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해머-437화 (437/500)

437화. 끝이 보인다

‘이게 진짜 오러마스터.’

쿵.

주먹을 꽉 쥐는 것만으로 사방을 진동시키는 파장이 흘러나왔다.

경지가 올랐다고 해서 환호성을 지르고 잔치를 벌일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자연스레 뿌듯한 미소가 배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권능, 불굴 또한 이제는 온전히 완성되었으니.

여왕과의 싸움에서 불굴이 무적의 무기가 아님을 새삼 깨달았지만, 그래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빅뱅 한 번으로 탈진할 일은 더는 없다.’

힘과 함께 자신감도 넘쳐흘렀다.

혹시나 저번처럼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만해지지 않을까 했던 일말의 걱정도 기우에 불과했다.

자신의 영혼은 오직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 완전했다.

편법으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때 주변의 모든 것이 버러지같이 느껴졌던 게 영혼과 육체의 부조화 때문이었다는 것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물론 갑작스레 세상 전체가 조금 더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꾸우욱.

우우웅.

‘이 정도야 조절하면 돼.’

타이니가 가만히 앉아 주먹을 쥐고 펴 보며 변화를 가늠하던 중.

방 밖에서 익숙한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방문이 벌컥 열렸다.

“크롬?”

조금 어색한 사이인 동료, 크롬벨이었다.

“타이니 경! 정말로 깨어났, 어……?”

그는 애매한 표정으로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를 느낀 듯 흠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당신, 설마……?”

무언가 눈치챈 듯한 표정에 타이니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상황 설명보다 먼저 물을 것이 있었다.

“지금 이 섬에 다른 사람들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크롬, 너 혼자 있는 건가?”

물론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동료들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자연스레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하고 던진 그 말이 크롬벨의 눈을 더 크게 뜨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섬에 있는 인기척을 전부 구별했다고? 그럼, 정말로……? 아니, 설마…….”

그 반응에 타이니는 자연히 쓴웃음이 나왔다.

그건 전에도 가능했는데.

“설마가 맞아. 오러마스터, 반신의 경지에 올랐다. 넌 불가능하다 했지만.”

우우웅.

그가 느낀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타이니는 영혼의 존재감을 슬쩍 드러내 보였다.

아무런 에너지도 움직이지 않고 순수하게 영혼의 격만을 드러낸 것이니, 수준이 낮은 이라면 그 변화를 느끼지 못했을 터.

하지만 그 순간 크롬벨의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쿼드러플 8단계의 초인.

오러익시더이자 대마법사이자 스피릿액셀. 그리고 성자급 신성력의 보유자.

신성에 한없이 가까운 초인인 그는 단숨에 타이니의 변한 기세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상식이 다시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아니, 어떻게, 말도 안 됩니다! 이건!!”

그에 피식 웃은 타이니가 이번엔 작정을 하고 그대로 기세를 뿜어냈다.

우우웅.

무너지지 않는 권능, 불굴을 바탕으로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마나. 그리고 그 근간에 자리한 영력, 아니 신성.

두두두두두.

단순히 무작정 에너지를 끌어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있는 남해 어부 연합의 건물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 뭐, 뭐야?

- 지진?

밖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고 크롬벨의 얼굴이 무겁게 굳어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 후에야 타이니는 그 힘을 거둬들였다.

“이제 믿겠어?”

“허…….”

그럼에도 크롬벨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복잡하게 변화하는 표정.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와 스스로의 상식, 아니 신앙이 충돌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이내 한순간 얼굴 근육을 찌푸리다가 다시 무표정해진 그가 기계적인 어투로 되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쯧.’

마인드 킬링이 작동한 것 같았다.

단순히 오러마스터의 흔적을 보인 것에 그 편법이 작동할 정도로, 크롬벨에게는 이 사실이 충격적인 듯했다.

어쨌거나 타이니에겐 그것보다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은?”

“전투가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당신이 쓰러진 지 그만큼 된 거죠.”

“일주일!?”

“그래요. 일주일. 그사이 대륙의 동부 해안에서 인어족들이 재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아…….”

“동대륙에서 건너올 마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배치됐던 연합군들이 인어들과 싸우고 있지요. 다른 분들은 그 상황을 빠르게 종식시키기 위해 모두 그쪽으로 움직였습니다.”

크롬벨의 말은 여왕을 처리한 후 급변한 전세를 아주 잘 설명해 주었다.

다만 그럼에도 납득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여왕이 죽었는데도 인어족이 사라지지 않은 거야?”

“그런 듯합니다. 뭐, 세세한 이유야 여신께서나 아시겠습니다만.”

당황스러운 상황.

인어족의 번식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만큼 그 말은 충격적이었다.

‘어쩌면 마족을 극복하고 나서도 인어족이 우환으로 남을지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미래의 일을 걱정해 봤자 당장 특별한 방도가 생길 리는 없었다.

타이니는 한숨을 내쉬고는 눈앞에 있는 크롬벨을 바라보았다.

“그럼 너는? 설마 네가 날 간호하겠다고 남은 건 아닐 텐데?”

그 말이 웃겼을까, 크롬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태의 장군들이 모두 죽었으니, 솜누스가 강림할 차례 아닙니까? 전 그놈이 눈앞에 나타날 가능성을 두고 다른 일을 할 만큼 속이 넓지 않습니다. 애초에 놈을 처리하는 건 인류를 위해서라도 중요한 일이고요.”

목적이 지나치게 확실한 고대의 용사.

그의 말에 타이니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크롬벨이 그에게 물었다.

“이제 제 차례죠? 어떻게 된 겁니까? 인간이 여신의 세례 없이 어떻게 신성을 얻은 거죠? 불가능할 텐데?”

“여신의 세례?”

“신화시대의 오러마스터들은 죄다 신의 세례, 서임을 받고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의 기사라고 불렸었죠. 그나마도 신화시대의 말미에 와서는 거의 불가능해졌지만…….”

신의 기사라.

처음 듣는 이야기에 흥미가 동하긴 했지만, 지금은 크롬벨의 그 쓸데없는 상식을 깨 주고 싶었다.

“그런 거 없어도 오러마스터가 될 수 있어. 나도 몰랐는데, 동대륙의 역사에는 신성을 얻었던 이가 둘이나 더 있었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창천검제와 무적권마의 최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천계와의 충돌.

그 사실을 크롬벨에게 전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관두자. 쯧.’

여신의 세례 없이 신성을 얻은 것만으로도 마인드 킬링을 발동할 정도니, 천사들이 신화경에 이른 무인들을 습격하고 신성을 갈취하려 했다는 말을 믿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됩니다! 그건 불가능한…….”

“가능하다니까?! 네 눈으로 보면서도 자꾸 부인할 거야?”

우우우웅.

다시금 시작된 기세의 압박에 크롬벨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 것인지 눈을 크게 뜨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 파편! 운명의 파편을 받아들인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께름칙한 걸 내가 왜!?”

우우웅.

높아진 크롬벨의 목소리를 타이니의 고함이 깔아뭉갰다.

그에 자연스레 방 안이 진동하는데.

쿵. 쿵. 쿵.

- 은인들 방이다!

- 위!

그 엄청난 흔들림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순간.

[괜찮습니다. 잠깐 대화 중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타이니의 영파가 그런 움직임을 잦아들게 만들었다.

물론.

- 뭐, 뭐야?

- 머릿속에 목소리가…….

- 쉿, 조용히 하래.

그때부턴 다른 의미로 소란스러워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사이.

“당신…… 진심이군요.”

다시 차가워진 안색의 크롬벨이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하, 이 자식도 참 어지간하네.’

그 생각에 자연스레 불퉁한 심정이 말로 튀어나왔다.

“왜? 내가 여신의 권한이라도 침범한 것 같아?”

“그건…… 아니, 아니겠지요.”

아니긴, 정말 그런 게 아닌가 고민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보이는데.

자연스레 한숨이 나왔다.

경지가 오른 것을 자각한 이후 자신감이 넘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타이니는 지금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 힘을 그대로 가지고 여왕과 1대 1로 싸웠다면……. 아니, 그래도 못 이겼을 거야.’

자신은 반신의 경지에 막 발을 디딘 상황.

그에 비해 인어족 여왕은 반신을 넘어 진짜 온전한 신성에 도달했거나 그 근처에 이른 강자가 틀림없었다.

그 휴브리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막막한 느낌.

결국 여왕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운이었다. 아니, 상대방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덕에 얻은 행운이었다.

인어족 여왕이 뭔지 모를 주문을 외운답시고 빅뱅을 몸으로 때우지 않았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동료가 이 외딴 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솟구치던 자신감이 그 생각에 살짝 꺾이긴 했지만, 어차피 결국 이긴 건 자신이다.

그리고 헤쳐 나가야 할 재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런데,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고?”

“예. 휘하가 전멸했는데도 솜누스 그자는 나타나지 않았지요. 그 비겁자다운 반응입니다만, 너무 아쉽습니다.”

크롬벨의 냉소에 타이니는 얼굴을 굳혔다.

“전멸한 게 아니야. 한 놈은 살아서 마계로 돌아갔다.”

“예!?”

“아. 뭐, 그래도 남은 게 한 놈이라면 기껏해야 일주일이니, 강림해야 할 시간이 지난 것은 틀림없지만.”

“하……. 아무튼 저는 놈이 강림할 때까지는 이 섬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결착을 봐야 할 악연이니까요. 아, 물론 개인적인 원한과는 별개로 놈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하죠.”

옛 동료 솜누스를 떠올리는 듯한 크롬벨의 표정에는 다시금 선명한 살기가 떠올랐다.

몇 번이고 들었던 이야기지만, 여전히 당시 그 마음은 온전히 짐작이 되지 않았다.

믿었던 동료가 수백만의 무고한 생명을 제물로 바치고 적진으로 돌아섰을 때, 그가 느낀 배신감은 어느 정도일까.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겠지.’

섣불리 그 감정을 단정하거나 복수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태가 서열 1위라고 했다. 그 휴브리스보다 높다고…….’

만약 나태의 무력이 휴브리스 이상이라고 가정한다면…… 아니 틀림없이 그럴 테지만, 그 경우에 크롬벨이 홀로 나태에게 맞선다면.

‘너, 죽는다.’

그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이곳에서 혼자 나태의 강림을 기다렸다간, 크롬벨은 맥없이 목숨을 잃을 터였다.

솜누스는 용사 파티의 일원이던 때와는 다르게 최강의 칠죄종이 되어 있을 테고.

여신의 사도로서 카르마를 임의로 끌어다 쓸 수 있던 용사 크롬벨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다.

‘절대 안 돼.’

아무리 상상해도 나태에게 크롬벨이 당하는 광경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자신을 제외하면 인류의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용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게 둘 수는 없었다.

“……네가 상대해야 할 것은 2천 년 전 용사 파티의 솜누스가 아니라, 최강의 칠죄종인 나태야. 알고는 있는 거지?”

“최강이라니, 흥.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겁자답게 또 무슨 꼼수를 썼겠지요. 그리고 그자의 기술이나 습관이라면 질리도록 봐 온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이 얼만데 그걸 가지고…….”

“2천 년 전에도 마왕을 방패 삼아 도망친 비겁자입니다. 그런 성정이라면, 발전해 봤자죠.”

……역시 이쪽으로도 꽉 막혔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설득해 봤자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세상에 남긴 업적과 추앙 혹은 공포. 그것이 극에 달한 인간의 영혼을 신성에 닿게 만든다.”

“……예?”

“우리 대륙에서는 여신께 추앙이 거의 돌아가기 때문에 인간이 신성에 닿기 힘든 거야.”

“그게 무슨!!”

“그게 진실이야, 크롬. 아니, 여신의 사도. 너도 느낀 적 있지 않아? 여신의 힘을 빌려 카르마를 사용했었다며? 그럼 짐작할 수 있을 텐데?”

그 순간 크롬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혹시나 하고 찔러본 것이 맞아떨어진 것을 확인하며, 타이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세운 업적이라면 넌 이미 신성을 얻고도 남았어야 해. 만약 그 모든 추앙을 여신께 돌리지 않고 네가 가져갔다면, 너 역시 신성을 얻었을 거야. 곰곰이 되새겨 봐. 어쩌면 지금도 늦지 않지 않았을까?”

“아니, 그런…….”

“여신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야. 그분의 존재를, 세상을 감싼 그분의 빛을 모르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다만 지금은 현실을 볼 때야. 아무리 기도를 올려도 반응 없는 천계 대신, 조금이라도 강한 동료가 필요해. 크롬…… 아니, 크롬벨.”

“아……. 흐…….”

무언가 반발하려던 크롬벨은 그제야 느끼는 것이 있는지 말끝을 흐리며 스스로의 생각 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크롬벨을 보며, 타이니는 다시금 당장 해야 할 일을 고민해야 했다.

‘인어족을 때려잡으러 나도 가야 할까? 아니, 아니야. 나태가 강림한다면, 그리고 놈이 정말 최강의 칠죄종이라면 난 여기 있는 게 나아.’

그 생각은 자연스레 의문으로 이어졌다.

나태는 지금 왜 강림하지 않았을까?

혹시 살아남은 그놈이 전한 말 때문에?

‘나한테 쫄아서?’

정말로 그것이 이유의 전부라면, 크롬벨의 호언장담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닐 터였다.

아니,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놈만 극복하면.

“……끝이 다가온다.”

강림하지 않은 칠죄종 나태와 질투, 그리고 동대륙의 잔당.

놈들을 모두 처리하고 나면, 그 후에 남는 것은 마왕뿐이라.

‘돌아 돌아 여기까지 왔다. 멀지 않았어.’

사실 이제는 너무 지쳤다.

그러자 문득, 창백하고 피곤한 기색을 숨기며 억지로 미소 짓던 에스티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 전쟁이 끝나고 나면, 엘븐하임에서 같이…….

아마 그녀뿐만 아니라, 동료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끝이 없게 느껴지는 싸움. 가중되는 부담. 무거워지는 어깨…….’

소왕국들은 연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왕실이 무너진다고 걱정을 했었다.

그만큼, 모든 것이 무사히 끝나더라도 그 후유증은 심대하리라.

‘여신이시여, 지켜보고 계십니까? 보고 계시다면, 도와주십시오. 이 모든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타이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운명을 결정지을 그때가 빨리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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