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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머-426화 (426/500)

426화. 인어족의 부활

녹턴의 끝에서 시작된 파멸의 노을빛은 가장 먼저 타이니 주변의 물결을 그대로 증발, 아니 소멸시켜 버렸다.

[아닛……!]

온몸을 압박하던 막대한 수압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그는 날아갈 것 같은 끝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 신체적 자유는 자연히 영혼의 고양감으로 이어졌다.

‘고유의 시간.’

그 고양감 속에서 의식을 가속시킨 타이니는 소멸되는 바닷물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바닷물이 아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권능의 흔적에.

[어떻……!?]

여왕이 놀란 듯 비명을 질러 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와그작.

7분의 1로 나뉜 여왕의 신성을 녹턴이 씹어먹는 느낌도 지금은 일단 무시했다.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고.

‘그래…….’

빅뱅의 힘은 분명 권능과는 상관없는데, 순수한 힘만으로도 권능을 파괴하고 있었다.

아마 고대에나 바다에 새겨 놓았을 여왕의 권능이, 파멸의 빛 앞에서 공평하게 스러지는 것이다.

‘신성을 가진 자의 권능도 결국은 강대한 물리력에 무너진다. 아니, 정확히는 더욱 큰 세상의 법칙이 그 권능을 짓누른 거야.’

권능이 자신만의 법칙을 세우는 힘이라면, 빅뱅은, 아니 물리력은 이 거대한 세상을 이루는 법칙의 한 갈래니까.

‘그래서 불굴도 무적처럼 보이지만, 무적은 아니다.’

여왕의 공격에 의식을 잃을 뻔했던 경험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땐 법칙과 법칙의 충돌 안에서, 물리력이라는 또 하나의 법칙이 그에게 피해를 강요한 것이었다.

그것을 겪어 보고 나니, 빅뱅 정도의 파괴력을 갖춘 공격이라면 어지간한 ‘작은 법칙’ 따위는 그냥 무시하고 짓이겨 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이미 그 결과는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파멸의 빛이 여왕의 세상을 부수고, 그 법칙을 짓이기는 것이.

그리고.

쩌저쩌저저저정.

[안 돼!!!!]

여왕의 분체가 소멸하면서, 또다시 공간이 깨어져 나가며 회색의 세상이 나타나는 것도 보였다.

휴브리스를 상대할 때 겪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차원 이면의 공간.’

이제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빅뱅이 발현되며 에너지를 흡수할 때, 거기에 여왕의 권능이 섞여 들어갔기 때문.

현세의 법칙인 물리력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빅뱅의 힘이 또 다른 법칙이나 권능, 혹은 카르마와의 전에 없던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고.

그 결과가, 세상의 일부를 아예 깨트려 버리는 파괴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위험해. 이건 너무 위험하다.’

검선이 말했던 공간참의 권능을 한 단계 넘어서는 힘이다.

공간 자체를 베는 것을 넘어, 아예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힘이랄까.

그리고 이것은 또한.

‘세상에 상처를 남기는 힘이다.’

고대 마계 대전 당시, 크롬벨이 카르마를 무분별하게 끌어다 쓰다가 다른 차원의 동대륙을 소환했다고 했던가.

설마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싶으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휴브리스와의 결전에서 편법으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때도, 자신은 이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지금은 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내 영혼은 온전히 오러마스터의 경지를 이해했다.’

지금 부족한 것은 오직 하나.

‘그에 걸맞은 카르마뿐.’

진정한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일이 이제는 정말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 시간이 있냐는 게 제일 문제인데.’

조금은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쩌저저저적.

깨어져 나간 공간의 균열이 마치 나아 가는 상처처럼 다시 아무는 것을 보며, 타이니는 그 불안한 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콰.

‘억!?’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해류와 바윗덩어리들을 피해 위로, 더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우르르르르릉.

* * *

끄르르륵.

콰직.

또 한 마리의 마물 해파리가 범고래의 이빨에 허무하게 뜯겨져 나갔다.

한 범고래가 해수면 근처에 머물면서 주변의 마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지도 어언 세 시간.

언뜻 무분별한 살상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는 범고래의 움직임은, 사실 극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겉은 범고래지만, 그 속은 엄연한 사람이었으니까.

‘어쩐다.’

콰드드득.

후셀은 겁 없이 덤벼드는 기다란 뿔이 달린 뱀장어를 워터 블레이드로 찢어발기면서도 고민을 이어 갔다.

‘한 손 보태려 내려가야 하나?’

일종의 양심의 가책이었다.

그 검은 구멍 안에 무시무시한 마족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애송…… 아니, 광휘의 기사를 혼자 보낸 일이 양심에 찔린 것이다.

하지만.

대장군의 부탁, 아니 명령을 받고 인술라 주변 일대의 해구를 뒤지던 며칠 전.

검은 해구 안에서 날아온 오러 블레이드에 그대로 황천길을 떠날 뻔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 범고래는 자신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난 가 봤자 허무하게 죽고 말 거야.’

아직도 자신이 그 공격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왔던 것 같았다.

자신이 있는 범위를 대충 짐작해서 근처를 쓸어 버리려고 날린 것처럼.

‘그것만으로도 황천에 반쯤 발을 담글 뻔했는데.’

어찌 그 안을 따라 들어갈까.

그건 만용이었다.

‘그래, 그런 거야. 당연한 거야.’

그렇게 자기 위안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깊은 해저에서부터 해류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르르르릉.

해저에서 들려오는 울림소리에 이어, 해저 지진 같은 굉음까지 들렸다.

‘……설마 이게 싸움의 여파는 아니겠지.’

그래, 그냥 흔한 해저 지진일 것이다.

생물들이 싸운다고 해서 일대를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날 리는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후셀은 한편으로는 왠지 그럴 수도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우르르르릉.

뒤이어 몇 번의 지진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해저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격랑이 바다의 표면까지 온통 뒤흔들기 시작했다.

- 찌르르르르!

당황하는 돌고래나 범고래들의 초음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그 와중에 동물들의 초음파가 아닌, 동료 어인족들의 신호도 감지되었다.

그런데 그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 인어들이 습격한다!! 다들 조심해!!

- 인어라니? 머맨이나 세이렌 말하는 거야?

- 아냐! 인어, 인어라고! 갑자기 어디서……!

- 여기도 인어다! 부딪치지 마! 이놈들 너무 많아!!

‘뭐야? 벌써?’

갑자기 인어라니!?

자신들이 동원된 일이 인어족 여왕의 봉인에 관한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뭐 얼마나 지났다고…….’

왜 벌써 인어족이 나타나는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번쩍.

해저의 깊은 곳에서 어울리지 않는 노을 같은 빛이 비쳐 보인다 싶더니.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격류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게 뭐……!?’

우르르르르르릉.

쾅.

“껭!”

마치 망치로 전신을 두드려 맞은 듯한 느낌과 함께 범고래의 몸이 수면 밖으로 튕겨 나가는데.

그는 격류에 튕겨 나오면서도, 자신보다 훨씬 높게 솟구치는 물보라와 파도를 보며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뭔 난리…….’

풍덩.

허공에서 한껏 공기를 호흡하고 다시 물속으로 잠수하는데.

꼬르르르르.

콰콰콰쾈콰콰콰콰.

바닷속에서 몰아치는 미칠 듯한 격랑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설마 진짜 이게 싸움의 여파라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후셀은 자신도 모르게 격랑을 해치고 더 깊은 곳으로 잠수하기 시작했다.

챌린저급에 도달한 그였으니, 물의 마나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밀어 내리면서 거침없이 하강할 수 있었다.

‘이건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어쩌면 그 녀석도 크게 다쳤을지 몰라.’

싸움에 뛰어들진 않겠지만, 잠시 지켜보다가 여차하면 광휘의 기사를 들고 물 밖으로 튄다.

그 생각만으로 그는 엄청난 압력을 애써 버텨 가면서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내려갔다.

그리고.

‘끄읍.’

예의 그 빛을 잡아먹는 검은 구멍이 있던 위치까지 잠수해 왔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꼬르르륵.

‘이, 이게?’

완전히 사라진 검은 구멍.

그리고 그 흔적을 통해 해구 안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는 흙더미와 바윗덩어리들.

처음 봤을 때부터 어쩐지 불길했던 검은 구멍이, 기어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괴물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 광휘의 기사는 인류의 희망입니다, 후셀 군. 과거의 악연을 청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라도 그를 최대한 도와주세요.

대제사장 우란 누드의 말이 다시 머리를 스쳤다.

‘왜…….’

처맞고 중상을 입은 건 난데, 왜 내가 빚을 갚아야 하는 거지?

당장 이 자리를 떠나라는 욕망의 목소리가 내심에 울려 퍼졌지만.

‘제엔장!’

후셀은 자신도 모르게 바위와 흙과 물을 집어삼키는 구멍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단순히 과거의 과오를 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 어인족, 아니 해양 생물의 태를 타고나는 수인족의 아이들은 더 이상 차별받지 않을 걸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현세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에는 광휘의 기사가 필요했다.

그 생각 하나가 몸을 던지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

우르르르릉.

불길한 울림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은 구멍 안에서.

후셀은 멀리서 끝없이 솟구치는 노을빛을 보았다.

‘찾았다!!’

그 빛을 지표 삼아 가속하기 시작하는 범고래.

그리고 그때, 노을빛을 뿌리며 솟구쳐 올라오던 인간 역시 그를 발견한 듯했다.

[오! 젠장! 빌어먹을 악마추종자 쓰레기! 반갑다!]

‘……X발, 그냥 갈까.’

속이 부글거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 괴물 같던 놈이, 지금은 상태가 온전치 못한 것 같았으니까.

이전과는 다르게 희미한 노을빛만 뿜어내는 것도 그렇고, 솟구쳐 올라 오는 속도도 주변 변화에 비해서는 너무 느렸으니.

저대로라면 얼마 못 가 무너지는 돌 더미에 파묻힐 것 같았다.

후셀은 울화를 참아 가며 타이니에게 접근해 머리로 그의 몸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주둥이로 놈의 엉덩이를 밀어 올리는 기분은 참으로 더러웠다.

그런데 그때, 놈이 이상한 제안을 해 왔다.

[내가 널 탈게. 마나 동조 거부하지 마!]

이게 뭔 소리일까 싶을 때.

놈이 자신의 등 뒤에 미끄러지듯 올라타더니, 두 다리로 허리 지느러미 부근을 꽉 조였다.

그리고 갑자기 전신으로 흘러 들어오는 마나, 아니 오러.

‘미친!!!’

깜짝 놀라 그대로 몸부림치는데.

[받아들여!]

그 서늘한 정신파가 이를 악물게 만들었다.

‘……그래, 죽어 보자. 애들이 살 세상을 위해서.’

이 한목숨 갈아 넣어 보겠다는 각오를 하자마자.

우우우웅.

이상하게 온몸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저 괴물은 기사들이 쓰는 기승 스킬을 마나가 아닌 오러로, 그것도 10m에 가까운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시전한 것이다.

[역시 되네?]

……역시 되네?

안 됐으면?

또다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달려! 아니, 헤엄쳐!]

놈이 정신파로 재촉해 온 순간, 후셀은 눈앞에서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흙과 바위 더미들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바바박.

마치 해저의 거대한 압력을 전혀 못 느끼는 것처럼, 노을빛으로 빛나는 범고래가 무너지는 해구의 출구를 향해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아아앙.

‘사, 살았…….’

검은 구멍을 지나 끔찍한 해구에서 빠져나온 후셀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사방에서 서늘한 살기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뭐……?’

[저건 또 뭐야? 인어? 벌써?]

종종 보아 왔던 머맨이나 세이렌과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괴물들.

매끈한 인간의 상체와 찬란한 물고기 하체를 지닌 수백 개체의 인어들이, 빛나는 창과 방패를 든 채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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