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또 하나의 권능
[자잘한 놈들 신경 쓰지 말고, 한 방향으로 뚫고 지나가!]
‘명령하지 마.’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후셀은 타이니의 지시대로 꼬리와 지느러미를 빠르게 움직였다.
파바바박.
노을빛 오러가 스며든 덕에 그 어느 때보다 큰 힘이 솟았으니,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사람을 등에 태운 것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헤엄칠 수 있었다.
거기다.
[전부 꺼져라!!]
콰콰콰콰콰콰.
“끄[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지친 기색이 역력한 타이니였지만, 그가 휘두르는 녹턴에서 노을빛 파동이 번져 나갈 때마다 주변의 물결을 진동시키며 주변의 인어들을 터트렸다.
마치 바닷물에 오러를 실어 무기로 활용하는 것 같은 모습.
그리고 그제야 생각해 보니, 타이니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웠지만 그를 태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오히려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이 물 속성 마나를 움직일 때에 비해, 주변의 바닷물이 더욱 힘차게 호응해 주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 물 속성도 쓸 수 있나?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보다, 이게 지친 거 맞아?’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후셀은 멈추지 않고 타이니가 열어 준 길을 따라 미친 듯이 내달렸다.
* * *
파아아아앙!
촤아아아아아.
일렁이는 격랑 속에서, 커다란 사람을 태운 범고래가 포물선을 그리며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범고래는 어느 섬의 해안가를 향해 그대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져 내리는가 싶더니.
착지 직전에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고, 등에 태우고 있던 사람과 함께 지면에 사뿐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그 두 사람 중 검은 머리의 사내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고함을 질렀다.
“변태냐!!? 옷은!?”
“범고래가 사람 옷 입겠습니까!?”
금발 머리 중년인, 후셀이 자신이 옷을 벗어 놓은 곳으로 후다닥 뛰어가는 순간.
타이니는 헛웃음을 지으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저의 봉인지를 찾아갈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바다의 풍경.
인어 여왕과 싸우면서 빅뱅을 쓰기는 했지만, 단순히 그 진동의 여파만으로 이런 사달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 오, 하나 더? 하하하하! 이제 다섯, 아니 넷이 남았다. 너도 짐의 부활을 어서 돕…….
- 내 백성들도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
뇌리를 스치는 여왕의 말.
그리고 심해를 벗어날 때 습격해 오던 인어들은 가끔 보았던 머맨이나 세이렌과는 확연히 다르게, 괴물이 아닌 인간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다른 봉인지도 동시에 풀린 건가.’
크롬벨을 비롯한 동료들은 진작 다른 포인트로 향했다고 들었다.
파도의 세례인지 뭔지 하는 단체 스킬도 쓴다 하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런다 해도.
“다섯이 더…….”
인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환경이었다고는 해도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던 적. 그런 분체가 다섯이 더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본래 하나의 존재라고 하니, 만약 남은 다섯까지 모두 모여 온전히 합쳐진다면…….
‘신화시대에 여신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인어족의 여왕……. 신화답게 과장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과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그의 안색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
“다섯이 더? 무슨 말입니까?”
대충이나마 겉옷을 챙겨 입고 온 후셀이 어느새 옆에서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마족도 골치 아픈데, 그만큼 골치 아픈 적들이 또 생겼다는 의미다. 어쨌든 간에, 난 일단 기력 회복부터 좀 해야겠지만.”
타이니는 그렇게 한탄하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셀이 할 말이 없어서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데.
“뭐 해? 먹을 것 좀 잡아 와. 한, 십…… 아니 백 인분 정도.”
그가 황당한 요구를 해 왔다.
“예?”
갑자기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싶은 표정으로 반사적으로 되묻는데.
통하질 않았다.
“여기 생선 많잖아.”
“그걸 왜 제가……?”
그것도 백 인분이나??
“내가 빨리 회복하는 게 너한테도 도움이 될 거야. 빨리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래야 나랑 떨어질 텐데.”
……지금 바로 떨어져서 갈 길 가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후셀은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구해 올 순 있는데……. 백 인분이나요?”
“내가 그만큼 먹어.”
“아! 아, 하하……. 하?”
농담하는 거라 생각해서 억지로 웃어 주려 했는데.
“뭐 해? 왜 웃어?”
자신을 싸늘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진짜?”
“진짜.”
하아.
절로 한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헛수작 부리면 뒈진다.”
덧붙여진 말에 자기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내가 미쳤냐!?’
해저에 지진을 일으키고 해일을 만들어 낸 괴물한테 수작을 부리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후셀은 다시 옷을 벗어 던진 뒤 그대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고.
‘백 인분 좋지. 그래, 참다랑어 같은 것도 백 마리 먹을 수 있나 보자!’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분풀이(?)를 생각하며 눈에 불을 켤 뿐이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후.
후셀은 타이니가 전혀 농담을 하지 않았음을, 아니 오히려 사실을 축소해서 말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꺼어억! 하. 이제야 좀 배가 차네.”
시원하게 트림하는 타이니의 옆에서, 후셀은 기가 찬다는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솔직히 오기로 잡아 온 참다랑어와 대왕오징어, 그리고 갖가지 물고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던 자리에는 이제 새하얀 뼈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도 자잘한 뼈는 남김없이 씹어 먹은 듯, 그 물고기의 뼈 무덤에는 삼키기 곤란한 큰 뼈들만 남아 있었다.
기력이 없는 것치곤 쉽게도 불길을 일으켜 참다랑어를 한 번에 구워 버리던 괴물은, 그 식성도 진짜 괴물 같았다.
“이게 말이 되……나?”
어떻게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큰 생명체들을 저렇게 먹, 아니 마실 수 있는가.
위에 구멍이 난 게 아니냐는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얼버무릴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자. 잠깐만 더 기다려라. 회복도 할 겸 실험해 볼 것도 있으니.”
“아. 뭐. 예. 허…….”
반쯤 넋이 나간 후셀을 뒤로한 채 정좌한 타이니는 단숨에 자신의 내면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후셀이 물고기를 사냥해 오는 동안 그는 스스로 내상을 다스리고 깨달음을 정리해 놓았었다.
다만 기력이 부족해서 섣불리 움직이진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배가 찰 만큼 찼으니 한 가지 실험을 해 볼 차례였다.
그것은 그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될까?’
그 해구에서 빠져나올 때의 경험을 생각해 보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니.
그는 작은 섬 주변 바다의 표면에 정신을 집중했다.
굳이 마나를 쓰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여왕의 권능인 바다의 지배력이 빅뱅에 의해 산산이 분해되던 광경을 돌이켜 보며 그 힘의 요점을 추려 내는 일.
즉, 남의 권능을 경험과 감각만으로 흉내 내 보려는 시도였다.
검선이 보았다면 말도 안 된다고 헛웃음을 지었겠지만, 타이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여왕의 힘은 권능이 전부가 아니었어. 분명히 물 속성과 그에 관련된 기술까지 포함되어 있던 거야.’
그 세부적인 기술은 후셀을 타고 오면서 이미 충분히 실험해 봤다.
그리고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다는 자신도 있었다.
영혼은 온전한 신성을 품을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카르마가 부족해서 완전히 채우지 못한 불굴의 권능.
채워졌어야 하지만 채워지지 못한 영혼의 격, 그 빈자리를 달리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바로.
‘하나의 권능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그 빈자리에 또 다른 권능의 조각을 만들어 보겠다.’
비록 카르마가 채워지고 진정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불굴의 권능을 완성하는 순간 다른 권능은 밀려 사라지겠지만.
‘또 바다에서 싸우게 된다면…… 아니, 그렇게 될 테니 충분히 써먹을 만해.’
물론 권능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결정체이기에, 그것을 분해해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조각이나마 만들어 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능해. 녹턴, 그렇지?’
우웅.
그 순간 놀랍게도, 여왕의 나눠진 신성을 잡아먹은 녹턴이 마치 정말 아깝다는 듯 울음을 토하며 그 신성의 일부를 툭 던져 주었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임시로 권능 조각을 만드는 데는 충분할 정도의 신성.
‘이거면 충분해. 고마워.’
타이니는 그 카르마를 컨트롤하는 것만으로도 경험치가 늘었다.
‘너도 당장 내가 필요한 걸 아는구나.’
바다의 지배력을 자신의 몸에 고스란히 새기는 듯한 이 묘한 경험이, 그 엿 같은 여왕의 완전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필수였으니.
그렇게 그가 의지를 다잡고 그 권능의 잔상을 빚어 보려는 순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울림이 일어났다.
- 우우우웅.
영혼의 저편에 묻혀 있던 운명의 파편이 존재감을 발휘한 것이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놈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뻔했다.
‘흥.’
이미 영혼의 격을 완성한 이상, 그가 신성을 얻는 데 저 운명의 파편은 필요 없다.
그것을 직감한 파편이 이제 와서 존재감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받아들이면 카르마가 모일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물론 가소로울 뿐이었다.
“어림없다. 닥쳐!”
“나, 난 아무 말도 안 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난히 크게 놀라는 후셀의 말은 그냥 무시한 채 의식에 집중했다.
운명의 파편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은, 결국 지금 자신이 매우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권능의 조각을 빚어냈다.
임시로 만들어 낸 권능의 조각, ‘바다의 왕.’
그 순간, 섬 주변의 파도가 그의 의지에 따라 다시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온 바다가 격랑에 휩싸여 있는데, 오직 그들이 있는 섬 주변의 100여 미터 정도만 고요해진 것이다.
“헙!?”
후셀의 놀란 목소리가 새로운 권능의 발현을 축하하는 듯했다.
‘쓸 만하군.’
그러면서 타이니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
이것은 어차피 잠시의 필요를 위해 채워 넣은 권능의 조각일 뿐. 불굴이 완성되면 사라질 힘이다.
인어 여왕을 상대할 무기로써 잘 써먹을 수 있으면 그만.
“됐다. 그리고 이제…….”
나태, 혹은 인어 여왕을 때려잡고 부족한 카르마를 채운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놈에게도 닿는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부족할 때는 섣불리 패 죽이겠다 장담했었지만, 격이 오르면서 솔직히 조금씩 더 막막하게 느껴지기만 하던 이 모든 재난의 원인.
여신과 비견되는 마계의 군주이자 신.
마왕.
그 적의 실체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이제야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러자면 일단.
‘랑켄 평야는 맡겨 둔다. 인어 여왕이 먼저야.’
타이니의 시선이 동서 방향의 바다를 향해 돌아갔다.
“저쪽이지?”
“예?”
“인술라 말이야.”
“아. 예…….”
나태의 균열이 열렸다는 남해 어부 연합의 중심지.
그곳에서부터 적들이 있을 위치를 역산해 보아야 했다.
‘지금쯤이면 다들 돌아왔겠지.’
아마도 또 하나의 분신을 처리했을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는데.
- 계…… 약……자. 여기…….
“음?”
낯선, 하지만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영파가 흐릿하게 그의 영혼을 자극했다.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처럼.
* * *
‘그’는 긴 세월을 청소부로 살았다.
바다에 생겨나는 마물들이 더 이상 군집하지 않도록 잡아먹으면서,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터’를 오랜 세월 동안 지켜 왔다.
그 안의 ‘포악한 것’이 다시금 바다의 균형을 깨지 않도록 스스로를 이 세상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으로 여겨 왔고.
수명이 다해 갈 때쯤에는 후손을 남겨, 그 의무를 이어 가기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
비록 얼마 전에 그 후손이 납치되어 험한 꼴을 당할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창조주의 파편을 안에 품은 ‘계약자’의 도움으로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후손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쿵. 쿵. 쿵.
‘터’ 안에 자리한 포악한 것의 진동이 점차 거세지고.
자신의 둥지 바깥에서 심상치 않은 마물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 제법…… 강……해.
마치 이 세상에서 발생한 것 같지 않은, 진득한 마기를 가진 것들.
아직은 후손의 교육이 다 끝나지 않았기에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서서히 강해지는 바깥의 기세를 보니 그저 스쳐 갈 바람은 아닌 듯했다.
이제 선택해야 할 때였다.
- 긴 기다림의…… 끝인가……. 아니면…….
심장들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흥분인지 불안인지, 스스로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사멸하는 것도 ‘그’에게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한 후손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이 신성한 의무가 자신의 대에서 끝나게 둘 수는 없으니.
‘그’는 이제는 제법 선명하게 느껴지는 ‘계약자’를 향해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 ……후손을 부탁……한다. 계약자.
그리고.
우르르르르릉.
신화시대부터 현세까지 이어진 유일한 신수. 아니, 마수를 잡아먹는 마수.
크라켄이,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