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멸절의 유성
파바바박.
“아우우우우우우!”
간간이 하울링을 울리며 질주하는 월랑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타이니는 그 스피드를 느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가 동방에서 말하는 신화경, 서방에서 말하는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뒤로 월랑 역시 존재의 격이 달라진 듯했다.
온몸의 털에서 은은한 노을빛이 묻어 나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조차 변화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허공에서의 전투도 이젠 거의 부담이 없겠어.’
빨라진 속도도 속도지만, 허공을 밟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데도 한계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빨리 가자. 알았지?”
“컹!”
파아아아앙.
유성처럼 허공을 질주하는 월랑의 움직임은 참으로 만족스러웠지만, 타이니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인술라의 균열을 앞에 두고 사색에 잠긴 크롬벨을 홀로 내버려 둔 채, 인어족과의 전투가 한창인 동해와 카룬으로 향하는 길.
‘이게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 나올지도 모를 칠죄종을 기다리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존재하는 적을 박살 내는 것이 성미에 맞았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통신을 했던 검제의 마지막 얼굴이 눈앞에 다시 선하게 떠올라 쓴웃음이 나왔다.
- 벌써 회복되었다고!? 오러마스터!? 이런 호재가……. 뭐? 여기로 온다고?
- 그럼 네놈이 혼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랑켄 평야에 계시는 수호자님은 뭐가 되는 거냐! 책임감을……!
- 빌어먹을! 그렇게 네놈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멋대로 해!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랑켄 평야에는 질투를 상대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이 남아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인술라에 남아야 할 것은 크롬벨이 아닌 자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태를 직접 상대하고자 하는 크롬벨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도 했고.
대륙 동부 해안과 섬 전체에 출몰한다는 인어족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크롬벨보다 자신이 더 적합했다.
‘지금의 난 대마법사인 크롬벨보다 광역 공격에서 더 우위를 가진다.’
설사 크롬벨이 나태를 감당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도망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판단이 이렇게 자신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다만 그러면서 조건이 하나 붙었으니.
- 젠장, 기왕 올 거라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후방에서 보급을 끊고 있는 괴물이 있다. 아무래도 전에 놓친 그 도플갱어로 보이는데.
- 믿을 만한 요원을 파견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둘러보고 와라. 좌표는…….
‘이 근처인데…….’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으로 허공을 가로질러 가는 길.
그의 감각이 한순간에 지상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스아아아.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영역, 에너지 필드.
말 그대로 신의 영역에 달한 그의 감각이 질주하는 와중에도 지상의 정보를 빠르게 읽어 내는데.
딱 그 타이밍에 소멸되는 마기가 느껴졌다.
‘굳이 도와줄 필요가 없었네…….’
도플갱어, 초인급 마족을 대체 누가 어떻게 잡았을까 싶은데.
직후에 그 옆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라프탄……?’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프탄 녀석이 도플갱어를 잡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의외였던 것은, 녀석의 기척이 느껴졌을 때 자연스럽게 다시 떠오른 검제의 말이었다.
‘믿을 만한 요원이 라프탄이야?’
헛웃음이 나왔지만, 또 뿌듯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전생에 비해 가장 크게 인생이 바뀐 것이 저 정령사 라프탄이었으니.
다시금 반복된 인생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았으니까.
잠깐 내려서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갈 길이 급하니 나중에 보자고, 친구.’
허공을 질주하는 타이니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지는 그 순간.
“……유성?”
라프탄은 때마침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노을빛 유성을 바라보며 죽은 아모스의 평안을 위해 기도했다.
울적한 와중에도 왠지 코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억지로 참아 가면서.
* * *
“합!!!”
쩌어억.
“끼에엑!”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붉은빛 오러블레이드가 한순간 크게 확장되며 전방의 인어족들을 덮친 순간.
거의 백에 달하는 인어족 기사들이 그대로 참살을 당하며 전방이 뻥 뚫렸다.
하지만 검제는 그것을 보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고함을 지르며 끝도 없이 달려들어 오는 인어족들.
“꺄아아악!”
“크롺!”
“크롹투스!”
어디를 둘러봐도 시야를 꽉 채운 저 혐오스러운 종족의 공세는 끊이질 않고 있었다.
촤악.
스각.
쾅!
“끄르륵.”
“크롹[email protected]#!”
시끄러운 놈들.
큰 기술로 다시금 전면을 비워 봤자, 항구에서부터 에낙센의 내성벽 앞까지 끝도 없이 인어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물고기 꼬리였던 하반신이, 대지를 딛자마자 인간의 발로 변하는 불합리한 종족.
그리고 그중에는 가끔.
쾅!
“끼끼.”
자신의 일격을 잠시나마 막아 내는 강적도 존재했다.
물론 그래 봤자.
“웃어?”
촤악.
결국 세로로 쪼개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의 머릿수가 많은 만큼 모든 공격에 오러를 실을 수는 없었으니.
이런 놈이 가끔씩 튀어나오는 것만으로도 순간적으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하수들에게 당한 그는 아니지만.
후방이 걱정이었다.
- 죽여!
- 클[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 크롹투스!
꽝!
우르르릉.
방어선이 내성벽까지 밀려난 상황이니, 그 바깥쪽의 외성 건물들은 이미 다 무너진 지 오래.
그는 그 폐허에서 홀로 정신없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내성벽은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이 낙관적인 징조는 아니었다.
“크롹!”
촤아아악.
다시 한번 전방을 쓸어 낸 검제가 신경질적으로 바다 위로 시선을 던졌다.
새까맣게 밀려오는 인어족들. 그리고 그 너머에 있을 하나의 왕국.
‘빌어먹을. 카룬은 멀쩡할까?’
12대 기사 중 랑켄 평야에 있는 이들을 제외한 7명은, 자유 도시 7군데에 각자 흩어져서 인어족들을 막아 내기로 했다.
물론 그중 대륙 동부 해안으로 튀어나온 도시인 이곳 에낙센에 모여 방어선을 구축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인어족의 상륙 전쟁은 대륙 전역에 걸쳐져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이곳에 남고 보니, 바다 건너에 있는 카룬이 자꾸 신경 쓰였다.
헨리 1세라는 걸출한 젊은 왕 아래 다시 성세를 되찾아 가던 카룬이지만, 이 미증유의 재앙을 막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저 대륙을 정복하려 하는 인어족이 섬나라인 카룬에 전력을 집중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
물론 지금은.
“합!”
스각.
촤악.
푸우욱.
“끄르르.”
눈앞에 인어족부터 참살하고 보는 것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남은 마나는 절반 이하.’
다시금 후퇴해서 잠시라도 쉬어야 할 때였다.
그동안 병사들의 희생이 커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마음이 무거워지자, 반나절 전에 통신을 했던 싸가지 없는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깨어나자마자 제멋대로 위치를 이탈하겠다고 통보해 온 놈.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타이니 녀석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어.’
잊지 말아야 했다.
‘여기선 인어족과 대치하고 있지만, 인류의 주적은 마족이다.’
인해 전술을 펼치는 인어족이 마족의 비대칭 전력인 셈이라면, 이쪽에도 상식 외의 비대칭 전력이 필요했다.
이 지긋지긋한 인어들을 빨리 끝장내고 다음번 재앙에 대비할 여력을 만들 수 있게 말이다.
물론 그럼에도 확신은 없었다.
타이니 녀석이 오러마스터가 되었다고 전해 왔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었고, 또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이 머릿수를 어떻게 혼자 극복할 수 있을까.
‘도움은 되겠지만.’
촤악.
“크락투스!!”
쩌억.
‘대체 크락투스가 무슨 뜻……. 아니, 아니지.’
검제는 정신없이 인어들을 베어 넘기며 성벽을 향해 방향을 바꿨다.
몰려오는 적들을 끝없이 베는 일은 심리적 소모도 상당했다.
그 적들이 자신의 수준에 비해 현격하게 약하니, 차라리 이렇게 딴생각을 하는 것이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도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쓸데없는 인어족의 언어보다는 타이니 녀석의 성취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인어족 여왕도 사실상 녀석의 빅뱅에 끝장난 게 맞지.’
그 일격이 세상을 뒤집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런 만큼 일격을 쓰고 탈진하는 것도 당연.
‘그 녀석의 모든 기술이 그렇지만, 빅뱅은 특히 그래. 과연 뭐가 달라졌을까.’
과연 오러마스터가 된 타이니에게는 이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를 뒤집을 만한 수가 있을까?
뭐, 어쨌건 타이니가 온다면 도플갱어의 짓으로 추정되는 후방의 보급 교란 문제는 일단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위안하는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끄르륵.”
“다 꺼져라!”
번쩍.
쩌어어어억.
검제는 막막하게까지 느껴지는 적들의 숫자를 보며 다시금 ‘절단’을 사용해 사방의 인어족을 일거에 무너트렸다.
“크락투스!”
“크롸!”
하지만 그래 봤자, 다시 밀려들어 온 인어들이 금방 그 자리를 채웠다.
대체 이놈들은 원래 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것일까. 당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래도 이것들의 머릿수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홀로 성벽 밖으로 튀어나와 인어족들 사이를 파고들어 적들의 주위를 끌고 전력을 분산시킨 지도 벌써 닷새째.
‘끝이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해.’
그동안 매 순간마다 해 온 생각을 되뇌며, 검제는 다시금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내성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 무너진……!
- 안 돼!
우르르르릉.
병사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내성벽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검제는 무너진 성벽을 향해 다급히 돌진했다.
“다 꺼져!”
스각.
쩍.
쾅!
걸리적거리는 인어족들을 그대로 쓸어 버리다시피 돌진하면서도 속으로는 암담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에낙센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일곱의 자유 도시가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 전장은 내륙이 될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인어족의 공세에 무너지는 성들.
그리고 그 틈을 타 강림하는 칠죄종들.
난장판이 되는 대륙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쉬어야겠고 생각한 것이 바로 직전인데, 자연스럽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젠장, 내가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되는데.’
속마음과는 달리, 그의 몸은 성벽이 무너지는 곳을 향해 엄청난 높이로 도약했다.
파박.
오러익시더의 극에 달한 뒤로, 그는 중력 조절 능력으로 자신의 몸을 거의 깃털 수준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성벽 앞에 내려서기 전.
그의 온몸에 붉은빛이 서리는가 싶더니, 이내 애검 붉은 날개에 섬뜩할 정도로 진한 붉은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타이니의 마나바디를 흉내 내서 개발한, 육체 능력을 순간적으로나마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는 ‘증폭’의 힘이 발현되고.
‘절단!’
이내 그 힘은 고스란히 붉은 날개에 실려, 무너진 성벽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인어족들을 향해 휘둘러졌다.
쩌어어억.
우르르르르르르릉.
그야말로 붉은 번개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듯한 광경.
검제의 검을 따라 지면이 일직선으로 갈라지며, 그 범위 안에 속한 적들이 통째로 분쇄되었다.
“끄아악!”
“끄르르.”
“크락, 투스!”
우르르르릉.
콰아앙.
“각하!”
“누구도 이 선은 못 넘어간다!!”
병사들의 환호 속에서 무너진 성벽의 앞에 도달한 검제는 붉은 아지랑이를 전신으로 피워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전군 반전! 내 뒤에서 방어진을 쳐라!!”
한순간에 전장을 장악하는 고함.
겁을 모르는 듯했던 인어족 역시 움찔하면서, 잠시간 전투가 멈추었지만.
머지않아.
“크락투스!!”
“크락!”
두두두두두.
전장의 모든 인어족들이 마치 쐐기 진형처럼 늘어선 채로 검제를 향해 몰려들어 왔다.
그러자.
“어림없다!”
쾅.
검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기운이 구체를 형성해 사방으로 뻗어 나가더니, 그를 향해 달려들던 인어족의 최전선을 찍어 눌렀다.
위력봉쇄(Power Lockdown).
“끄으으.”
“크락…….”
“……투스.”
그 붉은 아지랑이의 힘을 억지로 버텨 낸 인어족의 강자들이 비틀거리며 하나둘씩 일어서기 시작할 때.
까득.
‘……음?’
이를 악문 검제의 눈에,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노을빛 유성이 보였다.
그것을 인식한 순간 그의 얼굴에 살벌한 미소가 스치고.
‘반전(Reverse)!’
쾅.
인어족들을 찍어 누르던 중력의 오러가 갑작스러운 힘의 역전을 보였다.
한순간 최전방의 인어족 전체를 허공으로 날려 버리는 일격.
“크롹!?”
그리고 그런 인어족들의 머리 위로.
노을빛 유성이 떨어져 내렸다.
검제&괴력의 기사.
합격기, 멸절의 유성
이제는 지워진 시간대에서 마수왕을 끝장냈던 마지막 기사들의 합동 기술이, 현세에 재림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