‘타이니!!’
반가운 동료의 등장이었다.
다만 조금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셋?’
저릭이 의아해하던 그 순간, 하늘에서 날아온 세 줄기 노을빛 유성이 타란의 외성으로 떨어지고.
꽈아아아아아앙!
콰콰콰콰콰쾅!
우르르르릉.
연달아 폭발을 일으키며 인어족들의 전선 전체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적의 숫자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전략 병기.
이천 년이 넘는 시간을 격하고 나타난 오러마스터의 존재를, 타란에 있는 모두가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