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인어 전쟁 (2)
웨폰 마스터와 기갑왕, 워로드와 문나이트의 합동 기술은 마계 대전 초기부터 후방에서 지원만 해 오던 마도사들의 전의에도 불을 붙였다.
“원래 합동 기술은 마법이 시초 아니오?”
“물론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성물 결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으니…….”
“마도사가 왜 전쟁에서 재앙이 될 수 있는지, 저것들에게 보여 줍시다.”
빙염의 마도사 티네스, 혹한의 마도사 아프만, 지진의 마도사 록펠러가 저마다 발밑에 그려 놓았던 마법진 위에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중심축은 내가 맡지!”
“부탁드립니다!”
티네스와 록펠러의 마력이 각자의 마법진에서 변환되어 그대로 아프만의 마법진으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힘은 아프만의 마력을 증폭시켜, 그가 원래대로라면 닿지 못했을 대마법의 위계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기사들처럼 단순히 협력해서 시너지를 내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위력을 만들어 내지.’
아프만의 미소 속에서 거대한 마력이 꿈틀거리는 순간.
번쩍.
8서클 광범위 마법, 혹한의 대지.
쩌저저저적.
새하얀 빛이 바다 위에 작열하며, 해수면에 얼음의 대지를 만들어 냈다.
바다 위에 갑자기 반경 1km가 넘는 얼음의 섬 하나가 생겨난 것인데.
수면 위로 고개만 내민 채 얼어붙은 인어들이 모습은, 퍼져 나가는 차가운 공기가 무색할 만큼 전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우와아아아아!”
“할 수 있다!”
“쏴!!!”
파바바바바박.
뒤이어 쏟아져 나간 수많은 화살이, 대폭발과 빙하의 대지를 뚫고 벼락의 세례를 거쳐 와 인술라에 발을 디디는 인어들을 요격했다.
“크륵!?”
“크아아아!”
“캬아아악!”
크롬벨의 말대로, 인어는 대지에 발을 디디는 즉시 턱 밑에 난 아가미가 사라지고 물고기의 꼬리가 사람의 발로 변했다.
하지만 그 짧은 변신의 시간마저도 지금은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했으니.
쏟아지는 장거리 공격의 홍수 속에서, 인어들은 인술라에 발을 디디지도 못하거나 딛자마자 허무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검제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흘깃 뒤를 돌아보니, 허공에 동대륙의 문자를 띄워 놓고 5만에 이르는 인술라의 전투원들을 아우르는 단체 스킬을 유지 중인 아르곤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히 이 기술은 대단해. 하지만…….’
남해 어부 연합의 단체 스킬, ‘파도의 힘’은 솔레인이 남긴 군단 스킬의 일부를 받아들여 ‘파도의 세례’라는 이름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것은 구성원 전체의 능력치를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물 속성력까지 더해 주는 사기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솔레인이 구상했던 군단 스킬이 일발 역전의 수였던 것에 비하면 순간의 파괴력은 훨씬 약하지만, 전투 지속력 측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화살의 수가 무한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마저도 한계는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껏 초인 동료들이 분전해서 인어들을 순식간에 만 마리 이상 때려잡았음에도, 놈들은 여전히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거기다 더 불안한 것은.
“이거, 아무래도 지금 밀려오는 것들은 다 버리는 패 같습니다.”
전방을 향해 한바탕 마법을 쏟아 내고 다가온 크롬벨의 말대로, 진군해 오는 인어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전설로 전해지는 무력은 원래 어느 정도였습니까?”
“경지에 따른 전투력은 인간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기사급은 딱 인간 기사 수준이었다는군요.”
“어? 그럼……!?”
그의 설명에 검제는 잠시나마 낙관적인 생각을 떠올렸지만.
“다만 그 수가 바다 전체를 아우를 정도로 많았다는 게 문제죠.”
그 기대는 이어진 크롬벨의 말에 한순간에 무너졌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알에서 태어나 번식하는 인어들의 개체수가 너무 빨리 증가해서, 바닷속 생태계를 장악하고 세상의 균형을 어그러트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신께서 그들의 번식력을 제한하려 하셨고, 그에 반발한 인어족이 그들의 여왕을 신으로 만들어 반역을 저질렀다……. 제가 아는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었지만요.”
이미 같은 얘기를 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군을 지휘하는 자신이 잠시나마 그런 헛된 희망을 품었다는 것은, 지금 상황이 그렇게 현실 도피를 해야 할 정도로 막막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예. 서서히 전선을 후방으로 물리고 주거지 결계 안쪽에서 항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나 있네요.”
“음?”
“돌진해 오는 꼬락서니를 보니, 굶겨 죽일 생각은 없나 봅니다. 죽일 놈들이 끝없이 쏟아지기는 해도. 아니, 이건 지쳐서 말려 죽이려는 건가? 하하.”
……이건 고대식 농담일까.
아무튼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정말 하나도.
그리고 그 순간.
“섬의 후면에도 인어들이 상륙했다고 합니다!!”
들려오지 않았으면 했던 소식이 기어코 귀에 들어왔다.
검제는 이를 갈며 테헤논이 있는 곳을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계획대로 하자는 신호였다.
“일단 후퇴합시다. 그리고 전선이 축소되는 만큼 모든 병력을 교대로 돌려야 합니다. 특히 초인들은 최소한의 휴식은 취해야 합니다.”
“전 일주일 정도는 안 자도 상관없습니다만.”
“적들의 정예가 나타날 때를 대비해서, 우리는 전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크롬벨 경은요. 그……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크롬벨은 섬의 앞바다에 뚫린 균열에 한차례 눈길을 주고는 서서히 후퇴를 준비했다.
검제와 그의 신호를 받은 나머지 8대 기사들은 그때부터 전방으로 나서서 어부 연합 전투원들이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축축하니 좋구나!”
번쩍.
우르르르릉.
“캬아아악!”
실버 팽의 벼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인어들을 감전시키고.
“뒈져라!!”
하이넨의 초월무구 불벼락이 일주일에 딱 한 번 쓸 수 있는 대마법 파이어 스톰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콰콰콰콰콰콰.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끼에엑!”
“하나, 둘, 셋, 넷……. 몰라, 쌍!!”
파바박.
저릭은 약자 멸시 특성을 고스란히 살려, 상처 하나 입지 않고도 최전방에서 인어들을 쳐 죽이며 발걸음을 뒤로 서서히 물렸고.
“신이시여!”
갓 핸드는 그런 저릭의 바로 뒤에서 그를 보조하며 다친 연합원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했다.
또 그 뒤쪽에서는 웨폰 마스터가 5개의 초월무구 중 유일한 원거리 무기인 라이프 이즈 원샷으로 끊임없이 얼음 화살을 날려 대며 동료들을 도우니.
당장 그 전장에서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는 일행이었다.
물론 그렇게 기세를 올리는 와중에도, 모두의 가슴 한편에는 한 가지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뭐가 이렇게 많아?
이미 짐작하고 있긴 했었지만, 직접 느껴 보니 새삼스레 위기감이 든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검제가 이를 악물 때.
옆에서 연신 마법을 쏟아 내던 크롬벨의 영파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알고 계시죠, 공작? 만약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라도…….]
그 말에 검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인어족이 아무리 많다 해도, 대륙에 있는 인류 연합군의 힘을 모두 합치면 이길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녀석이라면 어땠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 그딴 거 난 몰라! 앞에 있는 놈이 적이면 다 패 죽이면 되잖아! 뒷일 같은 거 생각 안 해!
‘아마 그러겠지.’
하지만 모두가 그 녀석처럼 무모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신은 지휘관의 입장이니 더욱 그렇고.
다만 그럼에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고, 왠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크롬벨 경. 잠시 지휘를 맡기겠습니다.”
“음!? 공작!?”
그는 크롬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전면을 향해 튀어 나갔다.
그리고 몰려드는 인어족들을 향해 애검, 붉은 날개를 뽑아 들었다.
‘항상 타이니처럼 행동할 수는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적어도 그게 허용된 순간만큼은, 조금의 비겁한 생각도 들지 않게 날뛰고 싶었다.
“자, 싹 다 회 쳐 주마!!! 물고기 새끼들!!”
제국의 공작답지 않은 말들을 뱉어 낸 그의 검이 붉은 오러를 뿌렸다.
* * *
인술라의 전투는 사흘 밤낮 동안 이어졌다.
고지대까지 들이쳐 오는 해일을 막던 야트막한 둔덕이 인어의 침입을 막는 성벽이 되었고, 마도사들이 일찌감치 설치해 놓은 대결계가 그 성벽을 넘어오는 적을 약화시켰다.
흐트러지지 않는 결계는 인술라를 철벽의 요새로 만들었지만.
그곳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생겼다.
“조, 졸려.”
“정신 차려! 곧 교대, 커억!”
“롬!!!”
전선을 물린 지 고작 사흘.
전투원들은 2교대로 수면을 취하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굉음과 비명이 끊이지 않는 탓에 실제로는 제대로 잠을 자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전투 속에서 잠을 자는 유일한 방법은 그저 완전히 탈진하여 곯아떨어지는 것뿐.
그리고 그렇게 다시 억지로 깨어난 후 치러야 하는 전투는 고작 두세 번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진을 다 빼 버렸다.
파도의 세례가 아무리 회복력을 높여 준다 한들, 정신적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직 인어족의 정예라 할 만한 적들도, 나태의 장군들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여왕의 존재감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공작. 초인들끼리라도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크롬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심지어 그에겐 이런 냉정한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검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쉬지 않고 싸워 왔으며, 조금 전에도 인어족의 일각을 무너트리는 대마법을 쏟아 내고 온 참이었다.
최전선에서 한 번도 후퇴하지 않는 갓 핸드, 결계를 유지 중인 세 명의 마도사, 파도의 세례를 유지 중인 아르곤. 그리고 그다음으로 가장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용사 크롬벨이었다.
게다가.
“괜찮겠습니까? 저 균열……. 그자가 있을 텐데.”
“솜누스……. 흐, 그놈은 제가 반드시 처리할 겁니다.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저 균열에서 튀어나올 한 사람, 아니 한 마족을 기다리는 그의 원한을 검제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타이니……. 역시 랑켄 평야로 돌아간 거냐?’
이곳의 정보를 전달받지 못했을 테니, 그랬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 상황에 타이니 한 명 더해진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는데…….”
사흘간 쳐 죽인 인어족의 수가 어림잡아 10만.
그런데 어제부터는 기사급 정도나 드문드문 보일 뿐 진짜 강한 개체는 보이지도 않았고, 이미 이쪽의 정예들은 거의 탈진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합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인어의 수는 내륙에 상륙한 것들을 빼더라도 바닷가를 빼곡히 채울 정도였다.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진작에 여길 버리자고 했겠죠. 어부 연합의 인원들도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리고 갔을 겁니다.”
차라리 인어족의 여왕이나 마족 장군들에게 밀렸다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들이 후퇴를 결정한 것은 고작 숫자의 차이 때문이었으니.
“어쩔 수가 없어, 에스가르드. 이 정도 숫자를 어떻게 하려면 정말로 지치지 않고 끝없이 싸울 수 있는 초인이라도 있어야 해.”
휴식을 마치고 다시 튀어 나가려던 웨폰 마스터 그리드도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덧붙여 가며 답답한 마음을 토해 냈다.
“대륙으로 돌아가서 대책을 세우자고.”
“대책이라…….”
“여왕과 그 친위대를 요격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
저 엄청나게 불어난 인어족의 중심, 여왕을 처리해야 한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체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계수의 수호자가 부리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서 대륙으로 빠져야죠.”
크롬벨의 말대로, 당장은 그 길밖에 없을 듯했다.
‘테헤논을 설득해야 해. 아까운 사람들. 이곳의 정예들이라도 조금씩 빼내야 하는데…….’
검제의 머리가 냉정한 결단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번쩍.
꽈아아아아아아앙!
인어족이 몰려오고 있는 먼바다에서 노을빛 폭발과 함께 거대한 물보라가 솟구치는 광경이, 모두의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