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살아남았다고?
‘생각보다 일이 꼬이는데…….’
마인 장군 그랜달은 다시금 주군의 뜻을 되새겼다.
- 인어족을 소모하게 내버려 둬라. 일단 여왕이 부활하고 나면, 더 이상 너희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주군의 뜻은 명확했다.
그래서 그와 동료들은 이번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균열만 확보하면 그 뒤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 인어족이 인류를 멸망시켜도 좋고, 생각보다 거센 저항에 인어족이 큰 피해를 봐도 상관없다. 그만큼 인류는 전력이 소모될 테니.
실제로 현생 인류의 저항은 생각보다 상당히 거셌지만, 인어족이 다 처리하지 못할 것 같지도 않았다.
신경 쓰이는 것은 인어족 여왕을 몰아치기 시작한 초인들과 자신들에게 거슬릴 정도로 신성력을 집중시키는 성기사 하나 정도.
나머지는 눈에 차지도 않았다.
[너희 마족, 나를 도와라!]
수세에 몰리던 여왕이 다시금 대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방어를 맡는 것 정도야, 뭐 어려울 것도 없었다.
심지어 여왕은 3백에 이르는 오러유저 인어족들을 불러내기도 했으니, 실제로 방패의 역할은 그 인어족들이 하게 될 터.
자신들의 역할은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그랜달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여왕이 만들어 낸 회오리 밖에서,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변한 덩치 큰 기사가 섬찟한 기운을 풍기며 다가오는 게 느껴지기 전까지는.
‘저건 뭐…….’
허공에 뜬 채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다가오는 적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불길한데…….’
그런 생각이 들 만도 했다.
놈은 좀 전까지 여왕을 몰아붙이던 주역이자, 여왕이 일주일 동안 준비했던 신화급 마법 ‘천지 역전’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무효화시킨 장본인이었으니까.
그 광경은 정말로 충격적이었다.
신화를 잃어버린, 나약해야 할 현생 인류 사이에 저런 강적이 존재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거기다 놈에게선 묘하게 주군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건 착각이겠지.’
감히 어떻게 인간을 그분과 비교할까.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잠시라도 들었다는 것 자체가 저놈이 강적이라는 증거였다.
방어선을 구축한 자신들에게 그런 놈이 홀로 다가오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도 당연하다.
[방어막을 굳히고, 섣불리 나서지 마. 우리는 몸을 사린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저 당연한 지시를 내리는데.
[그랜달, 좀 이상한데? 저거, 그냥 두면 안 될 거 같아…….]
유난히 감이 날카로운 에보니가 불길한 메시지를 전해 왔다.
사실 그랜달도 그녀와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우우우우웅.
자신의 등 뒤에는 회오리로 주변 공간 전체를 휘감으며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여왕이 있으니, 저놈이 무슨 수를 쓰든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았고.
무엇보다 한낱 인간을 그분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불길한 예감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들춘 에보니의 메시지에, 그랜달의 안색이 굳어졌다.
[일차적으로 방어를 굳히되, 무언가 틀어졌다는 판단이 서면 균열로 후퇴한다.]
그는 동료들에게 그렇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천천히 다가오는 하늘 위의 ‘괴물’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문득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보였다.
좀 전에 여왕과 치고받을 때만 해도 다 같이 달려들던 놈의 동료들이, 이번엔 홀로 다가오는 놈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자세히 보니 아예 전장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거기다.
“[email protected]#!$! 후퇴!”
“@[email protected]@# 후퇴!”
균열과는 제법 먼 곳에 있는 결계 안의 인간 병력들마저 거기서 거리를 더 벌리려는 낌새를 보였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도 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점차 강해지는 순간, 그랜달은 느긋하게 대처하려던 마음을 버렸다.
[모두 전력을 끌어 올려라! 죽을 수 있는 위기라고 생각해!]
[뭘 그렇게까지…….]
[우리 임무 끝났잖아. 꼭 해야 해?]
[귀찮게…….]
빌어먹을 나태의 권능.
[닥치고 지시에 따라!!]
그랜달은 동료들의 안일한 반응을 무시하며 강압적으로 지시했다.
그에 따라 모두가 석연찮게나마 마기를 끌어 올리던 그때.
뒤쪽에서 뭔지 모를 마법에 집중하던 여왕이, 번뜩 고개를 들어 놈을 바라보았다.
[미친……!]
무언가 위험한 것을 보기라도 한 걸까.
그랜달의 감각으로도 간신히 윤곽만 잡혀 가던 여왕의 거대한 마법이, 그 순간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급작스럽게 마무리되었다.
[모두 놈을 막아라!!!]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여왕의 다급한 지시에 따라 허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인어족의 최정예들.
여왕이 모든 인어족을 동원하면서도 아껴 두었던 3백의 오러유저가, 회오리 안쪽에서 솟구쳐 올라 새하얀 머리의 덩치 큰 기사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번쩍.
여왕을 향해 다가오던 적의 워해머에서 번뜩인 노을빛이 회오리에 부딪치더니, 한순간에 윤곽을 짐작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빛에 휩쓸린 모든 것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제일 먼저, 여왕이 신화급 마법을 준비하면서 주변에 둘러쳤던 회오리 보호막이 허무하게 흩어지고.
그다음으로는 놈을 막기 위해 뛰어오른 인어족의 정예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그 순간 위기감을 느낀 그랜달은 특성 ‘가속’을 발현했는데.
온 세상이 느려진 듯한 감각 속에서 눈앞의 광경이 자세히 보이는데도, 그것이 도무지 현실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스치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빛이라니!? 이런 게 가능할 리가?’
그런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동맹을 맺은 인어 여왕이었다.
그녀가 급히 마무리한 신화급 마법이 불완전하게 발현되며 다가오는 노을빛 파멸의 빛에 맞서는데.
그녀의 권능인 벼락과 바다에 균열에서 새어 나온 어둠이 뒤섞인 듯한 그 거대한 힘은, 잠시나마 그 노을빛 파멸을 약화시키는 듯했다.
그러나.
쿵.
잠시간 주춤하는 듯했던 노을빛 파멸은 이내 불완전하게나마 발현된 신화급 마법을 붕괴시키며 그들을 덮쳐 오고 있었다.
피해야 한다.
당장 저 파멸의 빛이 덮치는 범위를 벗어나야 한다.
‘할 수 있어!’
마침 그랜달의 속성은 바람이었고, 영역은 속도를 증폭시키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피할 수 있어.’
그렇게 그랜달이 몸을 움직이려 할 때.
[막……아……!]
가속된 의식 속에서도 다급하게 느껴지는 여왕의 영파가 들려온 순간.
우드득.
자신의 몸이 그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랜달이 이를 악물었다.
‘감히 수작을……?’
여왕이 자신의 몸에 무언가를 몰래 심어 놨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이런 X 같은 년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도 여왕에게 수작을 부려 놨는데, 여왕이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니.
‘내 실수다.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했어. 젠장.’
한탄하는 짧은 순간, 다른 동료들도 여왕의 앞에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에보니는 정신을 차리고 마력을 조작하고 있었다.
‘역시 에보니.’
가속된 시간 속에서도 빠르게 구현되는 마법.
그런데.
동료들을 움직이는 여왕의 수작을 떨쳐 낼 줄 알았던 그 마법은, 어째서인지 오직 자신을 향해 쏘아져 왔다.
우웅.
여왕의 간섭을 떨쳐 내고 그의 특성과 영역의 힘을 증폭시키는 그녀의 마력.
그 힘을 받은 그랜달은, 그대로 크룩스의 소멸을 감수하면서 공간의 권능으로 동료들 앞에 방어막을 펼치려 했다.
그런데.
[못 막……. 그랜……. 균……열……!]
에보니의 새하얀 눈동자가 그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분에게…… 저 빛…… 알려야……]
새하얀 머리 새하얀 눈동자의 다크 엘프, 자신의 연인의 표정에서 다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리고.
뿌드드득.
한계까지 가속된 시간 속에서 억지로 권능을 발현한 크룩스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 그랜…….]
간절한 영파를 보내온 연인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며, 그랜달은 이를 악물고 균열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드드득.
온몸의 근육과 뼈가 무리한 속도로 인한 압력에 파열음을 내는데, 그 대가만큼 그의 몸은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가속하여 그대로 균열 안으로 사라졌다.
스팟.
직후, 노을빛 파멸이 그가 있던 자리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 * *
번쩍.
‘또 이건가.’
타이니는 시야가 유리창처럼 깨어지면서 나타난 회색 공간 속에서 한숨을 쉬었다.
편법으로 오러마스터에 올랐던 때 이후 가장 강력한 힘으로 폭발시킨 빅뱅.
그 힘은 실로 강력하여 인어족의 정예들을 가볍게 쓸어버렸고, 여왕이 쏟아 낸 미증유의 마법조차 그대로 녹여 버렸다.
그 빛이 나태의 장군들까지 쓸어버리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펼쳐진 회색의 공간.
하지만 그는 이곳이 이전의 경험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균열……?’
공간 안에서 위쪽을 올려다봤을 때, 인술라의 바닷가에 열린 균열과 비슷한 타원형의 검은 구멍이 보인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회색빛만이 가득하던 공간 내부에 옅은 마기가 흐르는 것도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녀석…….’
아득히 넓게 느껴지는 이 공간의 저편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가고 있는 누군가가 너무 신경 쓰였다.
검은 피부에 금발. 나태의 장군들 중 수장으로 보이던 놈이었다.
‘빅뱅의 충격에도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그놈이 향하는 곳에도, 균열처럼 보이는 또 하나의 타원형 구멍이 보였다.
그렇다면 여기는…….
‘……설마 균열 안?’
차원의 이면이 아니라고?
점점 멀어져 가는 나태의 장군을 보면서 움찔하는 순간.
여태까지의 경험과는 다르게, 이 회색 공간 안에서도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
이곳은 정말 차원의 이면이 아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그럼 저 구멍이 정말 마계로 통하는 건가?’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균열이 있는 위치에 빅뱅을 때린 결과가 이런 상황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럼 지금 해야 할 일은…….’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또 하나의 검은 구멍을 향해 멀어져 가고 있는 나태의 장군이었다.
‘저놈…….’
자신이 균열 안으로 뛰어들어 마계로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지만, 정말로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아닌 듯했다.
마계로 통하는 듯한 검은 구멍을 향해 멀어지는 놈을 따라잡긴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빅뱅을 쓴 직후의 탈력감이 예전만큼 심각하진 않았지만, 마족 장군을 잡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설령 자신이 마계까지 쫓아가서 어떻게든 놈을 잡는다 하더라도.
‘그랬다가는 내가 돌아올 수 있다는 장담이 없어.’
최악의 경우, 자신이 마계에서 애꿎은 마물만 때려잡는 동안에 중간계에 나태나 마왕이 강림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잡아야 할 것 같긴 한데.’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
저놈을 이대로 뒀다간, 어쩌면 빅뱅에 대한 정보가 마계에 전해질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쯧.
‘뭐 언제는 쉽게 왔나.’
달라질 건 없다. 조금 더 힘들어질 뿐.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선을 옮겨 위쪽의 구멍을 올려다보는데.
의식을 집중하고 보니, 그 너머에서 흐릿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동료들의 믿음직한 기세와, 그리고 더 살벌한…….
‘……여왕!?’
살아남았다고?
깜짝 놀란 순간, 의지가 그의 몸을 떠오르게 만들었고.
금세 화살처럼 쏘아진 그의 몸이, 중간계를 향하는 통로를 그대로 통과했다.
쩌어어어어엉!
‘큭!’
한순간 공간이 유리되고 사방이 비틀리는 듯한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금 시야가 열리는 순간.
“타이니!?”
여왕을 상대로 미친 듯이 싸우고 있는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 쏟아져 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이놈!!!!]
상반신의 오른쪽 절반이 뭉텅 뜯겨 나간 여왕이, 상처 가득한 흉한 몰골로 칼날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