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검선의 이름으로…….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어르신.”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서일산을 보며, 검선은 쓰게 웃었다.
그 뒤로 보이는 거대한 칠두룡의 사체.
신화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괴물을 자신이 쓰러트렸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고향인 서방으로 떠난 제자가 그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선포는 결코 거짓이 아니었지만, 나머지 지분 중 상당수는 그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당하게 별거 아니라고 허세를 부리고 싶었지만, 하반신이 사라진 몸으로는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이 상태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조금만 더 강했어도…….”
서일산의 충혈된 눈에 서린 한이 결코 거짓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천하의 중천제일검 역시 어찌 보면 그가 뿌린 씨앗에서 자라난 거목이기도 했으니까.
쿨럭.
“나, 나 좀 일으켜, 주게…….”
“예? 예.”
“힘이, 없네그려.”
“어르신…….”
상반신만 남은 검선의 몸을 들어 올리는 서일산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광휘 공이 있었으면…….”
“크흐. 녀석을 원망할 생각은 말게. 알지 않나? 녀석은 원래 이곳 사람이…….”
“예, 예.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 상황이 아쉬워서…….”
서일산의 눈길이 폐허가 된 대지와 박살이 난 산과 강, 그리고 마기에 오염된 숲을 죽 훑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특히 오래 머문 곳은 무수한 시체가 가득한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아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이 갔습니다…….”
선 제국 황제의 숨은 검 암천일성(暗天一星)을 비롯해 연나라의 창천일기(蒼天一騎), 요나라의 동방신궁(東方神弓)까지.
십대 고수 중 3인을 포함해서, 수많은 용감한 무사와 병사들이 저 칠두룡을 잡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내가 모자랐다. 내가…….’
그 또한 서방제일검이 신화경이던 괴물의 수준을 혼세경까지 끌어내려 놓은 덕분이라 했다.
서방제일검, 광휘 공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희생은 반의반도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서일산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검선은 그런 그의 심정을 짐작한 듯, 남은 오른쪽 팔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힘내게.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는 것 알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도 없이 어떻게…….”
흐려지는 서일산의 얼굴을 보며 죽어 가는 검선이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약한 모습 보이지 말게. 특히나 남은 병사들에게는.”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 녀석이 그랬네. 벌레들의 우두머리는 여기 이 녀석보다는 확실히 약할 거라고. 자신을 가지게.”
……하지만 그 괴물은 신화경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어르신.”
점차 눈에서 빛이 꺼져 가는 검선을 보며, 서일산은 하고픈 말을 억지로 삼켰다.
“우리가 지켜 낸 거야. 우리가…….”
뿌듯한 눈길로 전장을 둘러보는 검선의 얼굴에 어린 자부심.
그 마지막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저 조용히, 수화로 지시를 내려 거인의 마지막을 배웅할 정예들의 소집을 명령할 뿐.
“마충 군단을 토벌하고, 나면……,”
그러다 힘겹게 뱉어 낸 검선의 목소리에 서일산이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 성물은, 후읍. 그 녀석에게 보내게.”
“예?”
“녀석이 말한 마(魔)의 왕(王). 더 큰 재앙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러겠습니다.”
떠나는 마당에도 다음 전장을 생각하는 검선을 말리지도 못한 서일산은, 그의 모든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힘이 더 못 되어 줘서, 미안하이…….”
서일산과 그의 아우 양일원. 그리고 선 제국과 요 나라, 연 나라의 정예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검선이 서서히 흐려지는 눈을 감았다.
“아닙니다, 어르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먼저 가는, 늙은이를……. 용서하게.”
“저희가 감히 어떻게…….”
세상에 홀로 선 거인.
너무 오랜 시간 홀로 지낸 끝에 속세에 혈육도 미련도 남기지 않은 시대의 거인이, 대륙의 재앙을 맞이하여 온몸과 영혼을 불태웠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모습에, 서일산을 둘러싼 모든 무사들이 벌게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녀석이, 보고 싶구나.”
그 자리에서 거인이 남긴 마지막 말을 알아들은 자는 서일산과 양일원, 둘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르신을 여기서 묻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국에서 국장으로 모시겠소.”
“암요. 아무리 시절이 수상해도 어르신께는 그런 대우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셔야 합니다.”
“저희 나라에서도…….”
칠두룡과의 전투를 끝낸 이들이 검선의 장례를 위해 사소한 다툼을 하던 때.
- 북부에서, 벌레들의 군세가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한고비를 넘긴 그들에게, 다시 재앙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빨리 움직여! 빨리!”
지휘관, 대해제일검(大海第一劍) 모용원호의 고함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 섬나라 서진의 군대에 전군 동원령이 선포되었다.
병사들을 징집하기 시작한 지는 이미 한 달도 넘었지만, 이제는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남자는 모두 차출하라는 명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게 모인 군대는 서진의 동쪽 해안가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병력의 대부분은.
“기름! 기름을 가져와!”
“화살이 모자라면 나무라도 깎아!!!”
적들에게 불화살을 쏘아 낼 궁병으로 배치되었다.
화살을 만들기 위해 나무들을 다급히 베어 내고, 시위를 만들 힘줄을 구하기 위해 동물들이 무차별적으로 남획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사흘.
사흘 안에 제대로 된 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인은 드물었으니, 자연스레 대다수의 병사들은 어린애 장난감 같은 활을 들고 불안에 떨며 화살에 기름을 묻히고 있었다.
“장군, 아무래도 화력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외부의 지원을…….”
“날아오는 벌레 떼보다 빨리 지원을 올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병사들 사기를 떨어트리는 소리는 입 밖에도 내지 마!!”
모용원호는 애꿎은 부관에게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쪽에서 들려온 소식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마충 군단이 서부로 이동하고 있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생명을 초토화시키며 진군 중.
신화경의 괴물로 보이는 거대 벌레 확인.
그리고 그 진군로는 명백하게 이곳, 서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내가 뭐랬어! 그 양키들을 들이는 게 아니라니까!!”
“형님 말이 맞습니다! 그 천한 오랑캐들이 이 나라에 재앙을 불렀습니다!”
1왕자 진사량과 3왕자 진호량이 평소와 다르게 한목소리를 내며 핏대를 세우는데, 차마 말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시중에 도는 소문은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재앙 토벌에 앞장섰던 서방제일검을 가장 먼저 동대륙에 들인 나라가 서진이었기에 마물들의 목표가 된 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서방제일검이 이 땅에 재앙을 들인 것이다!
‘그럴 리가…….’
헛웃음이 나오는 매도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마충 군단의 목표는 서진이 아닌 선 제국이 되어야 했다.
자국부터 살기 위해 대외적인 군사 동원을 포기한 서진과는 달리, 선 제국은 서방제일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니까.
그럼에도 선 제국은 마충 군단의 전진에 따라 큰 피해를 보기는 했지만, 놈들의 진군로가 아닌 곳에는 마물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재앙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그걸 알면서도 자신 역시 괜히 광휘 공을 원망할 마음이 드는 것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니 매도할 대상을 찾는가. 추하구나, 나도…….”
모용원호는 부관에게 왕자들을 치우라고 명령하고는 막사 안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외숙부가?”
“대, 대장군이?”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두 분은 후방에서 지켜만 보시랍니다.”
“아니…….”
서서히 멀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사실 부관에게 괜히 소리치기는 했지만, 시간상 여유가 있어도 서진이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국의 영토를 보존한답시고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은 나라를, 어느 나라가 돕겠는가.’
그 대가를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며칠 뒤가 정말로 왕국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한숨만 푹푹 쉬던 찰나.
치지직.
동대륙에는 많지 않은 서방의 귀물, 통신구에 갑자기 신호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통신구에는 그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신호가 잡혔습니다.]
[그래. 비켜라, 내가 직접 말할 테니. 게 누구 없느냐!? 선 제국의 대장군 서일산이다!]
“중천제일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통신구 앞으로 향하는데.
[음. 그대는 모용 공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중천제일검. 하지만 안부 인사나 할 때는 아니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 말을 하면서도 모용원호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 통신이라니.’
내륙엔 아직 미처 토벌하지 못한 마룡 군단의 괴물들도 있다고 들었다.
재앙이 다 사라진 것도 아닌데, 그저 비꼬자고 연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리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원군이 오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은 알지만, 선 제국이라면 무슨 방도가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제국에서 방금 파악한 정보입니다. 마룡 군단의 남은 괴물들도 전부 서방을 향하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모용 공?]
“예!?”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소문으로 들은 마충 군단만 해도 상대할 자신이 없거늘,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어, 어떻게……!? 저희 왕국이 그리 큰 죄를 지었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천벌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진정하십시오, 모용 공.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냥 스쳐 지나갈 재앙일 뿐입니다.]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아국과 연, 호, 강 나라의 정예 병력들도 서진을 돕기 위해 빠르게 진군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맞추지는 못하겠지만, 버텨만 주신다면 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저도 장례를 치른 후에 바로 출발할 것입니다.]
“……아!”
분기를 터트리던 모용원호는, 서일산의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원군이 오는 겁니까!?”
이 시국에 무슨 장례를 치르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을 꿀꺽 삼켜 가며 물은 말.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버티십시오. 어쩌면…….]
“우와아아악!”
[……마물들의 목적지가 서진이 아닐 가능성이 큽…….]
모용원호는 자신도 모르게 발작적인 고함을 지르느라, 서일산의 뒷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희망이 생겼다.
오직 그 사실만 집중할 뿐.
그런데 그가 그리 말하는 순간 서일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원군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말입니다만, 부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모용원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군을 빌미로 삼아 저들이 요구할 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들이 머릿속을 확 스쳐 지나가는데.
이어진 말은 또 한 번 그의 생각을 벗어났다.
[신화경의 유물 두 점을 서대륙으로 운반하고자 합니다. 이미 서대륙과 통신을 마쳤으니, 서진에선 가장 빠르고 튼튼한 배를 준비해 주십시오.]
“……예?”
[듣지 않으셨습니까? 서대륙에서는 마물들의 행선지가 서진이 아닌 서대륙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서방제일검이 우리를 도왔으니, 우리가 이번엔 그를 도와야지요.]
“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동대륙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동대륙에 있고, 서진의 대장군 모용원호의 입장에서 그 중심은 곧 서진이었으니까.
그러다 이내, 그는 중천제일검의 말이 큰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반색하는데.
‘정말 지나가는 길이라면,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희망찬 생각에 주먹을 불끈 쥐는데.
[쉽게 생각하진 마십시오. 마룡 군단은 몰라도, 마충 군단이 지나가는 경로는 완벽하게 서진을 관통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물론입니다.”
방심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저희 원군도 도울 테니, 말씀하신 배나 은밀하게 준비해 주십시오.]
그 조건을 생각하다 보니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요정신궁은 대륙을 하루에 왕복할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굳이 왜 우리가 배를…….”
[서방에는 다른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무슨 물고기 인간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는데…….]
“예?”
[서대륙이 대충 수습되는 대로 서방제일검이나 요정신궁이 성물을 가지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것은 그 기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니, 선원들에게도 바다 한가운데서 커다란 새나 늑대를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라 전해 주십시오.]
새는 그렇다 치고, 늑대?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싶었지만, 어차피 지금 그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서방제일검에게 그 유물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부숴도 되냐고 물어왔던 게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은혜는 갚아야지요.]
“그렇죠. 은혜는 갚아야지요.”
은혜와 원한을 잊지 않는 것은 무사로서의 기본.
중천제일검의 정론에 모용원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뒤.
“사, 살았다.”
“엄마…….”
“으아아아앙!”
거대한 벌레의 떼가 서진의 국토를 관통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가운데.
서쪽으로 멀어져 가는 괴물들의 군세를 보며, 살아남은 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신 오지 마라!”
“워이!”
“빌어먹을 마물들!”
마물들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고 한참 뒤에나 그렇게 소리를 지를 정도.
마룡 군단의 잔당들과 마충 군단의 전체가 바다를 뒤덮으며 서쪽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모습에는, 경로에 있는 모든 것들을 멸망시킬 것 같은 위세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들이 지나간 폐허의 뒤쪽에서, 작고 빠른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성을 담은 유물 두 개를 실은 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