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나태의 미련
“인어족의 여왕이 그 파멸의 빛에 당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넌 동료들을 모두 버리고 도망쳤고?”
“그렇습니다. 죄를 물으신다면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차갑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그랜달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변수를 주군께 반드시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보니도 그렇게…….”
분명한 어조로 답변을 이어 가던 그랜달도, 남기고 온 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악문 그의 목소리가 더는 흘러나오지 않았고.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닥으로 소리도 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똑. 똑.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에.
그 주인의 입이 열렸다.
“……그래. 그런 변수라면 알려야지. 잘했다. 쉬거라, 그랜달.”
생각지도 못한 용서의 말이 나왔음에도 그랜달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예. 주군.”
그러다가 뒤늦게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무릎 꿇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켜서 거대한 대전의 문 밖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그가 사라진 자리.
거대한 대전 안에 홀로 남겨진 옥좌에서, 한참 후에야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변수가 있었다……?”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미형의 얼굴.
“하…….”
우르르르릉.
나직이 한숨을 내쉰 그의 짜증 때문에 일어난 기파에 대전 전체가 흔들리는데.
그 난리의 주범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른한 얼굴로 기지개를 켤 뿐이었다.
“귀찮아. 정말 귀찮은 일이야…….”
짜증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나태 슬로스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파멸의 빛을 뿜어내는 워해머라니, 설마…….’
똑. 똑.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의 박자가 일정하게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우연이라고 우길 수는 없겠지…….”
짜증과 귀찮음이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나른한 목소리.
옥좌에 앉은 붉은 머리 미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타락한 굴라가 보관하던 그분의 무기가 우리를 치고 있다. 굴라가 꺾였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나?’
그랜달에게 들은 이야기는 아주 터무니없었지만, 한 가지 가정을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파멸의 빛을 뿜어내는 워해머.
“피니스(Finis). 그 물건을 휘두를 수 있는 인간이 있다? 그것도 이 타이밍에 굴라를 쳐 죽이고 얻은 인간이? 참 나, 우연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2천 년이라는 긴 세월은 중간계의 카르마를 흡수하기 위해 남겨 둔 그분의 애병이 본래의 주인을 잊게 만들기에도 충분했나 보다.
‘일부러 약화시켜 놓으셨다고 듣긴 했다. 미궁에서 중간계의 카르마를 먹고 충분히 성숙하도록 맡겨 놓으셨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의 무기가 인간의 손에 들어가 있다니.
“어이가 없어. 어이가…….”
그것은 그분의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분이 멸살의 권능을 심어 놓으신 피니스는 마족이 아닌 존재가 그것을 쥐었을 때 영혼부터 분쇄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니.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 권능을 버텼지?’
‘중간계에서 태어난’ 마족들의 손에서 중간계의 카르마를 먹고 숙성되었어야 할 신의 무기.
순리를 무너트리고 편법을 취한 여신이 무한정으로 쏟아부었던 카르마에 대항하기 위해 취한 작은 편법.
곧 진정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무기가 엉뚱한 놈의 손에 들어가서 애꿎은 아군들을 때려잡고 있는 꼴이 아닌가.
심지어 그 위력이 상위 칠죄종에 필적하는 인어족의 여왕까지 없앨 정도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일단 무기의 힘 때문만은 아닐 거야. 적어도 그때의 크롬벨이나 나 같은 수준의 인간이 그걸 휘두르고 있다는 말인데.’
서대륙에서의 일들이 대부분 실패했던 원인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한 놈이라도 살아 돌아와서 알려 줬다면 미리 대비했을 텐데. 각 군단끼리 경쟁하는 것도 좋지만, 이래서야 단점이 너무 치명적이지 않은가.’
모든 게 짜증 나고 귀찮았고, 이런 상황까지 오게 만든 수하들이 한심했다.
물론 변수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했다.
어차피 인간은 신성에 닿지 못하고, 천계는 당장 중간계의 일에 간섭할 수 없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의 최대치는 2천 년 전 자신과 크롬벨의 수준까지다.
크롬벨이 사도의 능력을 쓰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단순 무력으로는 자신, 다양성 측면에서는 크롬벨.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인간이 신의 무기를 들었다면 큰 문제가 될 법하다.
자신이 직접 강림해서 빼앗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혹시라도 멸살의 권능에 다치기라도 하면 그 손실은 영구히 메꿀 수 없다.
‘그건 곤란하지…….’
세상이 다시 순리대로 돌아가고 나면, 천상에서 군림하게 될 그분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이는 칠죄종 중에서 나오게 된다.
그린 아이나 라스는 솔직히 경쟁자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휴브리스는 만만치 않다.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라도 최악으로 일이 꼬일 경우.
‘인간은 연약하니까.’
그린 아이가 ‘사자(死者) 부활’을 쓰고 라스가 마충의 번식력을 앞세운다면, 군단의 머릿수에서 앞서게 될 그놈들이 자신보다 더 큰 공훈을 챙길 가능성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강림의 순서가 하위 서열부터로 정해져 있는 건 본디 가장 강한 칠죄종이 압도적으로 공을 쌓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러니.
‘내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차피.
‘피니스만 빼앗으면 변수랄 것도 없어.’
피니스가 없는 과거의 자신이나 크롬벨 정도 수준이라면, 손가락으로도 눌러 죽일 자신이 있었다.
‘제일 편한 방법은…….’
어차피 이제 강림의 통로는 모두 뚫린 상황.
그렇다면 그분께 임시로나마 임명받은 사도를 중간계에 보내서, 피니스에 원주인을 각인시켜 다시 회수해 오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결론이 났으니, 이제 그분께 아뢰면 될 일이다.
질책을 하시긴 하겠지만, 이미 세운 공이 있으니 조금 타박하시는 정도에서 그칠 것이다.
옥좌에서 일어난 슬로스가 천천히 그 뒤쪽 공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태라는 죄악에 걸맞게, 지독하게 느린 속도로.
터벅터벅.
‘아, 이 귀찮은 건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그렇다고 누구를 시킬 수도 없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은 오직 자신이어야만 하니까.
‘회수는 역시 그랜달에게 맡겨야겠지? 그래야 내 공로가 될 테니.’
그는 억지로 움직여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기 위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인어족은 여왕이 사라진 이후에도 꾸준히 카르마를 생산하고 있다.’
아마도 여왕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랜달을 비롯한 자신의 장군들이 여왕을 부활시킬 때, 그녀를 탄생시킨 힘인 고대 인어족의 염원 중 일부를 마계로 빼돌렸다는 것을.
덕분에 여왕이 소멸한 후에도 인어족은 중간계에 남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마계로 카르마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 모두가 자신의 공이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여왕이 피니스의 새 주인에게 죽은 건 그 때문이었을지도…… 아니, 그럴 확률이 높으려나?’
온전한 상태의 인어 여왕은 고대에 신에게 직접 도전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그럴 것도 같았다.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피식.
중간계에 다시 갈 날이 다가오다 보니 이상하게 웃음이 많아진 듯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은 정말 행운아였다.
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것이 세상의 순리.
그러나 창조에 일조했던 대지의 여신은 순리대로 찾아온 파멸로부터 세상을 억지로 지키고자 했었고, 그것이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자신은 그런 신화시대의 말미에 재능을 개화해 초인이 되었고.
창조신의 유물을 얻어 시간을 한 번 거스르면서까지 최고의 영웅이 되어 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당시 크롬벨과 동료들은 자신이 창조신의 유물이 변한 권능의 조각인 운명의 파편에 홀린 거라고 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때야 비로소, 전생에서 만났던 그분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 순리는 일그러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원래 이행되었어야 할 파멸뿐이다.
파멸과 생성의 순리는 깨어졌고, 남은 것은 파멸뿐이다.
이미 일그러진 질서는 어떻게 해서건 파멸을 불러올 것이고.
결국 그렇게 이뤄진 파멸은.
‘영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편에 서는 것이 좋지 않은가.
왜 파멸이 닥쳐올 것을 알면서 아등바등 발버둥 쳐야 하는가.
그는 아직도 절규하던 옛 동료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같은 생각을 했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단 말이야, 친구들.’
스스로 지었던 솜누스(Somnus)라는 이름 자체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게으르게, 나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만 기왕이면 최고의 위치에서 그러고 싶다는 것이 일반적인 게으름뱅이와 달랐을 뿐.
그리고 그런 그가.
‘나태의 죄악을 이어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운명이 아닐까.
나태라는 칠죄를 받아들이던 순간의 그 쾌락. 그 운명의 계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물론 다른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한번 뛰어넘어 가며 최선을 다해 인류를 이끌었던 그를 저버리고 크롬벨을 사도로 삼은 여신.
그리고 역시 그가 아닌 크롬벨을 택했던 검은 머리 성녀.
그녀들에게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던 마음도 솔직히 조금, 아주 조금은 있었다.
그중 광신도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여신은 그렇다 치고.
“기분이 어땠을까? 직접 물어보지 못한 게 한이란 말이지.”
자신이 전향하던 순간 성녀가 짓던 표정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전생의 잘못을 만회하고자 최선을 다한 자신을 외면하고 또 그 얼빠진 멍청이 광신도, 크롬벨을 택했던 어리석은 여자.
아마도 지금은 천계에 올라 천사가 되어 이를 박박 갈고 있겠지만.
그녀가 그날의 선택을 다시 후회하게 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중간계는 그저 디딤돌일 뿐…….
“그렇지. 디딤돌…….”
천계가 멸망하는 순간에 그녀를 만난다면 이번에야말로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말해 주고 싶었다.
조금 과장하면 어떤가. 그 절망하는 얼굴이 보고 싶은 것뿐이니.
‘네가 날 택하지 않았기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그런 상상을 하며 히죽이다가, 그는 문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사람. 인간이었을 적에 가장 가슴을 아프게 했던 상처를 준 사람.
그 사람을, 오랜 세월을 격해 마침내 떠올렸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하…….”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인간이었던 시절, 하찮았던 시절의 미련이 이제야 비로소 지워진 것일까.
우뚝 멈춰진 발걸음, 굳어 버린 표정.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그 잘생긴 얼굴에 히죽 피어나는 미소와 더불어, 그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점점 빨라지는 발걸음만큼 그의 목소리도 들뜨기 시작했다.
“그래, 드디어…… 미련이 사라졌다. 그래…….”
나태의 죄악을 부여받으면서 느려졌던 발걸음이 이 순간만큼은 왜인지 조금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드디어 내가! 진실로 신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 생각에 시작된 코웃음은 이내.
“푸하하하하하!!”
우르르르르릉.
거대한 궁전을 진동시키는 광소로 변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지나간 자리.
그의 얼굴에서부터 떨어진 작은 물방울들이 발자국 하나하나마다 작은 흔적을 남겼다.
한때 인간이었던 그가 남긴, 아주 작은 흔적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