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새끼 크라켄의 운명
‘젠장, 늦었나……!?’
타이니는 폐허가 된 해저의 광경을 멀리서부터 내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거대한 문어 다리를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은 지금 상황을 그 무엇보다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크라켄의 상태가 정상이라면, 미물들이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까.
난데없이 들려온 영파가 크라켄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달려온 참이었다.
크라켄이 후손을 부탁할 정도라면 분명 다급한 상황인 것 같았으니까.
‘티나가 있었으면 더 빨리……. 아니, 아니야. 그런 생각 말자.’
자신이 자리를 비웠으니, 랑켄 평야에는 적어도 에스티나와 루나, 제나스와 블루윙까지는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
애초에 에스티나가 자신을 해역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잠깐의 전력 공백을 감수한 도박이었기에, 더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불굴의 권능으로 지구력을 강화하고 허공을 질주해 온 월랑의 속도는, 카일룸과 비교해도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터였다.
물론 그럼에도 이 상황이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꼬르르륵.
[짜증 나는군.]
움찔.
타이니에게서 월랑이 놀랄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가자, 그들을 향해 접근하던 상어나 작은 해양 마물들이 다급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에서도 커다랗게만 보이는 압도적인 촉수가 왜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질까.
타이니는 그 거대한 다리를 향해 잠수해 가면서, 이번에 얻은 권능의 조각인 바다의 왕의 힘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본래대로라면 닿지 않을 범위까지 살기를 흩뿌려 크라켄의 사체 주변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옛 전우라고도 볼 수 있는 신화시대 마수의 몸이 잡어들에게 뜯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파바바바바박.
흩어지는 물고기 떼들을 보며, 타이니는 물속인 것도 잊고 한숨을 내쉬었다.
뽀그르르르.
‘젠장, 한숨도 마음대로 못 쉬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월랑에게 의지를 전했다.
‘저기 저 사이, 더 북쪽으로. 그래.’
- 컹!
물속에서는 부자연스러웠던 월랑의 움직임도 이젠 자연스러워졌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평지의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전에 비하면 몇 배는 더 빨라진 수준이었으니.
해저의 포식자들도 낯선 포식자의 등장을 경계하며 조금씩 멀어져 갔다.
다만 그럼에도 크라켄이 남겨 놓은 좌표를 찾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하…….’
크라켄의 뜻은 영파를 통해 직관적으로 전달되긴 했지만, 인간의 개념에 비해 거대 해양 생물이 인식하는 거리의 단위는 너무나도 컸으니.
크라켄의 사체가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 그 반경을 몇 시간 동안 헤맸는데도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가.
‘바위 사이가 아닌 건가?’
생각을 바꾼 어느 순간, 모래로 뒤덮인 듯한 해저의 어느 바닥에서 미약한 에너지의 파동을 느꼈다.
‘마기?’
그 기운의 정체를 깨닫고 안색이 살짝 굳어졌지만.
뒤이어 마치 그 너머의 무언가가 자꾸 잠긴 문을 두드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아!’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동시에 꺼내진 녹턴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휘둘러졌다.
쾅!
그러자 모래로만 덮인 줄 알았던 공간의 일부가 깨어져 나가며, 그 안에 사람 몸통만 한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 적……!!
그 구멍에서 튀어나온 기다란 촉수가 타이니의 전신을 휘감으려 했다.
크라켄의 그것과 닮은, 하지만 한없이 작은 촉수.
[정신 차려!! 난 적이 아니다!!]
길이만 5, 6m는 될 듯한 문어 다리를 가볍게 튕겨 내자.
사람 몸통만 한 구멍에서 회색의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는 듯하더니, 갑자기 10여 미터 길이의 거대한 문어가 튀어나왔다.
- 적이, 아니……?
머리가 갑옷 같은 왕관 모양의 각질에 덮여 있다는 것이 특이하기는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저 거대한 문어 같은 괴물.
[그래. 적이 아니다. 설명을 하자면…….]
크라켄의 새끼에게 영파를 보내 상황을 전하려는데,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괜찮다, 계약자. 적, 아니다. 어미가 가르쳐, 줬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은 좋은데.
‘이거 해양 생물 버전 루나인가.’
대화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러다 이내.
- 적이 왔다고, 했었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듯 살피던 크라켄의 새끼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촉수, 바닥에 늘어져 있는 어미의 촉수를 눈에 담았다.
그리고 냅다 괴성을 질렀다.
- 꾸어어어어어어엉!!
해저를 진동시키는 강렬한 울음소리.
타이니마저 안색이 잠깐 굳을 정도의 강렬한 음파가 사방을 휩쓸더니.
- 안 돼, 안 된다! 어미……!!
파아아아앙.
거대한 새끼 크라켄이 쓰러진 어미를 향해 쏘아지듯 헤엄치기 시작했다.
낯선 생물이 움직이는 열 개의 촉수에서 다급한 감정이 느껴질 정도.
[네 어미는 이미…….]
타이니는 굳은 표정으로 녀석을 따라가면서 사실을 전해 주려다가, 괜한 말을 더하는 것 같아서 영파를 끊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 꾸어어어어어어어엉!
크라켄의 사체 중 일부, 머리가 사라지고 남은 열 개의 촉수들을 확인한 새끼의 입에서 비통한 울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단순히 놀란 듯했던 처음의 울음소리와는 다르게, 그 안에는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아직 계승의 때…… 멀었다…….
- 함께할 시간…… 많았다…….
- 억울하다……. 슬프다…….
10m가 넘는 듯한 괴물이 그와 닮은 거대한 촉수에 기대 비비적거리는 광경이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질까.
거대한 덩치의 저 크라켄도 아직 ‘어린아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나에게 부탁한다고 했던 것일까?’
부모를 잃은 아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실제로 그것은 살해당한 부모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는 아이였으니, 타이니로선 그냥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얘야, 너희 어미는…….]
- ……보고 싶다, 어미.
[…….]
- 보고 있는데, 보고 싶다…….
꾸우우우우웅.
처음과는 다르게 낮게 깔리는 울음소리에 타이니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전혀 다른 생물일진대, 엄밀히 말하면 마수일진대.
같이 심장이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 꾸우우우우웅.
문어, 아니 크라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그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리고 새끼 크라켄의 눈동자에서 빛이 점차 흐려지며 그 촉수의 움직임이 느려질 때쯤이 되어서야, 타이니는 그런 새끼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 큰 눈에서 빠져나온 눈물만큼 생명력까지 흐려지는 것 같았기에.
[……네 어미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마족들과 싸우다 죽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너를 부탁한다 했다.]
솔직히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당장은 사실을 전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 마족?
엉뚱한 단어에 새끼가 반응했다.
흐려져 가던 눈동자에 빛이 조금씩 돌아왔다.
- 마족이, 원수?
[그래. 마계에 대전이 벌어진 탓에, 마족들이 네 어미가 지키던 인어족의 여왕을 부활시키려 한 것이다.]
벌써 물결에 흩어지기 시작한, 이곳에서 일어난 파괴의 흔적.
그 안에는 여전히 진득한 마기가 일부 남아 있었다.
크라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 나쁜 마기가.
그리고 타이니의 그 말에 새끼 크라켄의 눈이 빛나는 듯하더니.
- 마족, 그럼 아직 남아 있어?
[……그래. 내가, 우리 인류가 그것들과 싸우고 있다.]
- 마족!! 복수!!
그 순간에는 새끼의 눈에 붉은빛이 확 들어왔다.
녀석은 복수를 원하는 듯했으나, 솔직히 말리고 싶었다.
새끼 크라켄은 성체와는 달리 거대 문어에 불과했으니, 마족에게 달려들다 허무하게 죽을지도 몰랐다.
[네 어미는 네가 크라켄의 의무를 명예를 지켜 주길 바랐다. 복수는 내게 맡겨라.]
- 꾸우우우웅.
그러나 새끼는 진득한 울음으로 거부의 뜻을 전했다.
[넌 약하다. 섣불리 나섰다간 어미와 똑같이 죽게 될 거다.]
눈동자에 분노를 담고 그를 노려보던 새끼는, 그 말에 움찔하더니 이내 서글픈 눈빛으로 어미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 봉인 깨어졌고, 가장 큰 의무 사라졌다. 하지만 복수 남아 있다. 나 약하다. 하지만 금세 강해질 수 있다. 계승의 의식, 있다.
[계승의 의식?]
- 어미……. 먹는다…….
뽀그르르.
‘뭐?’
새끼의 그 말에 타이니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쩍 벌어졌다.
서글픈 눈동자로 제 부모의 시체를 바라보며 뱉은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말.
그런데.
- 그것이 원래, 계승의 의식. 원래는 어미의 혼이 기쁜 마음으로 떠나야 한다. 지금은 그 대신, 복수 남아 있다. 원래보다, 324년 빠르게 치른다.
크라켄이 느끼는 슬픔을 인간의 심리에 그대로 대입해 보기에는 무리였을까.
타이니가 뭐라 하기도 전에, 새끼는 어미의 촉수를 다리로 감싸 입으로 가져갔다.
와작, 와작.
그러자 정말로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하는 어미 크라켄의 몸.
‘허…….’
그와 더불어, 그가 지켜보고 있는 순간에도 새끼 크라켄의 육체가 조금씩 자라나며 그 마기마저 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찌 보면 무섭고 혐오스러운 광경이지만,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안타깝게 느껴질까.
와그작. 와그작.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어미 크라켄의 유체.
그리고 더불어 성장하는 새끼를 바라보는 타이니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만, 이 속도면 정말로?’
크라켄 새끼의 성장 속도가 정말로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 후에야, 안타까운 감정에서 살짝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미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강력한 힘을 갖게 되겠는데?’
문제라면 자신에겐 그 성장을 고스란히 지켜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크라켄의 새끼는 약할 것이고, 저렇게 먹는 데 열중하고 있는 녀석이라면 누가 기습해도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녀석이 성장하는 동안 누군가가 곁에서 지켜 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럴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아, 혹시 월랑?’
- 컹!
바닷속에서 크라켄 새끼를 살피라는 말에 월랑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사실 아무리 타이니라고 해도, 어디에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해역에 월랑을 소환해 놓고 있는 것은 무리였다.
‘이 정도 마기면 웬만큼 강한 놈도 접근은 안 할 거 같긴 하지만, 두고 가기는 찜찜하고…….’
무엇보다 새끼 크라켄이 모조리 먹고 소화해야 할 크라켄의 사체를 잡어들이 조금이라도 뜯어먹게 두는 것은 아까웠다.
‘어쩐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던 그때.
멀리서 그런 그들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검은 점이 있었다.
뒤이어 급속히 가까워지며 확대되는 그 점의 정체는, 이 심해에 있을 리가 없는 범고래였다.
그를 쫓아온 후셀이 뒤늦게 나타난 것이었다.
‘오?’
타이니의 표정이 펴지는 순간.
어느새 곁에 다가온 녀석의 파닥거리는 지느러미가 불만을 표시했다.
대충 ‘두고 가면 어떡하냐’는 뜻 같았는데.
[잘됐다. 너, 여기서 얘 좀 돌봐라.]
그 영파에 범고래의 눈동자가 확 커지는 것이 보였다.
[크라켄의 새끼다. 이 애가 크라켄 촉수 다 먹을 때까지, 접근하는 다른 잡어나 마물들을 쫓거나 죽여 버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파다다닥.
후셀이 지느러미를 사방으로 움직이며 거절의 뜻을 전했지만.
타이니는 그 거절을 거절했다.
[마족과의 싸움에 큰 힘이 될 아이다. 그리고 혹시 알아? 네가 신화 속 마수 크라켄의 대부라도 될지?]
그 한마디가 파닥거리던 후셀의 지느러미를 서서히 멈추게 만들었다.
물론.
[아, 나중에는 잡아먹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뒤늦게 남긴 그 한마디에 다시 칠색 팔색을 하기 시작했지만.
타이니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커지고 있는 크라켄 새끼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힘내라, 아가.]
- 꾸웅.
한창 어미의 몸을 흡입하던 새끼 크라켄이 움찔하며 그를 바라볼 때.
[다시 보게 될 거야. 마족과 싸울 때.]
- 꾸웅!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 준 타이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해수면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