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여왕의 권능
[감히!!!]
예상했던 대사 그대로 호통이 떨어졌다.
‘감히라니, 흐.’
돌진하는 순간 부릅떠진 눈을 보니, 여왕은 이 경우를 전혀 상상하지 않은 듯했다.
애당초 나타나는 순간부터 상대를, 아니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하던 태도와 그 이후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저 인어는, 천계 외에는 아무것도 자신의 적수로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신성을 지닌 자답게 그 존재감과 영격은 악마급 마족을 압도하는 수준이긴 했지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목적 달성을 위한 발판 정도로만 생각하는 오만한 어인족의 여왕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심지어.
‘이미 마족과 협력하기로 한 적이니.’
우웅.
타이니는 중력을 조정해 해저의 압력을 최대한 상쇄하고.
쾅!
발밑으로 폭발 속성을 터트려, 그대로 해류를 가르며 쏘아지듯 나아갔다.
그리고 지금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최강의 일격을 준비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 과정이 필요한 빅뱅 대신, 즉시 발동할 수 있는 유성 떨구기.
노을빛 유성이 된 그의 몸이 그대로 가속하며 여왕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콰콰콰콰.
물론 그럼에도 지상에서와 비교하면 한참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조금씩 좁혀 온 여왕과의 거리는 한순간에 가까워졌고.
자신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될 듯한 인어의 얼굴이 급속도로 확대되는 순간.
녹턴이 휘둘러졌다.
[사라져라! 신화시대의 망령!!]
꽈아아아앙!
[하찮은 인간 놈이!!!]
그 순간, 분노한 여왕의 손짓에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바닷물이 동시에 반응했다.
‘읏?’
유성 떨구기의 힘을 감쇄함과 동시에, 여왕에게 덮쳐드는 모든 여력을 아예 다른 방향으로 흩어 버리는 바닷물의 움직임
꽈아아아아아앙!
우우우웅.
콰콰콰콰콰.
그 강력한 물결에 반발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지만, 여기까지는 그도 각오했던 바였다.
‘그래. 쉽게 잡으리라는 기대도 안 했다.’
타이니는 자신을 압박하는 바닷물을 블랙홀의 힘으로 흡수해 가며, 오히려 해류의 중심을 향해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전면에서, 푸른 눈에 살기를 피워 올리는 여왕의 얼굴을 마주했다.
[인간치고는 제법이다만……. 느려.]
콰드드드득.
그와는 다르게 해류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는 듯, 아니 오히려 도움을 받는 듯한 여왕의 움직임.
타이니가 방어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짐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껴 보거라.]
쾅!!
‘큽!’
그 가벼운 동작에, 타이니는 마치 거인이 휘두른 망치에 얻어맞은 듯 아찔한 느낌과 함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본능적으로 끌어낸 불굴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 순간 이미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콰콰콰콰콰콰콰.
콰콰쾅!
우르르르르르릉.
점점 무너져 가는 해구 안에서 가라앉는 바위들을 피해 가며 간신히 중심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제법이군. 하나 짐의 뜻을 거스른 자의 최후는 결정되어 있다.]
멀리서 눈을 빛내는 여왕의 얼굴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콰콰콰콰콰콰콰.
주변을 채우고 있던 바닷물이 지금까지보다 수십 배 더한 압력으로 그를 누르면서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불굴의 권능을 뚫어 내지는 못했지만, 타이니는 꼼짝없이 회오리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큭! 월랑!’
- 컹!
우드드득.
그 순간 체격이 부풀어 오르며 새하얀 머리와 송곳니를 드러낸 그의 손이 회오리의 일각을 통째로 뜯어냈다.
‘젠장, 처음부터 전력으로 갔어야 했어.’
혹시나 몰라 여력을 남겨 놓은 것이 실수였다는 생각을 떠올리는데.
끊임없이 살기를 뿜어내던 여왕이 갑자기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호? 이상한 술수로구나. 권능의 파편에 짐승신의 흔적이라니? 네놈, 창조주의 파편을 가진 것이 아니었더냐?]
정령을…… 모른다?
쾅.
의아했지만, 굳이 대화를 받아 줄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무시하고 다시금 돌진하자, 여왕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그 누구도, 내 세상에서 나를 거역할 수는 없다!]
콰콰콰콰콰.
다시금 주변의 해류가 미증유의 힘을 담은 채로 타이니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큭.’
여왕이 특별히 어떤 힘을 소모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도 바다가 그 뜻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런 종류의 힘이라면 타이니에게도 이미 익숙했다.
‘권능.’
어쩌면 인어족의 여왕이라면 당연히 갖출 수 있는 능력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혼이 7개로 쪼개졌는데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그가 알고 있는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권능. 그것은 신성을 얻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으로, 경지에 오른 초인이 남긴 삶의 흔적이자 카르마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온전한 영혼으로 정신을 집중해야지만 사용 가능한 것이 권능이다.
아직 온전히 오러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신이 불굴을 쓸 때면 다른 큰 기술이 봉인되는 것만 봐도, 그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런데.
[한낱 인간이, 바다에서 나를 거역하고자 해? 정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너무 많은 시간이…….]
전투에 집중하지 않고 바다 위, 아니 아마도 그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여왕의 태도에도, 그를 압박하는 물길의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증가하는 듯했다.
콰드드드득.
[호오, 권능의 조각? 제법이구나.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여왕의 가벼운 손짓에 해저의 모든 바닷물이 호응하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압박 속에서 타이니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단순히 경지의 차이가 아닌 것 같았다.
일곱 조각 난 영혼으로도 권능을 온전히 발휘한다는 것은, 일곱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모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과 같았다.
한마디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일곱 조각 난 부분이 하나의 개체로 부활한 것부터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콰콰콰콰콰.
‘끄으으.’
타이니는 불굴을 유지하며 통증을 참아 가면서도, 반격하기보다는 속으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저 여왕의 분체가 온전히 권능을 발휘하는 것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본 것이다.
온전한 권능을 얻을 수 있는 길.
즉.
‘오러마스터의 길.’
그에겐 이미 편법으로나마 잠시간 그 경지에 올라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눈앞에는, 권능에 대한 상식을 파괴하며 그를 압박하는 적이 있다.
이 실마리를 풀면, 자신이 갈망하는 그 경지에 온전히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적이 그런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짜증 나는구나. 반쪽짜리 권능으로 계속 버틴다고? 신성도 얻지 못한 버러지가?]
콰르르륵.
한순간에 미끄러지듯 눈앞에 나타나는 여왕.
물속에서 운신의 제한을 느끼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연구가 필요한 버러지로구나. 이 정도면 뭐 강제로 거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품위야 상하더라도.]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눈을 빛낸 여왕이, 주변을 휘도는 거친 소용돌이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 타이니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너, 내 것이 되어라.]
분명 아름답지만 보통 인간보다는 세 배는 큰 얼굴이, 갑자기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입술을 내밀었다.
‘으엑!?’
권능에 집중하던 의식이 대변에 흐트러진 그 순간.
쪽.
기분 나쁜 촉감과 함께,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만물의 근원, 바다의 주인을 경배하라! 마땅히 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어야 할 진정한 주인을 경배하라!
우우우웅.
- 창조주의 파편을 내게 넘겨라!
‘큭!’
동대륙에서 잠시간 러스트에게 홀렸던 때의 경험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것을 달리 말하면, 한 번 겪어본 일이었으니.
갑자기 여왕의 모습이 에스티나로 보이는 것을 느끼면서도, 타이니는 구겨진 표정으로 포효했다.
[꺼져라!!]
우우우우웅.
콰콰콰콰콰.
그 의지의 파동은 머릿속을 파고든 여왕의 목소리를 떨쳐 내고, 자신을 압박하던 소용돌이의 일부까지 흩어 버렸다.
‘어라?’
그 작은 변화가 그에게 벼락같은 영감을 선사했다.
특별한 힘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정신을 집중하여 머릿속에 스며드는 매혹의 술수를 떨쳐 내려 한 것뿐인데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 신성은 세상에 자신만의 법칙을 강요한다. 그것이 권능…….
권능을 체득할 때 검선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여왕의 목소리 대신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는데.
‘그래, 법칙. 그렇다면 저 여왕이 나누어진 영혼으로도 권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세상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법칙.
그 법칙만 온전히 세운다면, 불굴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나의 세상, 자신만의 영역을 넘어서 세상 전체에 내 영혼을…….’
수많은 시련과 사건에 담금질 된 타이니의 영혼이 비로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자각하고 스스로 메우려 하는데.
[……이것도 버틴다고?]
적은 그 영감을 체화할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껏 구겨진 여왕의 얼굴.
[그렇다면 그대로 분쇄해 주마!]
콰콰콰콰콰콰콰.
분노한 영파가 퍼져 나가는 순간, 그를 압박하던 해류가 순식간에 몇 배로 강해졌다.
핏발이 선 여왕의 얼굴은 그녀 역시 지금은 전력을 다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만큼 더욱 강하게 전신을 압박해 오는 통증이 그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어림없다.’
까드드득.
육체적 통증으로 인해 의지가 꺾일 만한 수준은 이미 전생에 넘어섰다.
그 말은 즉, 적어도 자신의 의식을 한 번에 날려 버릴 만한 강력한 타격이 아니라면 언제까지고 버텨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새삼 자신이 터득한 권능 불굴이 사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버티는 것만으로 상황이 호전될 리는 없었다.
[이것도!? 그렇다면 이것도 버텨 봐라!]
마치 자신만의 세상에 따로 존재하는 듯,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해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여왕.
그녀는 회오리의 압박을 받는 그의 육체를 향해 그대로 양손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톱이 해류를 긁어 대는 순간, 아주 가늘게 뿜어져 나온 물결의 칼날이 소용돌이를 뚫고 타이니의 몸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쩌저저저적.
‘크윽!’
한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는 통증이 전신에 엄습했다.
강력한 타격에 따른 통증의 크기가, 권능 불굴로 버틸 수 있는 한도를 넘을 뻔한 것이다.
‘안 돼!’
강렬한 위기감을 느낀 그는 흩어질 뻔한 의식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좀 전까지 자신하던 불굴의 권능에 대한 자신감이 확 줄어들었다.
‘이게 고작 7분의 1이라고?’
타이니는 이번 공격으로 다시금 확인했다. ‘여왕의 세상’, 그 권능이 가진 힘을.
‘아무리 이곳이 해저, 즉 여왕의 세상이라 해도 이 정도라면…….’
일곱 갈래로 나뉜 영혼이 원본(?)으로 합쳐졌을 때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반드시 이곳에서 없애야 한다.’
하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버텨!? 이것도!? 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자!]
콰콰콰콰콰콰콰콰!
분노한 영파가 들려오는 순간, 타이니는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버틸 수 없다면.
‘모험을 한다.’
결심을 하는 순간, 궁극기를 준비하는 녹턴에 상서로운 노을빛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불굴의 권능이 풀렸다.
쩌저저정.
콰콰콰콰콰.
[그럼 그렇지. 여기까지가 한계로구나! 아하하하. 인간치고는 제법이었다.]
파파파파박.
여왕의 오만한 영파와 함께 그녀의 손톱 끝에서 뻗어 나온 물의 칼날들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에 상처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크윽!’
빅뱅을 시도하며 만들어진 에너지 흡입력이 물의 칼날과 소용돌이를 그나마 약화시켰고.
콰직.
그가 챙겨 놓았던 악마 부관들의 데모닉 웨폰이 공교롭게도 그 공격을 막고 부서진 덕에, 사지가 절단되거나 으스러지는 걸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은 절대 못 버틴다.’
이번에 끝내야 했다.
‘바닷물이 여왕의 세상이라면, 그 전체를 통째로 증발시켜 버리면 된다.’
온몸으로 피를 흘려 대는 기사가 휘두른 워해머에서, 깊은 해저의 어둠을 완전히 날려 버리는 노을빛 서광이 뻗어 나왔다.